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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딸로 태어났다-18화 (18/185)

제18화.

끔뻑끔뻑

'어제 들은 건 진짜일까?'

혹시 내가 그러길 바라던 걸 꿈으로 꿨다든가.

내가 모르는 셋의 속마음을 몰래 훔쳐본 이 기억이 과연 꿈일지 진짜일지 모르겠지만.

'꿈이 아니면 좋겠다.'

요 며칠 너무 행복해서 모든 게 다 꿈 같이 느껴지는 것이 참 문제다.

'그래도 꿈일지도 모르니까, 혹시 모르니까 물어볼까?'

왜 내게 이렇게 진심인지, 다정하게 대해 주는지?

'귀찮게 여길까.…?'

아침부터 큰 한숨을 내쉬며 괜히 이불을 구겨 쥐었다.

'계약이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편한데.’

계약을 넘어선 이 묘한 감정이 내 마음을 이리저리 흔들리게 한다.

그렇게 복잡한 생각을 하면서 침대 위에 가만히 앉아 들어올 사람들을 기다렸다.

똑똑-

"아가, 일어났니?"

“네!”

아. 어머니가 먼저 찾아온 적은 처음이라 조금 놀라 버렸다.

놀라서 음이 엇나간 난 내 목소리에도 어머니는 웃더니 레녹스와 리카르다가 해 줬던 것처럼 젖은 수건으로 내 얼굴을 닦아 주었다.

“좋은 꿈은 꿨고?”

“…잘 모르겠어요. 꿈은 안 꾼것 같은데.”

잠시 잊고 있었던 지난밤이 떠올라 버렸다.

'다정함, 친절, 그리고 진심으로 가족으로 여겨 주는 것 같은 그 말.'

정말로 내가 믿어도 되는 걸까?

아무 조건 없는 이 다정함을?

아니, 나는 이 다정함을 포기할 수 있을까?

조용히 생각만 했을 뿐인데, 왠지 모르겠지만 눈앞이 흐려졌다.

나도 모르게 눈에 그렁그렁 눈물이 차올랐다.

당황하며 닦아 내려고 하자 어머니는 내 손을 막더니 대신 부드럽게 닦아 주었다.

“쉬이. 괜찮아, 괜찮아.”

"흐윽, 흑.”

어머니는 어젯밤처럼 나를 자신의 품에 안아 등을 토닥여 달래주기 시작했다.

결국, 나는 참으려던 눈물을 뚝뚝 떨구었다.

앞에 있는 어머니의 어깨가 젖는 것이 보였지만, 그치려고 해도 그쳐지지 않았다.

“흐으, 어머니도, 레녹스도, 리카르다도 왜 내게 이렇게 잘해 줘요?"

아, 묻지 않으려 했었는데….

눈물이 앞을 가리니 뵈는 게 없나 봐.

막상 말을 던져 놓고서는 어머니의 반응을 보기가 무서웠다.

진짜로 왜 그런 걸 물어보냐며 싫어하면 어떻게 해.

한심하게 쳐다보면 어떻게 해.

저 애정 섞인 눈이 경멸로 바뀌면 어떻게 해.

그렇게 되면 난 정말 버틸 수 없을 텐데.

나는 어머니의 어깨에 고개를 묻고서 꼭꼭거리며 울음을 참으려고 했다.

그냥 실언이었다고, 이런 것 하나도 안 궁금하다고.

난 지금 상황이 만족스럽다고.

그렇게 말하려고 했는데.

어머니는 괜찮다며 내 등을 쓰다듬어 주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아가, 내가 준비한 선물이 있는데 보러 가 볼까?”

“흑, 흐윽. 네?"

선물이라니요?

머리가 눈물로 가득 찼는지 말을가 말을 들어도 생각이 돌아가지 않아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는 내 등을 계속 토닥이면서 빠르지 않은 걸음으로 2층에 올라가 집무실을 지나쳤고, 그 옆의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아가, 고개 좀 들어 볼래?”

“싫어요. 우는 모습 보이기 싫어."

내 칭얼거림에 어머니가 작게 웃으시더니 나를 다시 한번 챙겨 안고서 그 방을 천천히 돌기 시작했다.

“자, 여기는 새로운 침대란다. 네 것이지.”

“…흡, 네?"

그 말에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려 보자 연보랏빛의 푹신한 침구가 놓여 있는 커다란 침대가 보였다.

“어, 어.."

당황함에 말을 버벅거리는데 어머니는 멈추지 않고 그 옆으로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자, 여기는 네 옷장이고, 앞으로 네가 입을 옷이 가득 있으니 입고 싶은 옷을 입으면 된단다.”

'이게 뭐지…?'

