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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딸로 태어났다-15화 (15/185)

제15화.

환하게 웃으면서 하는 말에 나는 어제와 같이 말문이 턱 막히고 말았다.

도대체 이 형제들은 내게 왜 이리 잘해 주는 걸까.

고작, 고작 이런 나를.

미래에 어떻게 변할지도 모르고, 지금 가치가 있는 것도 아닌데.

이 다정함이 참 지독했다.

너무 갖고 싶어서, 또 잃고 싶지 않아서.

나는 괜히 두 손으로 이불을 꼭 그러쥐고서는 날뛰는 가슴을 진정 시켰다.

아직 저 웃음을 마주 볼 자신이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은 나와 함께 보내는 날이야! 형은 어제 쉬었으니 오늘 출근해야 하거든.”

리카르다가 신난 목소리로 낄낄거리며 웃었다.

그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에 어느 정도 마음이 진정되었다.

“형은 바쁘게 일을 하고, 나는 다프네랑 함께 시간 보내고.

“나 때문에 바쁜 거예요?"

“아니.”

나를 보살펴 주느라 그런 것 아닌가?

단호하고, 빠르게 나온 대답과 함께 리카르다는 그렇지 않다며 웃었다.

“형이 선택한 일인데 그게 너 때문이라니. 다 형 때문이지."

그런 생각은 하지도 말라며 웃은 그는 잠시 기다려 달라는 말을 남긴 뒤 사라지더니 트레이를 끌고 다시 나타났다.

“그러니 오늘 온종일 다프네랑 오빠랑 즐겁게 시간 보내자?"

* * *

어머니도, 레녹스도 없이 나와 리카르다뿐인 집은….

조용하지 않았다.

리카르다는 내게 많은 것을 알려 주고, 도와주고 싶어 안달이 난 듯 쉴 새 없이 떠들었다.

"어제 형하고 이 마법진에 관해서 얘기했다며? 자, 여기에 손을 올리면 너도 등록이 될 거야.”

리카르다는 앞으로 유용하게 사용될 것이라며 수도로 이동하는 마법진에 나를 등록했다.

어제 레녹스에게 집을 안내받았다고 하니 자연스럽게 행선지가 1층으로 향했다.

“이곳이 우리 집에서 가장 훌륭한 장소야.”

다음 행선지는 부엌이었다.

리카르다는 한쪽 의자에 나를 앉히고서는 두 팔을 걷었다.

“이제부터 저녁을 만들 건데 다 프네도 함께 만들어 볼래?"

“하지만 망치면 어떻게 해요?”

나는 한 번도 요리를 해 본 적이 없는데.

혹시나 나랑 함께하다가 요리를 망치면 어떻게 하지?

불안한 물음에 리카르다가 싱긋 웃었다.

"오빠랑 함께 만드는데 망칠 리가 없잖아.”

“그렇지만….”

나는 보육원에서의 기억을 떠올리며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

"저 때문에 음식을 망치면 모두 화를 낼 거예요. 보육원에서도 도와주려다가 항상 혼이 났으니까요.”

애초에 모두가 내 도움은 필요 없다고 하기도 했었고.

보육원과 이곳이 다르다는 것은 알지만 그래도 불안했다.

그런 내 불안을 읽었는지 리카르다가 내 앞에 마주 앉아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여기서 네가 음식을 못 만든다고 뭐라 할 사람 아무도 없는걸.”

그 말 뒤로 리카르다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누가 뭐라고 하면 어머니든, 형이든 내가 혼쭐을 내줄게.”

“리카르다가 막내잖아요."

“아니지. 우리 집 막내는 다프네잖아?”

다정한 그 말에 믿음이 생겼다.

리카르다는 내가 할 마음이 든 것을 귀신같이 알아차렸다.

비록 별것 아닌 도움이었지만, 도움을 줘서 고맙다는 말도 들었다.

그렇게 함께 만든 식사 준비도 모두 끝나고 어느새 저녁 시간이 되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 음식을 모두와 함께 먹을 수는 없었다.

“이런. 어머니는 오늘도 못 들어오신대. 형도 야근이라네.”

“.… 리카르다는요?"

"오빠는 당연히 다프네 옆에 있지! 우리끼리 완전 맛있게 저녁먹자!"

'오늘 밤도 소원은 못 말하겠네.'

글을 배우고 싶다고 말하려고 했는데.

‘어쩐지 조금 맥 빠지는 것 같기도 하고.’

