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화.
"...네?"
레녹스의 말에 나는 깜짝 놀라 휙 하고 고개를 들어 올렸다.
레녹스는 내 눈을 보고 흠칫하며, 조금 놀라더니 이야기를 이었다.
“실은 아까 보여 주지 않은 방이 있었거든. 기억할지는 모르겠지만.”
그 말에 자연스럽게 지나가던 문하나가 떠올랐다.
어머니의 집무실 옆에 문 하나가 더 있었던 것이다.
“기, 기억해요.”
“거기가 앞으로 네 방이 될 거야.”
"......."
이번에는 진짜 놀랐다.
너무 놀란 나머지 다시 한번 딸꾹질이 터져 나왔다.
내 반응에 당황한 레녹스가 황급히 따뜻한 물을 건네주었다.
“어, 없는 줄 알았어요.”
숨을 참아 간신히 딸꾹질을 멈추고 더듬더듬 말하자 레녹스는 그럴 리가 없지 않냐면서 웃었다.
그 웃음이 너무 다정해서, 낯설어서, 그리고 기분이 좋아서.
저 모습이 거짓이어도 좋겠다고, 순간 그렇게 생각해 버렸다.
바보같이.
소박한 저녁 식사 후, 레녹스의 권유대로 머리를 다듬기로 했다.
“머리가 더 짧아지겠지만, 훨씬 깔끔해질 거야.”
"레녹스는 손재주가 좋은 것 맞죠?”
“믿겠다는 말이지?"
레녹스가 내 말에 웃으며 가위를 들었다.
푸석푸석하고 일정하지 않은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겠다는 말에 찬성했지만 어쩐지 긴장이 되었다.
"와.”
긴장한 것이 무색하게도 레녹스는 정말 능수능란하게 손을 움직이며 머리카락을 정돈해 주었다.
“끝났다. 어때, 그렇게 오래 안걸렸지?”
레녹스가 준비해 준 거울을 보니 귀 바로 밑에서 곱슬거리는 하얀 머리칼이 보였다.
“진짜 짧다.”
“짧은 머리를 좋아하니? 직접 자른 것 같았는데.”
“아무도 안 잘라 줘서 제가 대충 자르고는 했거든요.”
아무렇지 않게 꺼낸 말에 뒷정리하던 그가 하던 행동을 멈추고 나를 바라보았다.
내게로 향하는 시선이 닿았지만, 나는 아무렇지 않기에 말을 이어갔다.
“사람들이 머리를 잘라 줄 때마다 제 머리색을 욕하는 말이 듣기 싫어서 직접 잘랐어요. 어차피 다들 날 싫어해서요."
나는 말을 더 이어 가려다가 갑자기 나를 꼭 끌어안는 레녹스 때문에 말을 잇지 못했다.
울음을 참고 있는지 슬쩍 붉어진 그의 눈가가 보였기 때문이다.
왜 자기가 슬퍼하는지는 모르겠다.
"…무서웠겠구나.”
“그냥 평상시보다 조금 심한 정도라는 생각이 들기는 했는데….”
무서웠나?
떠올리지 않으려고 했던 그때를 천천히 떠올려 봤다.
독하다고 했던가? 꼴도 보기 싫다고 했던가? 못되었다고 했었던가?
악의가 넘치는 말을 워낙 다양하게 듣다 보니 이 말이 이 말 같고, 저 말이 저 말 같아 자세하게 떠오르지는 않았다.
그렇기에 목소리는 담담했다.
“그래도 뭐, 버틸 만했어요.”
그리고 그 말에 레녹스가 갑자기 눈물을 터트렸다.
“크흡.”
레녹스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흘렀다.
마치 자기 일이라도 되는 듯 터진 눈물은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고, 내 어깨에 눈물이 스며드는 게 느껴졌다.
나는 축축해져 가는 옷에 한숨을 내쉬기보다는 왜 우는지 모를 레녹스를 위로해 주는 게 우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울지 마요.”
토닥토닥.
나보다 큰 남자에게 토닥이는 것이 조금 이상해 보이기는 했는데, 레녹스도 그리 느꼈는지 더욱 서글프게 울음을 흘렸다.
“흑, 흡.”
"......."
진짜 나 때문에 우는 건가…?
토닥이는 손의 움직임이 느려졌다.
만난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은 아이, 심지어 자기 자리를 위협할 수 있는 아이고, 무엇보다 모두가 경멸하는 악녀의 딸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도….
