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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딸로 태어났다-20화 (20/185)

제20화.

“이 녀석이 누군지 모르겠지만, 당장 죽여야겠어요.”

나를 껴안고 있는 레녹스의 목소리가 참으로 낯설었다.

그는 이를 갈면서도 힘껏 분노를 누르고 있었다.

"다프네의 목에 졸린 흔적이 있어요. 죽일 생각이었던 겁니다. 그런 놈들을 살려 둘 수 없어요."

분노로 이글거리는 눈빛은 내게로 향하지는 않았지만, 나를 안고 있는 팔이 분노를 전해 주듯 바들바들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저도 동감이에요. 배후가 누구인지 상관없어요. 어차피 우리를 노리는 놈은 다 거기서 거기예요.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 당장 죽여요."

레녹스의 말 중 틀린 것 하나 없다고 리카르다가 연기에 묶여 있는 소년을 노려보며 말했다.

살짝 보인 그 눈빛에도 살기가 담겨 있었다.

'이렇게… 한 번에 죽인다고?'

이야기가 이렇게 흘러갈 리가 없을 텐데.

남자 주인공이 죽으면, 여기서 이렇게 쉽게 죽고 나면 이야기는… 망쳐지는 걸까?

나는 말려야 할까?

머릿속이 복잡하던 와중 엄마가 안개로 꽁꽁 묶인 소년을 아래로 끌어내렸다.

'그래, 엄마라면 죽이지 않으실거야. 원래대로라면 후계자가 되어야 하는 아이니까 마음이 갈 수도….'

이야기의 시작이 이렇게 망쳐질리가 없다.

나를 억지로 끌어들인 이 이야기가 허무맹랑하게 망쳐질 리가 없어.

"다프네가 겪었던 두려움에 비해 너무 쉽게 죽이면 안 될 텐데.”

하지만 내 예상을 깨려는 듯, 어머니의 입에서 낯선 말이 튀어나왔다.

낯선 표정, 낯선 말투, 낯선 그녀는 내가 잠시 잊고 있었던 베네 디토 상단의 상단주로서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었다.

마치 이대로 내가 아는 이야기가 끝날 것 같은 안도감이 들던 중, 나도 모르게 무심코 뒤를 돌아보았다.

“으윽.”

피투성이의 끔찍한 시신이 보였다.

그 모습에 친엄마가 죽었던 그 순간이 떠올랐다.

차가운 팔이 힘없이 떨어지는 그 순간이, 너무도 쉽게 세상에서 사라져 버리는 그 순간이 너무 선명했다.

'무서워. 누군가가 죽는 게 무서워.’

그 모습이 마치 내 모습이 될 것 같아서 무서워.

내가 한순간에 사라질 것 같아 무서워.

시체를 보고 싶지 않아….

나는 레녹스의 옷을 꽉 잡은 채 그의 품에 얼굴을 기대었다.

“안 돼요….”

“다프네?”

“사람을 죽이면 안 돼요. 생명은… 소중하잖아요. 그리고 아직 아이… 같은데.”

이렇게 한순간에 사라지라고 피어난 생명이 아니잖아요.

나도 저렇게 져 버리고 싶지 않단 말이에요.

나는 그저 레녹스의 옷을 쥔 채 흐를 것 같은 눈물을 참았다.

어쩌면 이 복수가 누군가의 죽음으로 막을 내릴 수도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게 내 죽음이든, 다른 이의 죽음이든.

하지만, 막상 타인의 죽음을 코앞에서 목격하고 나니 그게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인지 후회가 되었다.

누군가를 죽이려는 마음을 가지려면, 그만한 각오가 있어야 한다.

그게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는 아직 그 각오가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이렇게 쉽게 사라지라고 태어난게 아니잖아요. 죽이지 마요. 무서워요.”

꼭꼭, 울음을 참으며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렸다.

바보같이.

이야기를 끝낼 좋은 기회인데도 죽음이란 것이 무서워 뒷걸음치듯 도망쳤다.

바보 같고, 답답하다고 내게 손가락질해도 어쩔 수 없지 않은가.

“그래. 네 앞에서 무서운 소리를 해 버렸구나.”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고 탓을 해도 좋다고 생각했는데.

엄마는 자기 생각이 짧았다며 울고 있는 나를 안아 들었다.

그러고는 익숙하게 내 등을 토닥여 주며 말했다.

