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화.
내가 엄마 품에 안겨 엉엉 울던 그날 이후, 우리 가족들은 숲속의 집에서 필요 이상으로 밖에 나가지 않았다.
내가 외로움을 탈 수 있다는 리카르다의 의견 때문이었다.
그 의견에 엄마는 야근할 만큼 일이 남으면 집으로 돌아와 마무리하기로 선언을 해 버렸다.
물론 레녹스랑 리카르다도 마찬가지였다.
내 하루는 깨어난 뒤로 크게 변화가 없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가족들과 다정하게 인사를 한다.
리카르다의 치료를 받고, 아침을 먹고, 약도 먹고, 가족들을 배웅하고서 엄마가 숙제를 내준 글공부도 열심히 공부한다.
가족들은 날 혼자 두려 하지 않았다.
엄마와 레녹스, 리카르다가 모두 번갈아 가며 한 사람씩 그날의 내 보호자가 되었다.
'가끔 보면 이것 가지고 투닥이는 것 같기도 했지.'
오늘은 자기 차례인데 일을 나가야 한다고 투덜거리는 리카르다의 얼굴이 떠오르니 입가에 웃음이냈다.
바들바들 떨리는 입꼬리가 어색 하지만, 그래도 예전과 비교하면 미소가 조금 자연스러워진 것 같지?
집무실에 있는 거울을 바라보며 혼자 생각하고는 고개를 끄덕이다.
가 다시 숙제에 집중했다.
벌써 시간이 오후 열 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원래라면 잠을 자고 있을 시간이지만..'
나는 글자를 끄적이며 오늘 낮의 일을 떠올렸다.
리카르다가 타 놓은 코코아와 레녹스가 내린 커피가 나란히 있는 바람에 헷갈려서 커피를 쭉 들이켜 버렸지.
그리고 두 사람 다 엄마에게 엄청 꾸지람을 들었다.
레녹스는 코코아 옆에 커피 잔을 둔 탓, 리카르다는 코코아와 커피를 구별 못 하고 커피를 건네준 탓.
두 사람 다 억울해하는 표정이었지만, 이내 내가 심장이 두근두근빠르게 뛴다고 말하니 바로 화들짝 놀랐었다.
'해독제를 먹이겠다니, 말겠다니 해서 또 난리가 날 뻔했는데.'
요즈음을 떠올리니 모두 즐거운일 뿐이라 입가가 계속 바들바들 떨렸다.
당연히 카페인에 내성이 없는 내 몸은 계속해서 심장이 두근두근했다.
결국 밤잠이 오지 않아 조금 전까지 어머니 집무실에서 함께 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잠시 수도의 상단으로 가 봐야 한다며 시계를 타고서 급하게 수도로 넘어가신지 꽤 시간이 지났다.
즐거운 생각을 하는 것도 좋지만, 자꾸 시계를 봤다가 숙제를 봤다가 하니 조금 목이 뻐근해졌다.
'아, 이거 헷갈린다. 엄마가 오면 물어봐야지..'
나는 헷갈리는 글자들에 별을 그려 놓고, 다음 단어를 끄적였다.
그렇게 한참을 공부에 매진하는데 갑자기 시계 쪽에서 빛이 나기 시작했다.
누군가가 도착하면 시계에 부여된 마력이 빛나기 때문에 나는 당연히 엄마가 돌아왔다고 생각하고 고개를 들었다.
"다녀오셨이 ….”
하지만 내 말은 끝까지 이어질 수 없었다.
시계에서 튀어나온 것은 엄마가 아니었다.
온통 검은색 옷을 입은 가느다란 체구의 인물이 자그마한 인영과 함께 나타났다.
순간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멍하니 있던 나는 내가 지내는 곳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를 잊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본능이 말했다.
지금이 바로 소설 2부의 남자 주인공이 등장하는 순간이라고.
'그런데 어째서 두 명인 거지?'
생각해 보니 남자 주인공의 어린 시절 외모 묘사가 거의 없었기에 누가 남자 주인공인지 구별할 수 없었다.
'둘 중 누구지?'
심지어 방의 불을 꺼 두고 책상 주변의 램프만 켜 놓은 상황이라서 그들이 얼굴도 자세히 보이지 않았다.
'남주의 어린 시절 외양은 굉장히 특이하다고 했었지. 인간답지 않았다고 그랬던 것 같은데.'
아무리 머리를 열심히 굴려보아도 자세한 외양에 대해서는 기억나지 않았다.
'워낙 베일에 싸인 인물이라서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자세한 묘사가 없어 답답했던 기억이 나.'
잠깐만, 그런데 이거 위험한 상황이 아닌가?
두 사람 중 그나마 키가 큰 자가 나를 보고 멈칫하는 것이 보였다.
망설임 없이 달리려고 자세를 잡더니 나를 보자마자 멈춰 버린다?
