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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딸로 태어났다-12화 (12/185)

제12화.

“...입에 안 맞니?"

화려하게 차려진 식탁을 앞에 둔 채, 멀뚱멀뚱 쳐다만 보고 먹지를 않으니 클로에가 물었다.

"아. 아니요. 조금 놀라서.”

확실히 제국에서 가장 유명한 상단은 다른 건가.

화려한 식탁 위에 차려진 먹음직스러운 음식은 보육원과는 너무 차이가 나서 나는 무엇에 먼저 손대야 할지 갈피도 잡지 못했다.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수프도, 상큼해 보이는 샐러드도, 부드러운 부위로만 만들어진 고기 요리 등.

다양한 음식들을 보며 멍하니 있으니 이상해 보였나 보다.

'몸에 무리가 가지 않을 정도로만 먹는 게 좋겠지.'

지금까지 제대로 챙겨 먹은 적이 없으니까, 갑자기 부담스럽게 먹으면 안 될 거야.

생각이 끝나자 비장한 기분이 들었다.

'좋아, 일단 수프부터.'

나는 침을 한 번 꿀꺽, 삼키고서는 스푼으로 천천히 수프를 떠서 입가로 가져갔다.

꿀꺽.

따끈하고 부드러운 수프가 목을 타고 천천히 내려갔다.

아, 맛있다.

너무 맛있어.

넣자마자 스프의 풍미가 입안을 가득 채웠다.

처음 먹어 본 이 맛있는 음식에 나도 모르게 저절로 손이 빨라졌다.

허겁지겁 수프를 먹는데 갑자기 식탁 위가 조용해졌다.

"...?"

내가 너무 급하게 먹었나?

다들 굳은 표정에 놀란 눈빛이었기에, 혹시 내가 먹는 모습이 너무 추잡스러워 보였나? 라는 생각이 들 때쯤.

“다프네, 울어?”

리카르다의 물음에 나는 들고 있던 스푼을 내려놓고 내 뺨을 훔쳤다.

그의 말처럼 내 뺨에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눈을 깜빡이자 기다렸다는 듯 눈물이 후두두 떨어졌다.

“... 울었네요?"

나조차도 당황해서 말을 더듬으니 다시 리카르다가 물었다.

“잘 먹는 것 같았는데. 혹시 맛없었어? 다른 요리 줄까? 앞에 있는 라자냐도 맛있는데.”

안절부절못한 목소리로 황급히 다른 음식을 내 앞으로 가져다주려는 것에 오히려 내가 당황하여 고개를 저었다.

어떻게 이 음식을 맛없다고 할 수 있어?

“이렇게 맛있는 음식 처음 먹어 봐요. 그래서… 울었나?"

"...."

말을 흐리자 황급히 내 앞에 다른 요리를 내려놓던 리카르다의 손이 굳었다.

어쩐지 자꾸 나 때문에 정적이 내려앉는 이 상황이 너무 부담스러웠다.

마치 무거운 짐이 어깨에 내려앉은 듯한 느낌에 괜히 몸을 움츠리 는데 다시 리카르다의 손이 움직였다.

“그랬구나. 그럼 수프에다가 이 빵도 찍어 먹어 볼래? 빵에 촉촉하게 수프가 배면 맛있어.”

"아. 네.”

리카르다는 앞에 놓인 빵을 작게 썰어서 내 접시 위에 올려 주었고, 나는 그의 말처럼 수프에 빵을 찍어 먹어 보았다.

“…맛있어요.”

목소리가 조금 높아졌다.

나도 모르게 높아진 목소리에 부끄러워 얼굴을 붉히자, 리카르다가 해맑게 웃었다.

“그렇지? 내가 만들었거든. 맛있게 먹어 주니 보기 좋네!"

뿌듯한 목소리와 함께 그가 다양한 음식을 접시에 조금씩 덜어 주었다.

옆에 앉아 있던 레녹스는 내 눈가와 뺨에 흘러내린 눈물을 손수 건으로 조심스레 닦아 주었다.

“눈물 자국이 남으면 안 되니까.”

"고마워요.”

뭔가 너무 어린애 취급을 받는 것 같은데?

그들이 내게 왜 이렇게까지 하는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경멸이나 악의는 아니었으니, 무거운 마음을 잠시 내려놓고 입안에서의 즐거움을 즐기기로 했다.