“뚝. 이렇게 울면 내일 눈이 퉁퉁 부어서 아플 거야."

“안 울어요. 나 그렇게 울보 아닌데.”

왜인지 모르는 서러움에 훌쩍거리니 옆에서 어쩔 수 없다는 듯 피식피식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게. 오빠들이 너무 무서웠겠네. 미안해, 다프네.”

"무서웠어? 우리 다프네가 마음이 넓은지 알았지만, 이 정도일줄이야! 본받아야겠어.”

다들 나를 바보 같다고 몰아가지 않고, 괜찮다며 보둥보둥 보듬어주었다.

그 따스함에 나는 괜히 훌쩍이다.

가 엄마의 뒤에 있는 남자 주인공, 아직 소년으로 보이는 그 아이와 다시 눈이 마주쳤다.

기이한 눈에 오한이 들었고, 그러면서도 그 안에서 인위적인 느낌의 알 수 없는 힘이 느껴졌다.

“엄마. 쟤 눈이 이상해요. 마치 눈에 뭔가가 씌여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내 말에 리카르다가 그 소년에게 다가갔다.

잠시 아이의 눈을 바라보던 리카르다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아이의 눈 위에 마법진을 펼치기 시작했다.

마법진 여러 개가 동시에 피어올랐고, 마법진이 닿아 펼쳐질 때마다 소년이 괴로워하는 소리를 내며 몸부림을 쳤다.

1분 정도 시간이 흐름과 동시에 마법진이 사라졌고, 동시에 소년의 눈이 맑아졌다.

하지만 소년은 이내 의식을 잃은 듯 툭 하고 가볍게 쓰러졌다.

“다프네 말이 맞았어요. 최면과 환각 마법이 걸려 있었어요. 그것도 아주 지독하게 여러 겹을 마구잡이로 엉켜 놓았어요."

"암살자 치곤 너무 어린애다 했더니.”

엄마가 리카르다의 말에 인상을 팍 썼다.

“새끼들이 도덕이란 것을 어디로 팔아먹은 거야.”

엄마의 입에서 굴러 나오는 비속어에 어안이 벙벙한 눈빛으로 올려다보았다.

엄마는 내 시선을 못 느꼈는지 멈추지 않고 온갖 비속어를 내뱉기 시작했다.

"어린애 가지고 장난치는 새끼들은 다 삐- 삐- 삐삐- 해야 해.

절대 쉽게 죽여선… 아니, 내가 지금 무슨 말을.”

시원하게 내뱉던 비속어가 뚝 그쳤다.

나는 훌쩍이던 것도 다 잊은 채 말똥말똥 엄마를 올려다보았다.

엄마는 일부러 시선을 안 마주치면서 내 눈을 가렸다.

“못 들은 것으로 하렴. 좋은 말이 아니니까.”

“네.”

"그래, 그래.”

엄마는 착하다며 내 머리를 한번 쓰다듬어 주고서는,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레녹스에게 말했다.

“숲속에 작은 감옥 만들어 둔 것 있지?”

“야생동물 잡으려고 했던 거요?

있기는 하지만… 아!”

“저 녀석을 집어넣어 두렴. 최면에 걸려 있었다고 한들, 암살자는 암살자. 조심해서 나쁠 것 없어."

그 말에 레녹스는 무사히 잘 처리하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는 구속 마법 잘 걸어 둘게요. 기왕 이렇게 된 것 배후도 캐 볼까요?"

“제가 할게요. 자백 유도제를 만들고 있는데 잘됐네요."

"그래, 너희에게 맡기마.”

뭔가 죽이지만 않을 뿐, 적합한 대처가 술술 지나가 버렸다.

나는 엄마 품에 가만히 안긴 채, 그들이 일하는 것을 열심히 새겨들었다.

'함께 일하는 사람이 중요하겠구나.'

셋을 보니 무언가 탁탁탁 다 잘 맞는 느낌이 들었다.

부딪히는 것 하나 없이 공통된 의견으로 일을 잘 처리하고 있는 것을 보니 뭔가 뿌듯함이 생겼다.

'이게 내 가족’내가 직접 만든, 나를 소중히 여겨 주는 가족!

여전히 등을 토닥여 주는 손길은 따뜻하다.

내게 향하는 시선도 걱정이 가득하다.

'실망 시키고 싶지 않아. 나를 지키려는 만큼, 나도 이들을 지켜주고 싶어.'