“자, 이번에는 뭘 보여 줄까. 아직 네가 쓰기는 무리겠지만 화장대도 준비해 봤고, 혹시 네가 갖고 싶어 할까 봐 인형도 준비해 놨고."

어머니의 말에 그제야 나는 천천히 고개를 움직여 방을 살펴보았다.

커다란 창문 앞 커튼 사이로 겨울답지 않은 따스한 햇볕이 들어오고 있었다.

햇빛이 환히 비추는 방, 보기만 해도 포근해 보이는 침대와 그 위에 올라와 있는 많은 인형.

커다란 옷장과 내 체격에 맞는 작은 책상, 그리고 작은 티 테이블과 의자, 또 소파 등.

조금 전까지 잠을 자던 곳과 다르게 내게 맞춰져 꾸며졌다는 것이 너무나도 선명하게 보였다.

'맞아, 내 방을 준비해 준다고 했었는데.’

눈물이 쏙 들어가고 나니 레녹스가 비밀이라면서 해 주었던 말이 이제야 떠올랐다.

“놀랐니? 몰래 준비해 봤는데.

이렇게 직접 방을 꾸며 보는 것은 오래간만이라 나도 즐거웠단다.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네.”

“…너무 좋아요.”

말문이 턱 막혔지만, 꼭 하고 싶은 말이었기에 감사의 인사를 입 밖으로 내뱉었다.

“정말, 정말 너무 좋은데….”

기쁜 마음을 주체할 수가 없어서 너무 행복해져서, 내 눈에는 또다시 눈물이 차올라 버렸다.

“좋은데 왜 이리 울까? 계속 울면 눈이 아플 텐데.”

내 눈가에 닿는 어머니의 손길은 생각보다 차가웠다.

하지만 뜨거운 눈가를 식혀 주기라도 하려는 듯 부드럽게 쓸어 올리는 것이 오히려 마음에 와닿아더 따뜻하게 느껴졌다.

“왜, 왜 제게 이렇게 잘해 주세요?”

“왜 잘해 주냐고?”

“너무 다정해서, 이게 거짓말 같아요. 저는 그저 살아갈 정도로만… 주시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많이 받으면 저는 계속 욕심을 부릴지도 몰라요.”

“그럼 안 되니?”

나긋나긋한 목소리에 고개를 끄덕였다.

내 끄덕임에 어머니는 물었다.

“왜 안 되는데?”

“욕심이 많아서, 다시 제가 싫어지면 어떻게 해요? 아니, 지금도 좋아하신다는 것은 아니지만….”

하면 할수록 말이 엉키기 시작했다.

이럴 것이라면 차라리 말을 시작하지 말걸.

“잘해 주는 게 부담스러웠니? 싫었다면 어떻게 하지.”

어머니의 표정이 조금 심각해졌다.

바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뇨, 좋았어요. 하지만 이런 거 처음 받아 봐서. 솔직히… 제가 싫다고, 필요 없다고 버리… 실까봐 무서워요.”

그냥 마음이 변했다고, 버려지고 나면.

이렇게 받은 애정이 사라지고 나면 나는 버틸 자신이 없는걸요.

차마 꺼내지 못한 마음을 간신히 내뱉고서는 어머니의 어깨에 고개를 묻었다.

“내가 이렇게 대해 주는 이유가 필요한 거구나.”

"......."

“합당한 이유라. 좋아, 설득시키는 것은 자신 있지. 다프네, 너는 나중에 네 아이가 너와 같은 삶을 살았으면 좋겠니?"

갑작스러운 질문에도 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절대로 아니에요.”

“그렇지? 나도 그렇단다.”

“…어머니도요?"

“난 정말 이를 악물고서 이 자리까지 올라왔단다. 살기 위해서. 부족하지 않을 만큼 충분히 힘든 길을 걸어왔지. 그런데 내 딸이 될 아이가 나와 같은 삶을 산다?"

어머니의 표정에 진지함이 어렸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나는 내 자식이 될 아이들에게 부족함을 주고 싶지 않단다. 그것이 애정이든, 돈이든, 물건이든 어떤 것이든 말이야.”

"......."

"너는 내 딸이고, 내 자식이지.

이 관계는 네가 시작했지만, 이어가는 것은 어른인 내 책임이란다.

그러니까 너는 받기만 하면 된다."

“저는 그럼 뭘 해야 하는데요?"

내 궁금증에 어머니는 빙긋 웃었다.

“그냥 자라 주면 돼. 건강하게, 하고 싶은 것하고, 즐기고 싶은 것 즐기고, 행복해하면서 살아가는 것에 후회하지 않게."

감히 꿈꿔 보지도 못한 따뜻한 말이었다.

