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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딸로 태어났다-16화 (16/185)

제16화.

레녹스가 다프네를 처음 봤을 때, 아이는 굉장히 아파 보이는 아이였다.

상처가 가득한 몸은 걷는 것도 힘들어 보였고, 삐쩍 마른 몸에 인상이 찌푸려질 정도였다.

빈민가에서 굴러도 저 정도는 아니겠다 싶을 정도로 안타까운 모습에, 레녹스는 거래를 하러 왔다.

고 하는 아이가 참 안타깝다고 생각했었다.

어디선가 학대를 받은 것이 분명하여 눈길이 갔다.

그럼에도 기죽지 않고 당당하게 자신의 상황을 설명하는 모습이 마치 스스로 흔들리는 자신의 마음을 다잡아 가는 것 같이 보여 또 눈길이 갔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그 말과 함께 타이밍 좋게 흘러 나온 리카르다의 보고로 아이가 어머니의 마음에 드는 것은 금방이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어머니는 평소답지 않게 그 아이를 쉽게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했다.

꽃을 따 오라는 조건.

딱 보아도 성문 밖으로 나가 본적 없는 아이에게?

어머니의 조건에 레녹스는 순간 의문이 들었다.

차가운 바람을 맞았다가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아이에게 말도 안 되는 조건임이 틀림없었으니까.

'아니야. 얼마 전에 그 숲길을 정리했다고 들었어..'

완전히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새로 정리한 길을 장식하겠다며 수도의 기관에서 마법이 걸린 꽃을 사들였던 기억이 났으니까.

‘어머니는 저 아이가 마음에 든 것 같은데. 시험하고 싶으신 걸까?'

그렇다 해도 너무 가혹하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성문 밖, 깨끗하게 잘 정리된 길만 따라가다 보면 꽃은 금방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밖의 날씨는 추웠고, 아이의 상태는 말이 아니었기에 레녹스는 아이가 포기하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 아이는 망설이지 않고 그 조건을 받아들였다.

무서울 텐데도 어머니의 조건을 맞추겠다며 꽃을 따러 가는 모습에 꽤 용감한 아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기세와는 달리 성문으로 가는 길도 모르는 데다 추위에 덜 덜 떨고 있는 모습을 보니 차마 혼자 보낼 수가 없었다.

“도대체 무슨 일인데 형이 나서?" 라는 리카르다의 목소리가 귓가를 타고 흘러들어왔다.

레녹스는 그 말을 무시하고 아이의 몸을 조금이라도 따뜻하게 해줄 수 있는 것을 찾았다.

아이는 포기하지 않았고, 결국 길을 잃었음에도 그 어두컴컴한 숲을 혼자 헤매면서 마침내 붉은 꽃을 찾아왔다.

상처투성이가 된 채로 말이다.

금방이라도 호흡이 끊길 듯한 아이를 보니 자연스럽게 입에서 욕이 튀어나왔다.

레녹스는 자신도 모르게 아이를 품에 안고 숲을 뛰고 뛰어 숨겨진 사택으로 향했다.

레녹스가 집에 돌아온 것을 알게 된 클로에와 리카르다도 그곳으로 돌아왔고, 다 죽어 가는 다프네를 보며 충격을 숨기지 못했다.

"…어떻게 된 거지?"

"아무래도 꽃을 찾다가… 어디서 떨어진 것 같아요. 숲을 헤맸거든요.”

어째서인지 몰라도 말을 하는데 손이 자꾸 덜덜 떨려 왔다.

이 아이의 상처보다 더한 상처도 많이 본 그였음에도 불구하고, 레녹스는 떨리는 손을 멈출 수 없었다.

클로에가 당황한 눈빛을 숨기고 침착하게 다프네의 상태를 살펴보았다.

온몸에 가득한 상처와 보기만 해도 아픈 다리를 지나, 손에 쥐여진 붉은 꽃에 시선이 향하는 그 순간.

클로에는 그제야 자신이 내건 조건으로 한 아이가 얼마나 고통을 겪게 됐는지 마주 보게 되었다.

그 정도야 감당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과거의 자신을 이해 할 수 없었다.

'분명 합리적이라 생각했는데…

왜 이제 와서..'

이렇게 후회가 되는 걸까.

아이의 상태가 좋지 않아 보이는 것을 알면서도 왜 자신은 그런 선택지를 준 것일까?

마치 무엇인가에 씌었던 게 분명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자신이 이 한밤중에 저 여린 아이에게 그런 일을 시켰을 리가 없지 않나.

