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녀의 딸로 태어났다-13화 (13/185)

제13화.

“…제 가방이네요?"

갑자기 나타난 물건의 정체는 바로 내가 들고 왔던 가방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날 정신없이 떠나고, 또 정신을 잃고 왔으니까.'

이 건물과 어울리지 않는 저 낡은 가방은 유독 존재감을 내뿜었다.

'잠깐만. 생각해 보니 저기 서류만 넣어 놓은 게 아니었는데?'

용도를 알 수 없는 도장을 보고 중요한 물건 같아 마지막 수단이 될지 모르니 넣어 두었던 것 같은데….

하필 그걸 잊고 있었다니.

잘 안 보이게 옆 주머니에 챙겨 넣었다고 하지만, 그래도 가방을 꼼꼼히 뒤져 보았을 수도 있겠지?

'혹시 봤을까?'

정말 최후의, 최후의 수단으로 보관해 두려고 했던 건데.

갑자기 드는 조바심에 몸을 들썩이다가 순간 차가워지는 어머니의 눈빛에 조금 전 말을 떠올렸다.

'여유가 없어도 여유를 가진 척해야 한다 하셨지.'

놀란 가슴을 진정시킨 뒤 조급한 마음을 뒤로 숨기고, 아무렇지 않은 듯 평범한 반응을 이끌어 내야 한다.

‘하지만 그런 연기는 해 본 적도 없고, 마음이 이렇게 조급한데….'

실제로 짧은 시간밖에 흐르지 않았겠지만, 등을 타고 흐르는 식은땀이 느껴지는 것이 체감 상 한참 지난 것 같았다.

'아니야. 마음을 편히 가지자. 난 연기를 하는 게 아니야.'

연기한다고 생각하지 말고, 진심으로 그렇다 여기는 거야.

진심으로 아무렇지 않으니까, 조급할 이유도, 여유를 잃을 필요도 없는 거야.

속으로 끊임없이 되새기고, 되새겨서 마음속으로 주문을 외치듯 깊이 새겨 넣었다.

그러자 스스로도 믿지 못할 만큼 자연스럽게 표정이 편안해지고, 조급함이 뒤로 숨어 들어갔다.

“챙겨 주실 줄 몰랐어요. 감사합니다.”

“어떻게 버리겠니. 혹시 중요한 물건이 있을 수도 있는데.”

마치 떠보는 것 같은 물음에 그저 눈을 한 번 깜빡였다.

내 대답을 기다렸던 것은 아닌지 어머니는 차가운 눈빛을 거두셨고, 이제 슬슬 일하러 갈 때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일을 하러 수도로 돌아가야 한단다. 리카르다도 오늘은 바쁠 테고, 레녹스가 시간이 되니 너의 옆에 있어 줄 거란다.”

“미안, 다프네. 이 오빠도 같이 있어 주고 싶은데! 다프네를 위해서 병원에 가서 지인들에게 치료마법 확실하게 배워 와야 해.”

리카르다는 흐르지도 않는 눈물을 닦는 척했다.

레녹스의 가증스럽다는 듯 쳐다보는 시선이 아무렇지 않은지 그는 이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니 저녁에 보자. 먼저 가보겠습니다, 어머니!"

그 말과 함께 바닥에 마법진이 떠오르더니 빛을 내뿜으며 리카르다가 사라졌다.

"...!"

저게 바로 마법이라는 건가?

보육원에 갇혀 살다시피 하였기에 이런 것은 말로만 들었지, 직접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토끼처럼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리카르다가 사라진 곳만 바라보다가 어머니의 말에 정신을 차리고 시선을 옮겼다.

“그럼, 나도 이만 가 보마. 저녁식사 시간에 보자꾸나.”

어머니는 성큼성큼 걸어오더니 내 머리를 한 번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셨다.

그리고 처음 만났을 때처럼 신비한 연기와 함께 자리에서 사라졌다.

“…와."

다시 보아도 신기한 장면들에 감탄을 숨기지 못해 나도 모르게 입을 열고 사라진 곳만 빤히 바라보았다.

'마법이라니. 이제야 뭔가 살던 세상이 변한 느낌이 들어.'

전생에서도 고아로 살아왔기에 전생이든 현생이든 조금 더 고달플 뿐, 다를 바 없는 세상이었는 데,다른 세계에 살고 있다는 느낌이 확실하게 들어 괜히 가슴이 콩콩거리며 설렜다.

