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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딸로 태어났다-22화 (22/185)

제22화.

만약에 휠체어를 바로 꺼내 오지 않았더라면….

아마 나는 익숙해진 대로 윈스턴에게 팔을 내밀었을 테고, 윈스턴은 무슨 상황인지 물어봤었겠지.

'이게 다행인 걸까.'

다행이지, 그럼.

만약 그랬더라면 나중에 휠체어의 존재를 알게 되었을 때 창피했을 거야.

'그보다… 왜 지금껏 그렇게 안고 다닌 거야.'

엄마도 레녹스도, 리카르다도 말해 주지 않았다니 너무해.

내가 알 수 없는 이 배신감에 홀로 부들부들 떨고 있을 때, 옆에서 퓸 하고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웃음에 휠체어에서 천천히 시선을 올리자 웃고 있는 윈스턴과 눈이 마주쳤다.

"아, 죄송합니다. 설마 그동안 가족분들의 품에 안겨 다니셨나요?"

역시 비서는 그냥 하는 게 아닌가 보다.

내 표정을 읽기라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정확하게 집어 낸 답에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아가씨가 작고 연약하니 소중히 여겨 주고 싶으셨나 보네요."

윈스턴의 위로에 그런 거겠지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홀로 움직일 수 있는 자유가 얼마나 중요한데요. 그 자유를 이 윈스턴이 제공해 드리겠습니다.”

윈스턴이 과장된 몸짓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말했다.

자부심 넘치는 그 행동에 거절하지 않고 알겠다 답하자, 그가 내 앞으로 다가왔다.

"자, 그럼 아가씨. 실례하겠습니다.”

그러고는 나를 번쩍 안아들었다.

'몸이 꽤 여위어 보였는데.'

의외의 모습에 놀라 딱딱하게 굳어 있자 그가 싱긋 웃었다.

“제가 힘이 센 것이 아니라 아가씨께서 가벼우신 겁니다. 이렇게 가벼우면 후식으로 계속 코코아만 드시게 되실 수도 있어요."

식사 때마다 나오는 코코아를 상상하니 입에서 절로 싫은 소리가 나왔다.

윈스턴이 리카르다 도련님께 어서 말해야겠다고 웃으며 나를 조심스럽게 휠체어에 앉혀 주었다.

“휠체어의 바퀴를 직접 굴리셔도 움직이겠지만, 마력을 원동력으로 해서 돌아가니 이 버튼들만 잘 조작하신다면 쉽게 이동하실 수 있을 겁니다.”

초록 버튼은 앞으로, 붉은 버튼은 정지, 노란 버튼은 뒤로.

그리고 방향을 바꾸고 싶으면 보라색 버튼을 누르면 된다며, 알아듣기 쉬운 설명에 버튼을 만져 보았다.

하나하나씩 다 눌러 보고 제대로 움직이는 것을 확인하고서 스스로 나가려고 했는데.

“물론 아가씨께서 직접 움직이실 수 있겠지만, 굳이 버튼을 누르는 수고스러움을 겪게 해 드릴 수는 없지요.”

아까는 자유를 주겠다고 하더니..

“부디 제가 도와드릴 수 있게 허락해 주시겠어요?"

능청스러운 말에 어이가 없었다.

내 시선에 그가 어깨를 으쓱했다.

“저의 오늘 미션은 아가씨를 불편함 없이 모시는 거니까요."

“대신 숲에 가면 휠체어로 움직이는 연습을 할래.”

“아가씨께서 원하신다면요."

서로 원하는 합의점을 마련한 뒤, 우리는 방을 나섰다.

바퀴가 도르륵 도르륵 굴러가는 소리가 서서히 파스슥하고 풀을 밟는 소리로 변했다.

오래간만에 나온 바깥의 풍경은 리카르다의 마법 때문인지 푸르스름함을 간직하고 있었다.

높이 떠오른 태양, 겨울임에도 춥지 않은 정원, 그리고 형형색색의 꽃과 나무.

그렇기에 더욱 상쾌했다.

나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가 내쉬며 오랜만의 밖의 공기를 맘껏 끌어안았다.

추운 겨울은 감히 들어올 수 없는 이곳에서는 못할 것이 없을 것 같았다.

“침입자가 있는 곳은 멀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가깝지도 않지요.”

휠체어가 10분 정도 돌돌 굴러갔다.

따뜻하다고 느껴졌던 날씨가 어느새 스산해짐을 넘어 쌀쌀해졌고,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추우실 수도 있습니다.”