시작이 반이라고 했는데, 어쩐지 시작조차 제대로 못 한 느낌이다.

무엇보다 마음이 불편해서 더 그런 것 같기도 하고.

나는 힐끗하고 리카르다를 쳐다보았다.

그는 뭐가 좋은지 계속 사람 좋게 웃고만 있다.

“걱정하지 마, 오빠가 다프네 심심하지 않게 해 줄게!”

그 후로 시무룩해 할 시간도 없이 함께 준비한 저녁을 먹었다.

그리고 레녹스가 만들어 놓은 약을 먹은 뒤 폭신한 침대에 누웠다.

나는 마법으로 깨끗하게 씻겨진채 보송보송한 몸을 부드러운 이불에 조심스레 기댔다.

포근함이 몸을 감싸니 노곤해졌다.

웃었고, 동화책을 읽어 주겠다며 그런 나를 보며 리카르다가 방긋을 주옆에 의자를 두고 앉았다.

"아주 옛날 옛적에….”

말이 많아서 그렇지, 리카르다의 목소리도 꽤 좋은 편이었다.

그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어제와 다르게 잠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눈을 깜빡이며 쏟아지는 졸음을 참다가, 오늘 함께한 시간이 너무 즐거워 꺼내야 할 말을 하지 못한 것을 기억해 냈다.

“… 리카르다.”

“응, 다프네? 오빠 여갔어."

나를 안심시켜 주려는 듯 밝게 대답하는 소리에 나는 어제와 같이 마음을 굳게 다잡으며 말했다.

“내게 너무 다정하게 대해 주지 마요.”

“…어?”

"난 평생 다정함을 받아본 적이 없어서, 그런데 욕심은 많아서…

갖고 나면 잃고 싶지 않을 거예요.”

그러니까, 여기까지만 해도 된다며,그렇게 말하려고 했다.

리카르다는 이어지는 내 말에 눈을 깜빡이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말했다.

"왜? 싫어! 나 너 예뻐할 거야!"

“?!”

갑작스러운 리카르다의 외침에 밀려오던 잠도 달아날 만큼 깜짝놀라고 말았다.

내가 눈을 둥그렇게 떠 그를 올려다보자 그가 아차 하더니 제 입을 때렸다.

“아이고, 리카르다 이 못된 입.

이렇게 시끄럽게 하면 안 돼요.”

“…그, 그러니까.”

“그리고 다프네도 이런 맘에도 없는 말 하는 거 아니에요.”

그리고 아주 가볍게 내 입을 꼬집었다.

“우우?"

나는 입술을 잡힌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웅얼거리는 소리만 내었다.

내가 항의라도 하는 듯 짜증을 내려고 하니 그가 고개를 저었다.

“아직 제대로 받아 보지도 못했는데 벌써부터 잃을 생각하면 안돼. 그럼 결국, 두려움 때문에 아무것도 가질 수 없을 테니까.”

“그러기엔 난 욕심이 많은걸요!

애초에 레녹스랑 리카르다를 앞에 두고 후계자 자리를 달라고 했고….”

가장 마음에 걸리는 일을 털어놓자 마음이 씁쓸했다.

그가 내 말을 잠시 곱씹더니 아!

하고 무언가 깨달은 얼굴을 했다.

“그게 신경 쓰였구나. 혹시 그것 때문에 계속 눈치를 보았던 거야?

혹시 우리가 네가 얄미워서 다정하게 대했다가 모른 척할까 봐?"

"......"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답 없이 입을 꾹 다물었다.

리카르다가 작게 한숨을 쉬더니 내게 양해를 구하고 나를 번쩍 안아들었다.

자신의 어깨에 내 고개를 기대게 한 뒤, 그는 내 등을 천천히 토닥여 주었다.

“아무것도 모르니 걱정할 수 있지. 그렇게 생각할 수 있어.”

“…미안해요. 후계자 자리를 갑자기 달라고 해서. 그저 말뿐인 거라고 해도 그 자리를 갑자기 빼앗아 버려서.”

어쩌면 이런 사과를 제일 먼저 해야 했던 게 아닐까.

"그래도 내겐 그게 필요했어요.”

마음속에 남은 양심이 사과하라며 재촉해 굳게 다짐했던 마음이 이리저리 흔들렸던 건지도 모른다.

이런 내 사과에 리카르다는 사과할 필요가 없다며 토닥이는 손을 멈추지 않았다.