“리카르다는 아주 훌륭한 마법사고, 어머니는 연기술사란다. 둘 다 마력이 강해 자신들의 강점을 아주 잘 다루지.”

내가 감탄에 젖어 있는 사이 레녹스는 어느새 그릇을 다 정리했는지 깨끗해진 식탁 옆에 서서 나를 바라보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뛰어난 사람들이지. 그리고 너도 저렇게 될 수 있을 거야.”

"…레녹스는요? 레녹스도 마법사예요?”

"음, 나는 마법사는 아니고."

레녹스가 잠시 주춤하며 자신의 머리칼을 만지작거리더니 부끄럽다는 표정을 지으며 웃었다.

"나는 연금술사야. 물약을 만든다거나, 신비한 물건을 발명한다거나… 그런 일을 해.”

밀려오는 부끄러움이 거대하기도 한지, 어울리지 않게 얼굴을 붉히는 모습이 그제야 그 나이대 소년으로 보였다.

“물약이라면 제 약도 레녹스가 만들어 주는 거예요?"

"리카르다가 요청한 대로 만들어주는 것뿐인걸.”

"와….”

대단한데, 왜 저렇게 부끄러워하는 거지?

레녹스가 더더욱 얼굴을 붉혔고, 나는 그를 배려하여 질문은 여기까지 하기로 했다.

질문이 끝나자 레녹스가 기다렸다는 듯 팔을 벌렸다.

“자, 그럼 이만 방으로 돌아갈까?”

"......"

레녹스가 팔을 들어 나를 안아올리려고 할 때 내가 잠시 망설이자 그가 순간적으로 멈칫했다.

"왜 그래? 혹시… 안기기 싫어서…?”

"아니, 아니요. 아직 방으로 돌아가기 싫어서….”

'어머니께서 방을 나가지 말라는 소리를 한 것은 아니니까, 이 정도 부탁은 해도 되겠지?

“여기가 어딘지 구경하고 싶어요. 앞으로 살아갈 곳이니까."

필요한 정보는 최대한 많이 얻어두는 게 제일 중요하다.

지금 내 상황에서는 정보가 많으면, 많을수록 좋으니까.

어머니는 두 가지만 하라고 하셨지만, 이 소설 내용을 아는 나는 곧 다가올 미래가 무엇인지 안다.

'곧 2부의 남자 주인공이 등장해.'

이야기의 시작 전에 내 상황을 완벽하게 파악할 필요가 있다.

나는 두 주먹을 질끈 움켜쥐고서는 레녹스를 올려다보았다.

“안 돼요?”

내 비장한 눈빛을 느낀 것인지 몰라도, 레녹스는 굳은 표정으로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허락에 나는 팔을 조금 들어 올렸고, 식사 전과 같이 그에게 푹 안겨 들었다.

"네 말이 맞지. 앞으로 살게 될 집 정도는 알아 둬야 하니까. 부탁하고 싶은 게 있으면 눈치 보지.

말고 솔직하게 얘기해도 돼.”

"응, 고마워요.”

확실한 허락이 떨어졌으니, 이 집을 샅샅이 조사하겠어.

나는 레녹스가 나를 내려다보는지도 모른 채 눈을 반짝반짝 불태웠다.

* * *

“너는 중심가의 지하실로 찾아왔잖아? 여기는 거기와 연결된 사택이야.”

이곳은 내가 찾아온 곳과 다른 장소였나 보다.

“수도 쪽엔 상단의 공식 사무실이 있어.”

“그럼 여기는 어디인데요?"

레녹스는 내 물음에 답하지 않고 빙긋 웃고서 앞에 있는 커튼을 확거두었다.

“…?"

겨울이라고 생각하지 못할 만큼 푸르른 나무와 지저귀는 새.

그리고 마당 한쪽에는 작은 정원이 보였는데 형형색색의 꽃이 가득했다.

“진짜 여기는 어디예요??"

숲이라고 하기에는 계절과 동떨어져 있고, 그렇다고 수도라고 하기에는 사람들과 동떨어져 있는 것 같은데.

내가 눈을 찌푸리며 마치 창문을 넘어갈 것처럼 둘러보자, 레녹스는 혹시 내가 떨어질까 걱정이 되었는지 나를 다시 고쳐 안았다.

“네 말대로 숲이 맞아. 리카르다 작품이지. 보호 마법과 감식 불가마법, 그리고 은닉 마법이 함께 펼쳐져 있어.”

“왜 숲에…?”

“어머니가 시끄러운 걸 별로 안좋아하시거든. 뭐, 위치가 위치인 만큼 생명의 위…."