'분명히 남자 주인공은… 엄마를 죽이려고 했다가 잡혔는데….'
나 또한 그들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상황 파악을 하며 표정을 굳혔다.
그사이에 그들은 생각 정리를 끝낸 것인지 다시 이쪽으로 몸을 날렸다.
'이자가 남자 주인공이라고?'
공격하려고 몸을 던지는 것을 보면 스토리상 맞는 것 같기는 했다.
그 공격을 피해야 하는 것이 우선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다리를 다친 나는 혼자서 움직일 수도 없었다.
그들이 죽이고자 제대로 마음먹고 공격을 하면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왜 하필 오늘인 거지?'
평상시라면 자고 있을 시간, 하지만 오늘은 평상시랑 조금 다르게 내가 깨어 있는 날.
평소라면 하지 않을 레녹스와 리카르다의 실수도 있었고, 엄마도 평소와 다르게 급하게 뛰쳐나갔다.
마치, 마치 나를 이 이야기의 흐름에 억지로 끼워 넣으려는 것 같은….
'…뭔가 이상하지 않나?'
하지만 내가 생각을 더 잇기도 전에 둘 중 하나가 내게 닿았다.
나를 잡아챈 이는 내가 발버둥칠 시간도 주지 않은 채 나를 뒤로 넘어트려 버렸다.
나는 억지로 바닥으로 끌어 내려져 쿵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아!”
엉덩이를 세게 부딪쳐 앓는 소리를 내뱉자 남자로 보이는 그 사람은 내 목을 잡고 나를 들어 올렸다.
멱살이 잡힌 채 들어 올려지니 옷 때문에 목이 조여 숨이 턱턱막히기 시작했다.
"너는 누구냐? 상단주는 어디 있지?”
"으윽!”
당연히 대답해 줄 생각은 없었지만, 이 사내는 자신이 내 목을 잡은 상태라는 것도 잊은 모양이다.
나는 좁아지는 숨구멍을 억지로 비집어내듯 거칠게 숨을 내뱉었다.
내가 대답을 하지 않을수록 사내는 초조하게 뒤를 돌아보았다.
그 자리에는 남자의 옆에 있던 더 작은 사람이 조용히 우리를 바라보며 서 있었다.
얼핏 들어온 시야에는 키가 큰 소년 같아 보였다.
하지만 어두운 곳이라 잘 보이지 않았고, 무엇보다 점점 앞이 흐려져 갔기에 그 사람을 쳐다볼 여유가 없었다.
“크흑.”
“젠장! 일단 너부터 죽이고 나서!”
나를 들어 올린 사내는 뭐가 그리 두려운지 허겁지겁 서두르기 시작했고, 다른 팔로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가 꺼내든 것이 집무실 천장의 램프의 빛에 반사되어 반짝거렸다.
시야가 흐려지는 와중에도 그게 무엇인지는 알 수 있었다.
분명히 칼 같은 날카로운 무기리라.
“…."
놓으라고, 당장 놔달라고 소리를 지르고 싶었는데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숨이 턱턱 막혀 오고, 점점 시야가 흐려지는 것이 당장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 같았다.
또다시 죽음이 내게 찾아오는 기분에 생각하는 것조차 멈춰 가기 시작했다.
의식이 사라지며 앞이 새하얘져갈 때, 저 멀리 보이는 작은 사람이 서서히 멀어지는 것이 보였다.
그와 함께 나를 잡은 자는 안도를 하듯 나를 붙들고 있는 손의 힘을 풀었다.
희미하게 터진 숨구멍에 나는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최대한 몸을 흔들며 발버둥 쳤다.
“뭐야, 이, 이 계집애가!"
내가 반항할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지 사내가 당황하며 나와 함께 무기를 떨어트렸다.
목을 급격하게 타고 들어오는 공기에 거친 숨이 튀어나왔다.
사내가 황급히 나를 다시 잡으려고 손을 뻗을 때 나는 필사적으로 외쳤다.
"엄마! 레녹스! 리카르다!!!!"
살면서 이렇게까지 목소리를 높여 본 적도 없을 만큼 필사적으로 소리를 쳤다.
“살려 주세요!!!”
거친 기침을 내뱉으며 계속해서 엄마와 오빠들을 부르니 당황한 사내가 다시 나를 들어 올렸다.
급한 대로 목을 졸라서라도 죽이겠다는 듯 목을 두 손으로 꽉 조이려고 할 때, 갑자기 집무실의 문이 거칠게 열렸다.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리카르다였고, 그 뒤를 레녹스가 따라 들어오고 있었다.
목이 졸려진 탓인지 계속해서 거친 기침이 튀어나왔다.
콜록 콜록거리는 소리에 두 사람이 움찔하는 것이 보였다.
사내는 둘을 보고 당황하며 팔로 내 목을 감싼 채 떨어트린 무기를 다시 쥐어 뒤로 물러섰다.