*

“진짜 맛있었어요.”

내가 먹는 속도가 느린지라 모두의 식사가 끝난 뒤에도 계속 먹고 있느라 민망했지만, 너무 맛있어서 쉽게 포크를 내려놓을 수가 없었다.

다행히 모두가 천천히 먹으라고, 기다려 주겠다고 하여 조금 더 즐거움을 맛볼 수 있어서 어째 조금 행복해진 기분이 들었다.

'행복 게이지가 있다고 하면 벌써 10%는 찬 것 같아.'

지금까지는 그저 배를 채우는 데만 급급해서 맛을 즐길 여유는 어디에도 없었는데.

이렇게 여유롭게 먹어 보니 이제야 음식이란 것이 이렇게 맛있고, 식사하는 것이 즐겁다는 생각이 들었다.

'먹기 위해 살아간다는 말이 있을 정도니까.’

나는 평소완 달리 가득 찬 배를 바라보다가 앞에 놓인 후식까지 맛있게 먹어치웠다.

'나를 돼지라고 생각하면 어떻게 하지? 많이 먹는다고 내쫓으면?'

순간 이런 고민이 들었으나.

'돈이 많은 상단인데. 이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그리고 음식을 남기면 나쁜 거라잖아.'

조금의 걱정이 들었지만, 합리화는 성공했다.

나는 앞에 놓인 푸딩을 깨끗하게 비우고서 만족스럽게 배를 쓰다듬었다.

그러자 옆에서 작게 웃음소리가 들렸다.

"아, 미안해. 맛있게 잘 먹었어?"

레녹스가 짐짓 웃지 않은 척 시치미를 떼다가 나를 보고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이렇게 맛있는 음식 진짜 처음 먹어 봤어요.”

그 말에 리카르다가 뿌듯해하며 고개를 빳빳이 세웠다.

“우리 집 음식은 내가 책임지거든. 먹고 싶은 것 있음, 다 말해!

이 오빠가 책임지고 다 해 줄게!"

'얘는 왜 자꾸 오빠라는 말을 강조하는 걸까?' 낯선 호칭이 조금 거슬렸으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만 같으면 좋겠어요.”

무엇 하나 빠짐없이 완벽했으니까!

맛없는 걸 주는 사람은 나쁜 사람이었으니, 맛있는 것을 주는 사람은 좋은 사람이라 생각하자.

나는 지난 세월 동안 먹은 것을 생각하다 고개를 저었다.

이미 머릿속에서 깔끔하게 지워져 생각도 하기 싫었다.

“흠흠. 맛있게 먹었다니 다행이구나.”

“잘 먹었습니다.”

내 인사에 어머니는 빙긋 웃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그녀도 조금 뿌듯해 보이는 데, 내 착각인가?

“우선 앞으로 네가 해야 할 일에 대해서 알려 주마.”

식사가 끝나자마자 바로 본론인가?

'역시 상단주는 그냥 하는 게 아니야. 잠잘 곳도, 먹을 것도 충분히 베풀었으니까 이제 그 값을 하라는 거구나.'

시간 낭비는 용납하지 않으려고 이렇게 바로 본론을 꺼내는 거야.

역시 대단하다고 생각하며 나는 풀어진 자세를 바르게 잡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무엇을 하면 되죠?"

어떤 일이든 시키는 것은 뭐든지하겠다는 각오는 이미 갖춰져 있다.

'죽으라는 것만 빼고 뭐든 다 할 수 있으니까.'

내 굳은 결심이 보였는지 어머니 또한 손을 깍지 껴, 턱을 받치더니 진지하게 말을 꺼냈다.

“어려울 것 없이 딱 두 가지란다. 할 수 있겠니?"

무엇인지 이야기는 해 주지 않고서 다짐부터 받아 내겠다는 거구나.

나는 침을 꼴깍 삼키고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죠.”

“좋아. 우선, 첫째.”

날카로운 어머니의 눈빛이 머리부터 아래로 흘러내려 갔다.

괜히 밀려오는 긴장에 허리를 꼿꼿이 세우는데 드디어 그녀가 입을 열었다.

“그 종이처럼 흐물거리는 약한 몸을 정상으로 되돌릴 것.”

"네?"

엄청난 일이 올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뜬금없이 내 건강에 관해 이야기가 나오니 갑자기 탁, 하고 힘이 풀렸다.