레녹스는 참 다정했다.
그리고 나는 이런 다정함이 참 낯설었다.
거부하고 싶을 만큼.
“레녹스.”
“…응, 다프네.”
“왜 울어요?"
“.......”
레녹스는 잠시 숨을 들이켜더니 급하게 눈물을 닦고서 붉어진 눈가를 곱게 휘며 웃었다.
“눈에 먼지가 들어갔나 봐."
"아닌 것 같던데.”
“봐”
“이제 빠졌나 봐.”
이것 봐. 이렇게 모른 척 말을 돌리는 것이 얼마나 다정한가.
그렇기에, 나는 여기서 꼭 해야 할 말을 꺼내기로 했다.
걱정시키고 싶지 않다는 듯 웃는 모습에 전과 다르게 차가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나에게 그렇게 다정하게 굴 필요 없어요. 어차피 우리는 계약 관계에 얽혀 있고, 나는….”
한 번 숨을 들이켜고서, 다정한 레녹스에게 하고 싶지 않았던 말을 입에 담았다.
"나는 욕심이 많은 아이예요. 그래서 한 번 얻은 것을 잃고 싶지 않아요. 그러니까 내게 다정하게 대해 주지 마요.”
그 말 뒤로 우리의 사이를 잇는 말은 없었다.
이만 쉬고 싶다는 내 말에 레녹스는 조금 전과 다를 바 없이 조심히 방으로 안아 옮겨 주었다.
"필요하면 불러 주렴. 푹 쉬고, 저녁때 찾아올게.”
그렇게 말을 하고 나서, 레녹스가 방을 나섰다.
침대 위에 앉아 멍하니 깔끔한 방을 바라보았다.
마냥 좋다고 생각했던 방이 혼자가 되자 순식간에 별로라고 느껴졌다.
마음이 여려 보였는데 상처받지는 않았겠지?
내 코가 석 자인데, 이 상황에서 레녹스의 걱정이라니.
“.…정신 차려야 하는데."
행복을 얻기 위해서는 살아남는 것이 우선인데.
살아남아서 2부의 내용을 비틀어버리고, 뒤섞어 버리고, 해피 엔딩을 다 뒤집어엎어야 내가 행복해질 수 있을 텐데.
“벌써 이렇게 행복해지려고 하면 어떻게 해.”
내게 베풀어주는 다정함은 행복을 가져다주지만, 벌써 찾아오는 행복은 내게 독이 될 거야.
나는 고개를 붕붕 거세게 흔들고, 두 손으로 뺨을 내려쳤다.
짝~ 하는 소리를 내며 뺨을 때리자, 그 따끔함에 다른 곳으로 생각을 돌릴 수 있었다.
“잊자, 잊어야 해. 당장 해야 할 일을 떠올려 보라고."
해야 할 일이 천지잖아.
남주인공이 나타나면 그를 죽이 든가, 아니면 다정함을 주어 그의 마음을 얻어서 이용하다가 가차없이 버려야 한다고.
그가 아무도 믿지 못하도록 만들어 여주인공과의 관계를 망쳐 버릴 거라고.
‘소설 속에서도 어머니가 굳이 남자 주인공을 죽이지는 않았었지. 이번에도 살릴 가능성이 더 클 거야.'
아무리 내가 이 자리를 차지했다.
고 해도….
내가 속한 이 엉성한 로맨스 판타지 세계는 원작의 강제성을 따르고 있으니까.
남자 주인공이 다른 의미로 이곳에 머무르게 될지도 모르니 그에게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이 도장도.'
나는 침대 옆의 낡은 가방을 들어 올려 숨겨 놓았던 도장을 꺼냈다.
‘어머니의 거절에 당황해서 서류를 모두 주는 바람에 남은 것은 이것밖에 없어.'
그럴 리 없기를 바라지만, 혹시나 하는 상황을 대비해 마지막 카드를 남겨 놓는 것은 중요하다.
무엇보다 이 도장도 평범한 물건 같지는 않았다.
이게 어머니가 잡고자 하는 보육원의 큰 약점이 될 수도 있으니까.
나는 다시 도장을 가방 깊숙이 숨겨 두고서는 가방을 한쪽에 내려놨다.
“…내가 서류를 읽을 줄 알았다.
면 건네주기 전에 내용도 다 알수 있었겠지?”
충분히 읽고서, 머리에 저장시켜 놓고 전해 주었을 텐데.
