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화.
“겨우 잠들었네.”
악몽에서 벗어난 다프네의 숨소리가 겨우 안정됐다.
새근새근하는 숨소리에 그제야 레녹스가 한숨 돌리며 자장가를 멈추었다.
그래도 토닥임은 멈추지 않아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던 리카르다가 웃었다.
"완전 오빠 다 됐다? 나도 좀 그렇게 해 주지 그랬어.”
"너는 열 살 때 이미 다 컸었거든."
징그럽게 시리.
그 말에 진심으로 상처를 받았다는 듯 리카르다가 우는 연기를 했다.
“나한테도 다정하게 대해 주면 안 돼?”
"나 충분히 다정하지 않았나.”
“오, 과거의 리카르다가 들으면 멍멍이 소리라고 뛰쳐나오겠는데?"
웃음기 섞인 목소리에 그제야 레녹스도 피식하고 웃을 수 있었다.
그럼에도 표정이 좋지 않아서, 레녹스를 빤히 바라보던 리카르다가 물었다.
“형, 무슨 일 있었어?"
"…무슨 일은.”
“표정만 봐도 있는데. 혹시 다프네에게 다정하게 대하지 말라고 한 소리 들어서?"
"......."
그걸 어떻게 아느냐는 표정에 리카르다가 그럼 그렇지, 라며 피식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나한테도 그랬어, 우리 다프네가.”
“…우리가 부담스러웠던 걸까?"
“믿지 못해서 그런 거겠지."
“이해해야지. 내가 다프네였어도 그랬을 거 같은데 뭐."
“다프네를 탓하는 게 아니야. 바로 아니라고 답 못한 나를 탓하는 거지.”
레녹스의 말에 리카르다가 설마 그랬냐며 경악 어린 표정을 지었다.
“아, 아니…..”
“형, 실망이야. 바로 아니라고 답해 주고, 불안해하지 말라고 토닥토닥해 줬어야지.”
"오늘 말하려고 했어. 내가 다정하게 대할 수 있게 해 달라고…."
"바보 아냐? 그런 걸 말로 표현해?”
리카르다가 이건 아니라며 표정을 구겼다.
그에 레녹스가 울컥한 듯 목소리를 높이려다가 다프네가 뒤척이는 소리에 금방 입을 다물었다.
"........."
그 모습에 리카르다가 웃었고, 레녹스가 노려보았지만, 리카르다는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왜? 욕심 많은 막내는 싫어?
난 욕심 많아도 막내 좋은데-"
“다프네가 그렇게 말했어?"
"응, 욕심 많은 자기라서 다정함을 잃고 싶지 않다던 걸.”
리카르다의 설명이 이어지자 레녹스는 왜인지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 같아 머리를 붙잡았다.
'다프네가 그렇게 생각할 줄 몰랐는데.’
욕심이 많으면 어떠한가.
다정함은 얼마든지 줄 수 있고, 앗아 가지 않을 자신도 있었다.
이미 우리의 가족이라는 선 안에 들어온 아이였다.
하지만 가족이 없었던 다프네에, 게는 이 모든 순간이 다 낯설고 두려웠던 것이다.
'혹시나 미움 받을까 봐, 그랬던 거겠지.’
레녹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다프네가 숨기고자 했던 마음이 보이는 것 같아서 맘이 편치 않았다.
“그럴 리가 없잖아. 다프네는 욕심 좀 많아도 돼. 아니, 욕심이 많았으면 좋겠어.”
“그럼 그렇게 말하면 되잖아. 바보같이 왜 그걸 말 못 하지?”
“형한테 건방지다?”
직접 들었던 말이 아니어서 바로 답한 게 아니라고 따지고 싶었지만, 그럼 그것도 못 들었냐며 또다시 놀릴 것이 뻔했다.
약 올리는 그 목소리를 가만히 듣던 레녹스가 입꼬리를 삐죽 올리며 그를 비웃었다.
"아니, 생각해 보니까 다프네가 우리를 부담스러워 한 이유는 네가 오빠라고 자꾸 강요해서 그런 걸지도 몰라.”
레녹스가 비웃음을 아끼지 않으며, 리카르다의 탓으로 돌리자 그가 억울하다는 듯 바닥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니, 왜! 오빠를 오빠라고 하지!"