“네게 아직 말해 주지 않았지만.

우선 나는 굉장히 뛰어난 마법사고, 형도 대단한 연금술사야.”

그 말은 어제 레녹스에게도 들었다.

“그래서 나도 형도, 모두 마탑과 연금탑의 탑주 자리를 노리고 있어,”

처음 듣는 말이었다.

나는 눈물이 가득 담긴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러면 상단주 자리는요? 어머니가 은퇴하고 나면?"

“자리가 미정이었는데 며칠 전 입후보한 아주 훌륭한 인재가 있었지. 이름이 뭐더라…. 다프네였던가?”

나는 그의 농담 섞인 목소리를 미처 따라가지 못해서 멍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괜찮아. 응, 괜찮고 말고.”

“정말 다 받아도 되는 건가요?

나 한 번 받으면 계속 받고 싶어할 텐데.”

“욕심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지.

더 원해도 돼. 난 우리 막내 계속 예뻐할 거니까. 싫다고 해도 이쪽에서 거절할 거라고?”

이곳에 있는 모두가 리카르다처럼 생각할지는 모르겠지만, 왠지 그럴 것 같아 안심이 되었다.

나를 달래고 위로하는 웃음기 섞인 목소리에 한껏 긴장해 부풀어 있던 몸이 천천히 가라앉았다.

긴장과 어색함으로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몸이 천천히 풀어지는 느낌에 노곤함을 느끼며 편히 그의 어깨에 이마를 기대었다.

리카르다가 내 등을 부드럽게 토닥여 주는 것이 마치 자장가라도 되는 듯 눈이 스르륵 감겼다.

곧 숨소리가 고르게 나오더니 잠에 빠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 * *

리카르다는 잠든 다프네를 조심스럽게 침대 위에 올려 주었다.

꼼꼼하게 이불을 턱 끝까지 올려 주었고, 마법을 사용하여 방 온도도 조금 올렸다.

"너무 아이답지 않다니까.”

척박하고 적대적인 환경은 아직 보호받아야 할 어린아이를 이렇게나 성숙하게 만들어 버렸다.

리카르다는 새근새근 소리를 내며 잠든 다프네의 머리를 가볍게 쓸어 주었다.

나름 치료를 한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다리의 상처는커녕 자잘한 상처도 쉽게 아물지를 않는다.

리카르다 자신의 치료 마법도, 형인 레녹스의 회복 물약도 그 어느 것 하나 정상으로 작동하지 않아 참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리카르다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서는 다프네의 옆에 앉았다.

"조금은 아이 같아도 좋을 텐데.”

아직 이 환경이 다프네에게 익숙해지지 않아서 그런 거겠지?

리카르다는 나오려는 한숨을 참은 채 방의 불을 점점 어둡게 낮추었다.

다프네를 보면 자신의 어린 시절이 떠올라 고작 며칠 전에 처음 본 아이지만 유독 아이의 언행이 자신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그리고 이것은 자신뿐만이 아니란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오늘도 일이 너무 바빠 늦게 온 어머니도, 레녹스도 어쩌면 같은 마음일 것이다.

똑똑-

조심스러운 노크 소리 뒤로 천천히 문이 열렸다.

침울한 표정의 레녹스가 들어오는 것을 보며 리카르다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피식 웃었다.

“오늘도 수고 많았어, 형."

"어머니는?”

“아쉽게도 오늘도 야근. 내일 아침에 일찍 들어오시겠대.”

“다프네가 많이 아쉬워했겠네."

입고 있던 외투를 한쪽에 벗어 던지고는 레녹스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러고는 조용히 잠든 다프네를 보다가 이내 인상을 찌푸렸다.

이곳에 온 지 일주일이 지나가고 있음에도, 아이는 아직 안정을 찾지 못했다.

그리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악몽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자기도 모르게 꿈속에서 괴로워하고는 했다.

다프네가 괴로워하며 팔을 휘젓가 팔는 모습에 레녹스는 미간을 찌푸리다가 천천히 아이의 이마를 쓸어 주었다.

“괜찮아, 괜찮아.”

괜찮을 거야. 죽지 않을 거야.

도와줄게. 구해 줄게.

마치 최면을 걸 낮게 읊조리는 목소리는 다프네가 울음을 멈추고 악몽에서 벗어날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으, 으으. 실, 싫어. 주, 죽고, 싶지 않아.”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이, 오늘도 어김없이 다프네의 눈에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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