이제 와 생각해 보면 아쉽기는 했지만, 이 아쉬움으로 어머니께 말하고자 할 첫 번째 소원을 떠올렸다.
***
기세 좋게 첫 번째 소원을 정한 것이 무색하게도 어머니는 저녁식사 시간에 나타나지 않았다.
“어머니께서 너무 바쁘셔서. 아마 내일 저녁에나 돌아오실 것 같다고 하시네.”
기운 없어 하는 나와 함께 슬픔을 나누기라도 하고 싶은지 리카르다가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부드럽게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저녁은 내일 함께 먹자고 하였다.
저녁은 그렇게 조용히 흘러갔다.
오빠가 오늘 어땠는지 아냐며 쉬지 않고 입을 여는 리카르다.
그리고 조용히 들어 주며 조금씩 딴지를 거는 레녹스.
가만히 듣기만 하는 나.
밖에서 본다면 과연 가족처럼 보일까?
식사 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잘 모르겠다.
분명 음식은 맛있었는데, 왜 이렇게 속이 허한 기분이 드는 걸까?
식사가 끝난 뒤 모두가 잠든 고요한 새벽 시간이 찾아왔다.
커다란 방 때문인지, 수도 도심지와 다른 숲의 어두움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유독 밀려오는 외로움에 잠이 오지 않았다.
밤은 참 길었다.
* * *
잠을 설치다 눈이 일찍 떠졌다.
일어서려다가 다리가 다친 것이 떠올라 가만히 있으니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똑똑!
“안녕, 다프네!”
아침인데도 기운이 좋아 보이는 리카르다가 활짝 웃으며 안으로 들어왔다.
"자! 오늘의 아침 치료 시간이야!"
리카르다는 뭐가 좋은지 방긋방긋 웃으며 내 앞에 앉았다.
“오늘도 오빠가 힘내 볼게!"
“…부탁할게요.”
내가 대꾸도 하지 않는 오빠 소리는 지겹지도 않은 걸까?
익숙치 않은 호칭에 인상을 찌푸렸다가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들지 말자는 생각에 금세 찌푸린 미간을 폈다.
"어제 열심히 치료 마법의 상위버전을 배워 왔거든. 이게 효과가 좀 있으면 좋겠다.”
언제 장난스러웠냐는 듯 그의 표정 위로 진지함이 떠올랐다.
리카르다는 이불을 걷어 내 다리 위에 손을 올렸다.
곧 그의 손에서 그의 머리색과 같은 연분홍빛이 흘러나왔다.
흘러나온 빛은 복잡한 문양의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물줄기가 몸을 타고 흐르는 느낌이 들었다.
"음, 열심히는 해 봤는데. 역시 어렵네.”
한참 마법을 펼치던 그가 적당한 시간이 지났다고 생각했는지 손을 뗐다.
마법진은 바로 사라졌고, 몸이 조금 가벼워진 느낌이 들었다.
“뭔가 뜻대로 안 되네. 몸은 좀 괜찮아진 것 같아?"
“…음, 조금?”
효과가 있는지 없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의사를 부르지도 못하고, 신관도 부르지 못하는 이 상황에서 믿을만한 것은 리카르다뿐이구나.
'과연 다리를 다 낫게 할 수는 있으려나.'
리카르다가 뛰어난 마법사라고 들었지만 그래도 치료는 그의 주영역이 아니라고 했는데 가능할까?
'역시 다리가 완벽하게 낫는 것은 포기해야 할지도.
애초에 목숨 값으로 치른 것이라 여겼던 거니 인제 와서 아까워할 필요는 없잖아.
'마음을 독하게 먹어야 해, 다프네.'
리카르다가 침울해하니 왠지 나까지도 시무룩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렇기에 다시 속으로 괜찮다고, 아깝지 않다고 되새겼다.
“난 괜찮아요. 어차피 목숨 대신 바꾼 거였으니까. 리카르다의 책임이 아니에요.”
그러니 죄책감 솟게 하는 그 표정 좀 치우라고 하려고 했다.
뒷말을 잇기도 전에 리카르다는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목숨도 다리도 둘 다 구하면 되는 거야. 꼭 무언가 하나를 포기할 필요는 없어.”
“…그래도."
“왜 네가 포기를 해야 해? 포기하지 마.”
평상시의 웃음기 섞인 목소리와 다르게 리카르다의 목소리는 낮고 진지했다.
의외에 모습에 놀라니, 그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방긋 웃으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 오빠가 다 낫게 해 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