미리 준비했는지 윈스턴이 건네주는 담요를 덮고 나니 언제 쌀쌀했냐는 듯 참 따뜻해졌다.

몽실몽실한 담요의 포근함에 익숙해질 때, 성인이 들어가면 좁아보일 정도의 작은 감옥이 보였다.

“이런. 여전히 밥을 안 먹었네.

요.”

철창 앞에는 샌드위치가 담긴 그릇이 건드린 흔적도 없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어디 있어?”

"음, 아 저기 있네요. 철창 구석에 몸을 웅크리고 있어서 잘 안보였네요.”

윈스턴이 가리키는 방향을 뚫어지게 쳐다보니 검기만 했던 공간에서 사람이 나타났다.

머리도, 옷도 심지어 감옥 안마저 어두우니 고개를 들기 전까지는 잘 보이지 않았다.

그때, 조용한 공간에 꼬르륵하는 소리가 울렸다.

조금 전에 밥을 먹은 나는 아닐 테고, 윈스턴도 밥을 굶고 다니지는 않을 것 같고,

“저렇게 배가 고픈데도 끝까지 손을 안 대는군요. 훈련을 잘 받았나 봅니다.”

“훈련?”

“세뇌당하듯 훈련을 당했을 겁니다. 무조건 주인의 명령에만 따르게 말이죠.”

자연스럽게 나온 말은 잔인한 내용이었다.

“그래서 최면이 풀려도 저렇게 음식에 손을 대지 않는 겁니다."

저렇게 배가 고프고, 앞에 음식이 놓여 있는데도 먹지 못한다니.

과거 보육원에서 겪었던 일이 떠올랐다.

식당에는 넘쳐났는데도, 유독 내게만 박했던 그 음식들.

먹고 싶었지만, 먹는 순간 내게 날아올 매질이 기다리고 있어서 자연스럽게 굶는 것에 익숙해졌던 그 나날들.

어째서인지 저 녀석이 음식을 입에 집어넣는 모습을 보고 싶어졌다.

“있지. 가까이 가서 직접 줘도 돼?"

“아니요. 위험해서 안 됩니다."

“하지만 배고플 텐데. 어른이 음식을 줘서 무서웠던 걸 수도 있잖아.”

윈스턴이 내 억지에 절대 안 된다고 강경하게 나오다가, 이어지는 재촉에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축 늘어트리며 허락했다.

“그렇다면 철창 안으로 손을 넣으시는 건 안 됩니다. 밖에서만 지켜보셔야 해요.”

“응, 알겠어."

윈스턴이 휠체어를 조금씩 앞으로 밀었다.

풀이 적은 흙바닥에 도록, 도록 하고 바퀴가 굴러가는 소리가 울렸다.

그 소리에 고개를 든 남자 주인공과 눈이 마주쳤다.

검은자는 흰자로 돌아와 있었지만, 마치 파충류처럼 생긴 동공은 여전했다.

다행히 눈빛을 보니 어제보다는 조금 나아 보였다.

아니, 잔뜩 경계하고 있으니 아닌가?

그나마 인위적인 느낌은 사라졌지만, 내가 느낄 수 있을 만큼 강력한 적의를 보이니 윈스턴이 저렇게 경계할 만도 했다.

긴장감이 맴도는 이 상황에서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을 했다.

'분명히 그냥 주면 안 먹겠지.

그렇다고 음식을 던져 주면.….

동물도 아니고, 음식을 먹으라고 던져 주는 것은 좀….'

기분이 더 나빠질지도 모른다.

‘반대로 생각해 보자. 만약에 나라면, 저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밥을 먹을까?'

배가 고프고, 눈앞에는 적이 있고, 그런데 그 음식도 적이 준 거고,

'안 먹을 것 같은데.'

나라도 안 먹을 것 같은데, 제대로 훈련받은 애가 먹을 리가.

적어도 내가 적이 아니었다면 먹을까 생각은 해 봤을 것 같지만.

'아. 이거다.'

웃는 사람 앞에서는 침을 못 받는다고 했었지.

마냥 다정하게 시작하는 게 아니.

라, 서서히 다가가는 거다.

'가장 바람직한 모델을 겪어 봤잖아.'

우리 가족들이 내게 서서히 다가오려고 했던 그 모습을 떠올리며, 나는 담요를 거두고 조심스럽게 바닥으로 내려갔다.

"아가씨?"

“잠시만.”