내가 알고 있는 이야기는 굉장히 허술한 스토리를 가지고 있었다.

외전도 나오지 않았었기에 베네 디토 상단의 뒷이야기에 대해서는 간략히도 언급되지 않았다.

남자 주인공이 몸을 담은 곳이니 어련히 잘지낼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또 모른다.

여자 주인공과 행복해지기 위해서 상단을 쉽게 떠났을 수도 있지 않은가.

'내 이야기를 행복하게 바꿀 거야. 이 다짐을 잊지 말자.'

내 주변의 소중한 이들도 함께 행복해질 수 있도록.

나는 구속된 채 사라지는 남자 주인공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그러기 위해선 2부가 뒤틀려야 해. 죽이는 것은 자신이 없으니까… 남자 주인공에게 다정하게 대해 주자..'

공작과 유니스 그 여자의 딸이 여자 주인공으로서 행복해지는 것을 막을 거야.

그들이 가만히 행복을 맞이하도록 두지 않을 거야.

'내 행복을 위해서. 나를, 내 소중한 이들을 지키기 위해서.'

여전히 모든 것이 무섭지만, 세상에 나서는 것조차 무섭지만 해낼 거다.

꼭 해내고야 말 것이다.

두려움이 잠긴 이 밤, 내 눈에는 새로운 의지가 차올랐다.

* * *

까만 공간 속에서 나는 무언가에 쫓기고 있었다.

다쳤던 발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었고, 볼을 꼬집어도 아프지 않아 이곳이 꿈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무엇에 쫓기는지도 모른 채 한참을 달리고, 달리다가 무언가에 잡히려는 그 순간.

나는 나를 잡고 흔드는 느낌에 번쩍하고 눈을 떴다.

"허억, 헉."

마치 현실에서도 뛰어다닌 것처럼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뭐지.”

이 악몽은 도대체 뭔지, 제대로 갈피도 잡히지 않았다.

나는 흠뻑 젖은 이마를 닦아 내려고 손을 올렸고, 그 순간 누군가가 부드러운 천으로 내 이마를 닦아 주었다.

당연히 레녹스나 리카르다겠다 싶었는데 뭔가 비치는 그림자의 느낌이 달랐다.

평소보다 그림자가 더 큰 것 같은데?

당황함에 물든 얼굴로 휙 고개를 돌리니 처음 보는 남자가 서 있었다.

"이런, 제가 놀라게 해 드렸나 보네요.”

"누구..…?"

“깨고 나서는 처음 뵙지요? 상단 주의 비서 윈스턴 채셔라고 합니다. 윈스턴이라고 불러 주세요.”

"아. 네.”

"말도 편히 놔 주세요. 아가씨는 제가 모셔야 할 분인걸요."

윈스턴의 다정한 말에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감사하다며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상단주께서는 어제 일로 처리해야 할 일이 많아지셔서요. 도련님들도 마찬가지여서 오늘 하루는 제가 아가씨 옆에 있을 예정이랍니다.”

"아. 그렇구나.”

하긴, 어제 그런 일이 일어났으니.

이해한다며 고개를 끄덕이자, 윈스턴이 방긋 웃으며 내 앞에 작은 트레이를 끌고 왔다.

“리카르다 도련님께서 식사를 준비하고 가셨습니다. 식사하셔야 죠?”

“… 배가 안 고픈데."

“상단주님과 약속하지 않으셨나요? 식사는 꼬박꼬박 챙겨 먹는다고 말이죠.”

“…주세요.”

모른 척 넘어가려고 했는데, 엄마에게 언제 들은 거지.

나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앞에 놓인 스푼을 들었다.

“잘 먹겠습니다.”

“꼭꼭 씹어 드셔야 합니다."

맛은 있지만, 이른 아침에는 입맛이 돌지 않아 일부러 천천히 먹기 시작했다.

"따뜻한 물도 준비해 드릴게요."

윈스턴은 옆에서 웃으며 필요한 것을 바로바로 챙겨 주었다.

자연스럽게 내 앞에 물 잔을 내려놓는데 그 손이 뭔가 어색해 보였다.

'뭔가 딱딱해 보이는데?'

내가 빤히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져서일까.

윈스턴은 내 시선에 익숙한 듯 슬쩍 손을 가렸다.

“처음 보시죠? 아가씨께 보여드리기에는 조금 무서울지도 모르겠네요. 의수라고 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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