“그리고 네가 바라는 것을 이룰수 있게. 그렇게만 자라 주면 된 단다.”

그것은 어렸을 적 어머니의 소망 이기도 하였고, 그녀의 자식이 된 내게 바라는 소원이기도 했다.

그 진심 어린 말에 무언가 마음 속에 꽉 닫혀 있던 문이 열리는 느낌이 들었다.

'믿어도 되지 않을까? 내게 무작정 주는 이 애정을? 모든 것을?'

처음으로 내게 다정하게 해 준 이들인데, 그들이 진심이라고 하면 믿어도 되는 것 아닐까?

그들에게 목표가 있고, 내게도 목표가 있다.

목표로 향하는 여정을 함께하며, 나를 가족으로도 여겨 준다고 한다.

'더 이상 거부해야 할 필요가 없잖아.'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이미 이 다정함을 알아 버렸는걸.

이 다정함을 이제 포기할 자신이 없어.

나는 고개를 들고 어머니의 눈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마주 보았다.

“저 첫 번째 소원이 있어요."

“그래? 뭔지 궁금하구나.”

어머니의 붉은색 눈동자와 내 금색 눈동자가 마주친 순간.

나는 그 따뜻한 진심에 활짝 웃었다.

“엄마라고 불러도 돼요?"

“…그게 첫 번째 소원이니?"

“네.”

“소원으로 빌지 않아도 충분히 부를 수 있는 호칭일 텐데.”

어머니는 내 소원이 탐탁지 않은 것 같았다.

그렇지만 나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엄마라고 부르는 게 제 첫 번째 소원이에요. 관계의 시작은 제가 하게 해 주신댔잖아요.”

“…그래, 네가 그러고 싶다면야.

좋아, 첫 번째 소원을 들어주마."

“그리고 두 번째도 있어요."

바로 소원을 얘기할 줄 몰랐나보다.

엄마는 조금 놀란 듯했지만, 천천히 내 입이 열리기를 기다려 주었다.

“글을 배우고 싶어요."

“글이라면 당연히 배워야지. 그것도 당연히 해 주려고 했는데.”

“엄마한테요.”

내 말에 엄마는 눈을 깜빡 깜빡이다가 즐겁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엄마한테 배우고 싶었니?”

“네.”

조금 부끄러운 기분이 들었기에 나는 이제 마주치고 있던 눈을 피해 다시 엄마를 꼭 끌어안았다.

엄마의 심장 소리가 조금 전보다 더 거세졌다.

그리고 내 심장도 조금 전보다 거세게 뛰었다.

내가 행복한 만큼 엄마도 행복하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나는 새롭게 엄마가 되어 줄 클로에를 꼭 끌어안았다.

“소원 들어주실 거죠?"

“물론이지. 하지만 두 번째 소원은 없던 걸로 하자꾸나."

"네? 왜요?”

“소원이 아니어도 내가 해 주고 싶어졌단다.”

후후, 하고 나오는 웃음소리에 기쁨이 스며 있었다.

어느 순간 우리의 뒤에 레녹스와 리카르다가 들어온 것도 보였다.

우리를 빤히 바라보던 리카르다가 활짝 웃더니 뛰어와 엄마와 나를 꼭 끌어안았다.

“우리 다프네, 너무 귀여워!"

그렇게 실실 웃고 있으니 옆에 있던 레녹스도 다가와 우리 셋을 꼭 끌어안았다.

“다프네, 나는 네가 욕심이 많아도 괜찮아. 동생이 원하는 것 정도 들어줄 수 있는… 오빠니까.”

레녹스가 쑥스럽다는 듯 헛기침을 한 번 하고는 말을 이어갔다.

“가족을 위해서 그 정도는 해 줄 수 있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지난번에 바로 답해 주지 못해서, 미안하다며 레녹스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침울해 보이는 레녹스의 입가를 살짝 위로 끌어올렸다.

“레녹스는 웃는 게 잘 어울려요.”

내 손짓에 레녹스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활짝 웃었다.

“그리고 오빠라는 호칭은 너무 어색해서. 한 번도 불러 본 적이 없으니까… 마음의 준비가 되면 부를래요.”

“우리 막내 이렇게 귀여워서 어떻게 하지.”

내 말에 레녹스도 리카르다처럼 실실 웃으며 우리를 꼭 끌어안았다.

“저 행복해지기 위해서 노력할게요.”

내 말에 모두가 그거면 된다는 듯 웃음을 숨기지 않았다.

혹독하리만큼 추운 겨울이 다가오고 있었지만, 내게 이 겨울은 유독 따뜻한 겨울이 될 것 같은 확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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