윈스턴의 걱정하는 목소리에 손을 들고 그를 막았다.

그리고 나를 빤히 쳐다보는 아이와 눈높이를 맞췄다.

내가 이 아이에게 바로 호의를 가질 순 없겠지만, 적대적으로 대할 필요는 없겠지.

내가 무슨 감정을 가지고 이렇게 행동하는지 생각하게만 하면 돼..

차가운 땅에 멀쩡한 왼쪽 다리를 기대어, 철창 앞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내 움직임에 소년의 시선이 내쪽으로 향했고, 마침내 눈이 마주쳤다.

기이한 보라색 눈과 내 금색 눈이 마주친 순간, 소년이 움츠리고 있던 팔을 풀었다.

관심을 보이는 그 행동에 나는 옆에 있는 샌드위치 그릇을 가져와 슬며시 들어 올렸다.

"이거 왜 안 먹었어?"

“배고프지 않아? 이거 맛있어.”

"......."

“배고프면 움직이지도, 도망치지도 못할 텐데.”

내 말에 그가 움찔하더니 또르륵하고 눈을 굴렸다.

그의 시선에 샌드위치에 닿았다.

관심을 가지는 것에 이때다 싶어서 철창 안으로 샌드위치 접시를 세워서 넣어 주었다.

"자. 이러면 안에 있으니까 쉽게 먹을 수 있을 거야.”

"......."

“나는 그냥 네가 이걸 맛있게 먹었으면 좋겠어. 배고픈 건 서럽잖아.”

움찔, 아이의 몸이 살짝 움직였다.

나갈까 말까 고민하는 듯 굴리는 눈을 바라보며 나는 옆에 있는 물도 안에 넣어 주고서는 다시 권했다.

“목 막히면 물도 같이 마셔도 돼."

허락에 가까운 말이 떨어지자, 갑자기 소년이 달려들었고 허겁지 겁 샌드위치를 먹기 시작했다.

부스러기 하나 흘리지 않겠다는 듯 열심히 움직이는 입을 뿌듯이 바라보는데 윈스턴이 내 바로 옆으로 다가왔다.

“아가씨. 철창 안으로는 손을 안집어넣기로 하셨잖아요.”

“하지만 어쩔 수 없었어.”

그리고 먹잖아.

내 눈짓에 그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나를 덜렁 안아 들더니 바로 휠체어에 앉혀 주었다.

“땅이 얼마나 찬데 맨바닥에 그리 주저앉아 계세요. 그만 돌아가 죠.”

“벌써?”

"아가씨께서 철창 안에 손을 넣는 위험한 짓을 하니 이만 돌아가야지요. 약속하셨잖아요?"

또 그러다가 사고라도 나면 큰일이라고 하는 말에 나는 뚱한 표정을 지었다.

'어쨌든 내가 먹였는데.'

그렇다고 거짓말쟁이가 되기는 싫으니까.

어느새 샌드위치를 다 먹고 물까지 꼴깍꼴깍 다 마신 녀석이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 시선에는 조금 전보다 적의가 덜했으니 다행인 거겠지?

윈스턴은 강경했기에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럼 돌아가기 전에 잠깐만.”

휠체어를 돌리기 전, 나는 덮고 있는 담요를 윈스턴에게 건네주었다.

“저 애 계속 여기 있으면 추울 거잖아. 이 담요 따뜻하니까 줄래.”

“…아가씨도 참.”

내 말에 그가 졌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렇게 말을 하면서도 표정이 나빠 보이지는 않았다.

나는 그가 철창 안으로 담요를 집어넣어 주는 모습을 보고서야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거기 추우니까. 그거 꼭 덮고 있어야 해.”

"다음에 올 때는 더 맛있는 것 가져올게. 그러니까….”

보통 이럴 때는 무슨 말을 해야 하지?

나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흔한 인사말을 덧붙였다.

“감기 걸리지 말고, 올 때까지 말썽 피우지 말고, 그리고 다음에는 이름을 알려 줄래?"

"......."

"다음에 올 때 내 이름도 알려 줄 테니까 네 이름도 알려 줘."

“그럼, 안녕. 내일 보자.”

더 이상 이곳에 있으면 안 된다는 듯 휠체어는 빠르게 집으로 향했다.

하지만 이대로 들어가기는 아쉬워 따뜻한 정원에서 더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멀어지는 우리 뒤로 끈질긴 시선이 따라붙었다.

힐긋 뒤를 돌아보니 남자 주인공이 우리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눈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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