하지만 힘껏 부정해도 다친 아이가 멀쩡해지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 모습을 직면하고서 클로에는 눈을 질끈 감았다.

최악이다.

말로 표현하지 못할 만큼 끔찍한 자괴감이 그녀를 덮쳤다.

이제야 클로에는 다프네의 눈빛이 떠올랐다.

살고자 필사적이었던 그 눈빛.

그 모습에서 어렸을 적 저의 모습이 비치고 나서야 클로에는 이해할 수 없는 자신의 잔혹한 실수를 인정하였다.

그녀는 나오려는 한숨을 들이 삼키며 후회의 말을 내뱉었다.

“내가 이 아이에게 너무 가혹한 짓을 했구나…. 리카르다.”

"네, 어머니, 치료할까요?"

“네?

“부탁한다.”

결국, 삼키지 못한 후회의 한숨과 함께 떨어지는 허락의 말에, 리카르다는 재빨리 다프네를 빈방으로 데려가 치료를 시작했다.

몸에 있는 타박상부터, 부어오른다리까지 하루 가까이 마력을 쏟아붓고 나서야 조금 나아지는 기미가 보였다.

치료에 진전이 보여 부목을 댄다 든가, 붕대를 감는 등의 1차적인 치료를 마무리할 수 있게 되었다.

그제야 리카르다는 기진맥진한 채로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이상할 정도로 마력 소모가 심해요. 마치 이 아이의 몸이 마력을 거부하는 것 같기도 하네요."

리카르다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지만, 그럼에도 포기하고 싶지 않아 했다.

“좀 더 좋은 방법을 찾아 봐야겠어요. 효율적으로 치료하는 방법을 말이에요.”

힘겹게 숨을 내뱉는 아이를 보며 클로에는 자신을 감싸는 후회에 역겨움을 참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아이의 옆에서 떠날 수 없었다.

레녹스 역시 추위에 벌벌 떨면서도 아이답지 않게 씩씩하던 모습이 떠올라 아이의 옆에서 떠날 수 없었다.

기진맥진해진 리카르다까지 아이의 옆에서 쓰러져 잠들었다.

그날은 그 작은 방에서 처음으로 가족이 될 네 명이 함께 모인 날이었다.

* * *

다프네의 입에서 앓는 소리가 섞인 흐느낌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사, 살려지….”

“죽고 싶지 않이….”

“시, 싫어…!”

다프네가 악몽을 꾸기 시작했다.

살고 싶다고 계속 울음을 터트리는 것을 보며, 힘들다고 투덜거리던 리카르다가 옆에서 떠나지를 않았다.

가라앉은 눈으로 다프네의 옆에서 계속 회복 마법을 걸어 주는 그의 표정은 깊은 생각에 잠긴 듯했다.

레녹스는 괜찮다고, 죽지 않을 것이라고 주문을 외듯 열심히 속삭여 주었다.

리카르다는 악몽을 쫓아내는 마법을 개발할 걸 그랬다며 옆을 떠나지 않았다.

"엄마… 죽지 마.….."

다프네가 악몽 속에서 엄마를 찾자 클로에는 일을 다 미뤄 두고 직접 나서서 다프네를 품에 안아등을 토닥여 주었다.

다프네가 울음을 그치고, 꿈의 두려움을 쫓아내고, 그렇게 편히 잠들 때까지 토닥임과 부드러운 속삭임은 멈추지 않았다.

클로에의 목소리와 안정적인 토닥임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규칙적인 심장 소리에 안정이 된 것일까.

다행히 다프네는 악몽에서 벗어나 잠에 빠져들 수 있었다.

* * *

다프네가 깨어났다.

레녹스는 리카르다의 기쁜 목소리에 하던 일을 팽개치고 다프네가 머무는 방으로 뛰어갔다.

조용히 일하던 클로에도 소식을 듣자마자 뛰어왔는지 도착했을 때 아직도 손에 만년필이 쥐여져 있는 것이 보였다.

동그란 눈으로 자신의 변한 머리 색을 보며 어머니가 자신을 위해 머리색을 가져갔노라 말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저 어린아이는 어떻게 그런 일을 겪고도 이리도 다정한 말을 할 수 있을까.'

클로에는 그 모습에 더 안타까워했다.

레녹스는 그 모습에 다프네가 똑똑하고, 자기 앞길을 잘 찾아가는 아이라고 생각했다.