“네가 오빠를 강조하며 말할 때마다 이마가 미미하게 찌푸려지던 것은 알고?”
"…진짜?"
“진짜.”
어째 리카르다의 반응이 진지했다.
정말 몰랐다는 듯한 그 표정에 레녹스가 피식 웃자, 리카르다는 억울하다는 듯 다시 자리에 주저앉아 투덜거렸다.
"그치마안, 그래야 조금 더 가족같은 느낌이잖아.”
“…가족?”
“그래, 가족. 다프네가 우리를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모를 테니까.
내가 오빠라고, 가족이 될 사람이라고 알려 주고 싶었는걸.”
“…그런 거였어?"
‘확실히 깨어나자마자 어머니께도 무어라 말해야 할지 망설이는 것 같았었지.’ 리카르다가 시무룩하게 말했다.
"내가 열 살 때 이곳에 오기 전까지 아버지 밑에서 자랐었잖아.
난 그때가 정말 끔찍하게 싫었거든.”
처음 듣는 말이었기에, 레녹스가 놀란 표정을 짓자 리카르다가 씁쓸하게 웃었다.
“아버지는 항상 날 쓸모없다고 무시했었으니까. 다프네만큼은 아니겠지만, 가벼운 손찌검 정도도 있었고."
"몰랐는데….”
“말 안 했으니까, 모를 수 있지.
형은 마음이 여리니까 걱정할까봐 안 한 거기도 해.”
레녹스는 제 동생임에도 불구하고 처음 듣는 과거에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여차여차해서 어머니께 왔을 때 위에 나보다 나이 많은 형이 있는 데, 형은 먼저 자기소개도 안 하고, 형이라고 부르라고 말도 안해 주고.”
리카르다의 입에서 한숨이 섞인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러니까 나를 오빠라고 불러도 된다고 알려 주고 싶어서 그랬던 건데.”
리카르다가 속상함을 감추며 빙긋 웃었다.
“우리는 가족이니까 그렇게 불러도 괜찮다고, 알려 주고 싶었단 말이야. 그래도, 다프네가 싫어한다니 자제 좀 해야겠네.”
“그렇게 생각하는지 몰랐는데….
나중에 다프네에게 물어봐. 혹시 너와 같은 생각을 하는 걸 수도 있잖아.”
"음, 그래야겠다!”
리카르다가 언제 시무룩했냐는 듯 밝게 웃었다.
어릴 적 아버지에게 학대를 받아 왔기에 다프네의 모습이 더욱 눈에 밟히던 그였다.
리카르다는 살고 싶어 발버둥 치는 다프네에게서 자신의 어린 시절을 겹쳐 보았다.
뒤늦게 들었지만, 운명을 바꾸고 싶어서 직접 찾아왔다고 말했다.
했었지.
'어릴 적 나같이.’
아버지 아래서 노예처럼 살고 싶지 않아, 맞아 죽을 것을 각오하고 어머니를 찾아왔었으니.
리카르다는 다프네를 그 누구보다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신이 이곳에 와서 행복해졌던 것처럼 이 아이도 행복하게 해 주고 싶었다.
레녹스는 그런 일을 겪어 본 적없었기에 다프네의 마음을 완전히 알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점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리카르다도, 레녹스 자신도, 그리고 막내를 위해 밤을 새워서라도 일을 마치고 온 어머니도 모두 다 프네에게 진심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도 그럴 것이 퇴근 후, 이미 이 방에 모이는 것이 당연시되고 있으니까.
이상하게 자꾸 눈에 밟힌다면, 이것은 운명이라 생각하고 우리가 챙겨 주면 된다.
그렇게 마음을 열고 가족이 되어간다면, 서로가 행복해질 수 있을 것이다.
레녹스는 언제 집으로 돌아왔는지도 모를, 방문 앞에 서 있는 어머니를 보고서 빙긋 웃었다.
레녹스는 자신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팔을 벌리는 어머니에게 다프네를 넘겨주었다.
조금 칭얼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금세 안정되는 것이 마치 어머니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아 조금 서운했다.
“급한 일은 다 처리하셨어요?"
"며칠 동안은 집에 있을 수 있을 정도로.”
눈 아래가 거뭇해졌지만 입가에는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몸은 피로해도 다프네를 보아 기쁜 듯해 레녹스도 리카르다도 클로에를 따라 웃었다.