“가, 가까이 오지 마!"
"너 뭐 하는 새끼야."
평소와 다르게 리카르다와 레녹스의 눈빛이 살벌했다.
저런 표정을 지을 수 있는 사람인가 싶을 정도로 살벌한 눈빛에 사내는 움츠러든 듯싶었다.
하지만 이내 나를 더 끌어당기며 그들에게 경고했다.
“가까이 오지 말라고 했어.”
‘고작 이런 놈이 남자 주인공인가? 이런 놈이…?' 의심스러운 생각이 들 때쯤, 리카르다의 손에서 마법진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화려하게 펼쳐진 마법진은 나를 붙잡고 있는 사내에게 향했고, 그의 손발이 갑자기 허공에서 튀어 나온 사슬에 얽매였다.
"뭐, 뭐야!”
남자의 팔에서 풀려난 내가 땅으로 떨어지는 순간 튀어나온 레녹스가 무사히 나를 받아 냈다.
"휴.”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것과 동시에 어색하리만치 뻣뻣하게 서 있기만 하던 작은 사람이 갑자기 날 쌔게 몸을 움직였다.
나를 얽매고 있던 이와 다르게 망설임 없이, 작은 몸을 가볍게 허공에 띄운 그가 리카르다에게 달려들었다.
그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하고 있던 리카르다가 깜짝 놀란 듯 반사적으로 마법진을 펼쳤다.
결국, 작은 사람도 똑같이 손발이 허공에서 튀어나온 사슬에 묶였다.
“헉, 뭐야. 있는지도 몰랐네.”
“괜찮니, 다프네?”
리카르다가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는 사이, 레녹스가 걱정하는 표정으로 내 상태를 살펴보았다.
레녹스의 시선이 내 목에 닿는 순간 그의 표정이 조금 전처럼 살벌하게 굳어졌다.
리카르다는 속박당한 둘을 보며 한숨 돌린 채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위험해요!"
그리고 그 순간 작은 사람은 자신을 얽맨 사슬을 부숴 버렸다.
너무나도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는 부서진 사슬을 밟고서 우리에게로 달려들기 시작했다.
내 외침이 한발 늦었다고 생각했을 때, 그는 우리를 지나치더니 가볍게 뛰어올라 포박된 자신의 동료의 목을 한 번에 베어 버렸다.
조금 전까지 나를 협박하던 이가 너무나도 손쉽게 죽음을 맞이해 버렸다.
피가 바닥에 흩날리고, 너무나도 쉽게 사내의 목숨이 사라졌다.
마치 슬로우 모션처럼 천천히 지나가는 그 장면에 무어라 비명을 지르지도 못하는 그 순간.
동료를 죽인 그는 망설임 없이 몸을 돌렸고, 흩날리는 피를 닦을 새도 없이 우리에게로 달려들었다.
그리고 그때, 갑자기 허공에서, 나타난 하얀 연기가 그자의 목과 팔다리를 얽매어 천장에 처박아넣었다.
“감히 이곳이 어딘 줄 알고, 너희 따위 암살자들이 멋대로 들어오는 거냐.”
“어머니!”
엄마의 호통 소리에 레녹스와 리카르다가 멍한 정신을 다잡았다.
엄마도 도착했고, 다들 멍한 정신을 붙잡아서 안심되어야 하는데 이상하게도 몸이 덜덜 떨렸다.
시체를 보는 것은 두 번째라지만 사람이 죽는 순간이 저리 잔인할 줄은 알지 못해서 그런지 몸이 굳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
그것을 눈치챈 레녹스가 나를 챙겨서 고개를 돌려 주었다.
그제야 내 시야에서 시체가 사라지고, 모두가 무사한 모습이 보였다.
덜덜 떨리는 몸이 조금 진정이 되었다.
모두가 무사하고, 나마저 무사하다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려 천장에 묶여 있는 자를 쳐다보았다.
연기에 의해 벗겨진 두건 속에는 앳된 아이의 얼굴이 드러났다.
아이는 눈을 감고 있었는데 창백해 보일 정도로 하얀 얼굴과 대비되는 검은색 머리카락이 눈에 띄었다.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끝이 살짝 올라간 둥그런 눈매가 보였다. 내 시선 때문인지 아이가 천천히 눈을 떴다.
표정 하나 없이 딱딱한 그 얼굴이, 그리고 눈이 참으로 시선을 끌었다.
제비꽃과 같은 아름다운 보라색 눈동자와 마주쳤다.
흰자가 있어야 할 자리가 온통 새카만 가운데 마치 파충류 같은 동공이 기이하게 빛나고 있었다.
소년의 모습을 하고 있었으나 마치 무언가가 그에게 덧입혀진 듯, 참으로 인간 같지 않은 분위기가 감돌았다.
그 눈을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저 녀석이 바로 2부의 남자 주인공이란 것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