레녹스가 술술 말을 흘리다가 갑자기 멈칫하였다.

“…레녹스?”

"아, 아무것도 아니야. 어머니가 숲의 풍경을 좋아하셔서 그래. 일단 사생활 보호도 되니까.”

"그럼 여기서 수도에 갈 때는요?"

어머니나 리카르다야 마법으로 어떻게 가는 것 같았지만, 레녹스는?

밀려오는 궁금증에 물으니 레녹스가 실내에 연결된 계단을 타고 2층으로 올라갔다.

"여긴 어머니의 집무실이야."

어머니는 이미 수도로 출근을 하였기에 당연히 이곳에 없었다.

집무실의 문을 여니 책상 위에 쌓인 수많은 책들과, 한쪽 벽에는 거대한 시계가 놓여 있는 것이 보였다.

“여기 시계 앞으로 가면 리카르다가 걸어 놓은 마법이 펼쳐져.

출입 허가를 받은 사람만 사용할 수 있는 마법진이지."

“그럼 레녹스 전용인 거예요?”

“나 말고 어머니, 어머니 비서랑 그리고 눈물 많은 아저씨 한 명도 있어.”

비서는 그렇다고 쳐도, 눈물 많은 아저씨는 누구지?

내가 아리송한 표정을 짓자 레녹스가 방긋 웃었다.

“함께 지내다 보면 언젠간 보게 될 거야. 나중에 리카르다가 오면 다프네도 등록해 달라고 하자?"

"응, 좋아요.”

그 말과 함께 레녹스는 천천히 집을 안내해 주었다.

3층으로 만들어진 이 집은 보육원 본관의 크기보다는 조금 작았지만, 세 가족이 살기에는 충분히 넓은 공간이었다.

'일단 여유 방만 해도 서너 개는 훌쩍 넘으니까?'

평민이라고 해도 다 같은 평민이 아니라는 소리겠지.

언뜻 평범한 집 같아도 자세히 뜯어보면 꼭 그렇지도 않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내 눈에도 벽과 바닥의 반짝이는 자재는 고급스러.

워 보였다.

'역시 돈이 최고인가 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지만, 이곳에 온 게 역시 잘한 일이었나보다.

나는 집을 다 둘러본 뒤 만족감에 고개를 끄덕였다.

“집이 너무 좋아요. 지금까지 살던 곳과 다르게 너무 예쁘고, 제 방도 좋아요.”

"네 방?”

간단히 샌드위치로 함께 저녁을 먹는데 내 말에 레녹스가 무슨 소리냐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설마 거기가 내 방이 아닌가?'

나는 아침에 눈 떴던 그 깔끔한 방을 떠올렸다.

따스한 햇볕, 부드러운 침구, 그리고 깨끗한 벽과 천장.

'역시 내 것이 아니었구나.'

그래, 내가 무슨 내 방을 가지겠어.

어제 처음 본 사람에게 주기에는 너무 좋은 방이기는 했다.

여기서 머무르게 해 준 것만으로도, 말만이라도 후계자라고 해 주는 것도 감지덕지 여겨야지.

'생각해 보면 레녹스랑 리카르다를 앞에 두고 당당하게 후계자 자리를 달라고 한 거잖아?'

역시 마음에 안 들었던 거겠지….

다정하다고 마음이 쉽게 풀렸던 것은 역시 내가 어린아이여서 그랬던 것일까?

이상하게 이게 당연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코끝이 찡해져 오는 느낌에 나는 혹시라도 눈물이 흐를까 봐 입술을 꽉 깨물고 눈에 힘을 주었다.

단 한 방울의 눈물도 허락하지 않겠어.

여기서 울면 안 돼.

나는 고개를 푹 숙인 채 괜히 손에 쥔 샌드위치를 만지며, 안 우는 척, 괜찮은 척을 했다.

이러면 눈물이 들어가곤 했으니까, 이번에도… 들어갈 것이다.

“네가 있던 곳은 손님방이야. 실은 비밀인데….”

그런 나를 눈치채지 못한 레녹스가 주변을 두리번거리자 옷깃이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주변에 아무도 없는데 무엇이 그리 신경이 쓰이는지 한참을 둘러보던 그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숙여 내 귓가에 속삭였다.

“네 방은 어머니께서 따로 꾸미고 계셔. 손님방에 비교하면 훨씬 좋은 방이란다.”

레녹스의 다정한 말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따뜻했다.

지금 이 상황이 꿈이라고 생각될만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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