당황하며 눈을 깜빡이는데도 어머니는 눈빛 하나 변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다친 다리도 하루빨리 회복할 수 있도록 식사도, 약도 꼬박꼬박 챙겨 먹어야 한다.”

그것뿐이 아니라는 듯 어머니의 입은 멈추지 않았다.

“다리의 상처도 그 외 자잘한 상처들도 모두 다 리카르다에게 치료를 받아야 하고."

"네 사정을 보면 의사나 신관을 불러오기는 힘들 것 같아서. 그래도 기본으로 치료 마법은 쓸 줄 아니까. 오빠만 믿어?"

어머니의 말 뒤로 리카르다의 당당한 말이 이어졌지만, 어이없는 조건에 놀란 내 귀에는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

“밥을 거른다거나, 약을 안 먹으려고 한다든가, 치료를 거부한다 든가 하면 안 된단다.”

"......."

“대답해야지?”

"아, 네!"

내 대답이 나오자 어머니는 바로 두 번째 조건에 대해 입을 열었다.

"둘째, 하고 싶은 것들에 대해, 즉 소원에 대해 다섯 가지 이상 생각해서 내게 얘기하기."

두 번째 조건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일이라서 나는 어떤 대답도 못하였다.

이건 혹시 나를 놀리려는 건가 싶어 입술을 지그시 물고서 그녀를 마주 보며 답했다.

“두 가지 조건과 저의 후계자 자격이 관계가 있나요? 저는 일을 시키실 줄 알았는데요."

내 맹랑한 대답에 어머니는 그렇게 대답할 줄 알았다며 피식 웃었다.

"후계가 되기 전에, 사람으로서 살아가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건강이란다. 건강해야 살아갈 수 있으니까.”

"......."

“건강한 후계자가 되어 줘야 하니 첫 번째 조건은 타당하지."

어머니의 말이 맞았다.

뒤를 이어받을 자가 병약해서는 주변에 무시당하기 십상일 테니까.

“둘째 조건에 대해서도 얘기해 주마. 상단의 후계자라 하면 부족한 것 하나 없이 살 줄 알아야 한단다.”

옆에 있는 레녹스와 리카르다가 그 말에 맞춰 긍정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엇보다 상인이란 자신의 욕망, 욕구가 얼마나 크냐에 따라 사업의 존망이 달리지. 그것을 끄집어낼 수 있어야 해."

“…그런 건가요?"

“물론 끄집어낼 뿐만 아니라 숨길 수도 있어야 하지만… 너는 끄집어내는 것부터 배우는 게 좋겠지.”

확실히 설명을 다 듣고 나니 후 계자가 되기 위해 다 필요한 조건 같았다.

'역시. 어린애 하나도 확실하게 계약의 상대로 여겨 주시는구나.'

괜히 이 큰 상단을 이끌어가는 사람이 아니라며, 나는 속으로 어머니의 속뜻에 감탄하며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조건을 내밀었다고 너무 서운해하지 말렴.”

“물론이에요.”

마냥 주어지는 동정이 아니라 목표를 만들어 주니 오히려 더 힘이 생겼다.

“그럼, 저 건강해질게요. 밥도 꼬박꼬박 챙겨 먹고, 약도 안 빼먹고, 치료도 받아서 건강해질 거예요.”

“그래야지.”

“그리고 하고 싶은 것도 생각해 볼게요. 언제까지 하면 될까요?"

"기한은 없으니 여유롭게 생각해 보렴. 여유가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은 눈에 띄게 다르지. 겉으로도, 속으로도 말이야.”

마치 나를 파고들 것 같은 눈빛은 급박한 그 마음을 포기하거나 숨기라고 말하는 충고 같았다.

만난 지 이틀밖에 되지 않았으나, 뭔가 어머니 같은 충고라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네!”

그리고 대답은 힘차게 했다.

정적이 흘렀던 식탁 위에는 어느새 훈훈한 분위기가 차올랐다.

어머니도, 레녹스도, 리카르다도 어쩐지 만족스러워 보이는 표정이었다.

나 또한 이 상황이 너무 만족스러우니 하루하루가 오늘만 같으면 좋겠단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런 의미에서. 이걸 주는 것을 깜빡했더구나.”

“네?”

어머니가 식탁 아래에 놓았던 물건을 들어 올렸다.

"아, 그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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