흐어어엉-

하지만 혼자 방에 남은 다프네의 울음소리를 엿들으며 레녹스는 자신이 잘못 생각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죽과 먹어야 할 약을 쟁반에 담은 채, 잠시 부엌에 다녀온 사이 다프네는 그동안의 서글픔을 털어 내기라도 하려는 듯 정말이지 서럽게 울고 있었다.

이제야 안심이 된 것인지 혼자가 되고 나서야 참고 있던 눈물이 터져 나온 것이었다.

레녹스는 뜨거운 죽을 내려다보며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울음소리가 끝날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그리고 그 옆에 리카르다. 또한 주저앉아 그 울음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었다.

클로에 또한 파이프에 담배를 붙이려다가 멈칫하며 조용히 파이프를 집어넣었다.

“이제야 안심이 된 건가 봐요."

레녹스의 말에 리카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아이잖아.”

“이제 일곱 살이라고 했었지.”

“일곱 살 짜리 애가 저렇게 숨어서 숨이 넘어가게 운다고요?"

리카르다의 물음에 클로에가 입가에 비소를 띠었다.

“아이를 보면 그 아이가 자란 환경에 대해서 알 수 있지. 다프네는….”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더 참혹한것.

환경 속에서 살아왔던 거겠지.

다프네가 언뜻 비친 말이 과장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보다 심하면 심했을 거라고 클로에가 말하자 리카르다의 표정에 불만이 가득했다.

“정말로 저 아이를 후계자로 받아들일 건가요?”

레녹스의 질문에 클로에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럼. 다프네는 목숨을 걸고서 조건을 지켜 왔으니까 나도 지켜야지.”

클로에가 손에 쥔 유리병을 내려다보며 씁쓸하게 웃었다.

제가 꺼낸 조건이 참으로 힘겨웠을 텐데도, 다프네는 그녀의 조건을 제대로 갖추어 왔다.

그리고 무엇보다.

저 가여운 아이가 살고자 이렇게 목숨을 걸고서 제게 줄 선물을 가져왔다.

아무리 세간에 냉정하다고 평가 되는 그녀라 할지라도 이미 마음 속에 새겨진 이 아이를 놓지 못할 것임을 본능적으로 느꼈다.

"그리고 나는 정말로 다프네가 마음에 들었단다. 그 눈빛 봤니?

마치 내 어릴 적을 보는 것 같더구나.”

클로에는 심각한 상황을 환기시키기 위해 일부러 웃었다.

“나처럼 일을 똑 부러지게 잘할 것 같아.”

“저랑 형은 어머니 어릴 적 모르잖아요.”

뿌듯한 듯한 목소리 뒤로 투덜거리는 목소리가 오갔다.

레녹스는 자연스럽게 투닥이기 시작하는 둘을 보며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아직 일주일도 채 지나지 않았지만 다프네는 이미 세 사람의 삶에 스며들고 있었다.

* * *

처음으로 둘이서 함께 보낸 시간.

레녹스의 다정함이 다프네에게 독이 되어 버렸다.

다정하게 대해 주지 말라는 다프네의 말을 듣고 나서, 레녹스는 그 자리에서 조용히 나간 것을 후회했다.

'마치 고슴도치 같았지. 휴, 그렇게 나오는 게 아니었는데.'

다프네가 불안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을 텐데 바보같이 아니라고 답하지를 못했다.

'바보구나, 나는.’

하긴, 만난 지 고작 며칠이나 되었다고.

지금까지 힘든 곳에서 살아왔는데 우리를 믿지 못할 만도 했었다.

'그러니까 더 빨리 답해 줬어야 했는데.'

레녹스는 쉽게 답하지 못한 저를 탓하며, 다음 날 아니라고 네게 다정하게 대할 수 있도록 허락을 구하려고 했다.

'그런데 이렇게 갑자기 바빠질 것은 또 뭐야.'

레녹스는 뭔가 일이 꼬여 가는 느낌에 올라오는 짜증을 가까스로 가라앉혔다.

하지만 겨우 일을 끝내고 돌아왔더니 다프네는 이미 잠들어 있고, 여전히 악몽에 시달려야 했다.

'미안, 다프네. 너는 이런 게 싫다고 했었지만, 실례 좀 할게.'

토닥임에도 안정되지 않는 다프네의 모습에 레녹스가 지친 몸을 이겨 내고 다프네를 안아 들었다.

그리고 규칙적으로 등을 토닥여 주며, 언젠가 들었던 자장가를 낮게 흥얼거렸다.

거친 숨소리가 진정될 때까지, 자장가는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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