"어머니답지 않네요."
얼핏 탓하는 것 같았지만, 웃음기 섞인 그 목소리에 클로에는 미소를 지은 채 다프네를 조심스럽게 침대에 내려 주었다.
그때 레녹스의 시선이 침대 근처에 있는 가방으로 향했고, 클로에에게 물었다.
“그러고 보니, 도장은 어떻게 하기로 했어요? 따로 챙기셨어요?"
가방을 살펴보다가 발견하게 된 특이한 도장.
그것을 가장 먼저 발견한 사람은 클로에였고, 그 도장을 한참이고 만지작거리다가 결국 어떻게 처리할지 미뤘었다.
그것을 떠올리며 묻는 말에 클로에는 별것 아니라는 듯 답해 주었다.
"다프네가 마지막 수단을 남겨놓고 싶어 했던 건데 모른 척해 줘야지. 모든 것을 거래의 물품으로 올리지 않는 것이 얼마나 기특하니.”
“진짜 어머니 같지 않아요. 너무 다정해! 우리 어머니 어디로 팔아버린 거예요!”
리카르다의 높아지는 목소리에 레녹스가 깜짝 놀라 조용히 하라며 리카르다의 입을 노려보았다.
형제가 투닥이는 그 모습을 보던 클로에는 피식 웃었다.
이불까지 목 아래로 꼼꼼하게 덮어 준 뒤, 여전히 미소를 띤 채 그녀가 말했다.
“너희도 너희답지 않은 건 알고?
내 아들들이 이렇게 다정한 놈들이었다니.”
“막내 한정할래요."
“저도요.”
“아이고, 불효막심한 놈들."
자연스럽게 투닥거리며 방이 훈훈하게 달아올랐다.
방은 참 따뜻했다.
* * *
레녹스에게 안겨 있을 때 잠에서 깬 다프네는 차마 깨어나지도 못한 채, 그들의 대화를 다 들어 버렸다.
'정말로 진심이었구나.'
어머니도, 레녹스도, 리카르다도 나를 진심으로 받아 주고 있었구나.
설마 도장도 모른 척해 주신 거였을 줄이야.
그것도 모르고, 나는 이들에게 쓸데없이 고슴도치처럼 가시를 세우고 있었던 거였어.
그 다정함과 배려가 모두 진심이었다는 것을 아니 무언가 마음에 가득 차는 느낌이 들었다.
갑자기 어머니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우리의 관계가 남들과 다르게 특별하지만 분명 그들보다 더 좋은 관계를 만들어 나갈 것이라고 했었지.’
그때부터 천천히 내게 마음을 열어 주고 있었던 걸까.
나도 그런 애정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었던 걸까.
뭔가 부끄러움이 몰려오는 기분에 잠투정하듯 몸을 뒤척였다.
뒤척이자 바로 자신을 토닥여 주는 손길이 느껴졌다. 안 보이는 곳에서 이렇게 애정을 받고 있었다는 것을 다시금 느꼈다.
'다정함을 모른 척, 알고 싶지 않으려 했는데.’
이미 다정함은 내 마음속에 녹아내리고 있었구나.
다정함이 이렇게도 따뜻하고, 행복한 거였어.
나도 조금은 행복해도 괜찮은 걸까?
악녀의 딸인데 행복해도 괜찮은 걸까?
어느 순간부터 계속 악녀의 딸이라 합리화했던 것들이 조금씩 부서지기 시작했다.
악녀의 딸이 아닌, 다프네로서 새로운 이야기를 써 내려갈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이 송송 밀려왔다.
'행복해지고 싶어. 만약 그래도 괜찮다면, 이들과 행복해지고 싶어.’
거래로 얽혀 있다고 해도 그 속은 자신보다 더 진심인 이들과 함께.
행복해지고 싶다.
행복해져도 좋다면….
그래도 좋다면, 이들이 내게 해주는 것처럼 내 가족이 될 이 사람들에게도 내가 전할 수 있는 다정함을 느끼게 해 주고 싶다.
처음으로 들어보는 부드러운 허밍과 규칙적으로 토닥이는 손길, 따뜻한 방 온도와 포근한 이불.
그리고 행복으로 차오르는 마음.
이 모든 것이 합쳐져 오늘은 좋은 꿈을 꿀 수 있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