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화.
남자 주인공을 뒤로한 채 도착한 정원은 기대 이상으로 아름다웠다.
아름다운 정원은 내 안의 무채색을 채워 줄 수 있을 정도로 다양한 색으로 알록달록 빛이 나고 있었다.
몸에 무리가 가지 않을 정도로 정원도 맘껏 구경하고, 윈스턴이 챙겨 주는 점심도 먹고, 코코아는 안 마셨다.
"이제 뭘 하고 싶으세요?"
“공부.”
“그럼 방으로 갈까요?"
"으응. 아니, 엄마의 집무실로 갈래.”
그 말에 윈스턴의 발걸음이 멈추었다.
확실히 어제 그런 사건이 있었으니 가기에는 꺼려지겠지.
'나도 조금 꺼려지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집무실을 가는 일을 계속 피할 수는 없는걸.'
'무엇보다 모두가 돌아왔을 때 가장 먼저 맞아 주고 싶어.'
조금 부끄럽지만, '다녀오셨어요.'
라고 말해 보고 싶어.
“무섭지는 않으시고요?"
“엄마의 방인데 뭐….”
말끝이 조금 흐려졌지만, 윈스턴은 더는 묻지 않고서 자연스럽게 2층으로 휠체어를 돌렸다.
“그런데 2층으로는 어떻게 올라가지?”
휠체어를 가리키며 묻자 그가 문제될 것 없다며 내가 타고 있는 휠체어를 번쩍 들어 올렸다.
“윈스턴?”
이게 무슨 일이야.
아무리 내가 가볍다고 해도 이것 저것 달린 휠체어를 이렇게 한 번에 번쩍 들어 버리다니.
당황이 물든 눈동자가 이리저리 움직여 댔다.
뭔가 무섭기도 해서 휠체어를 꼭 잡으니 위에서 걱정하지 말라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가 이래 봬도 힘이 좋답니다.
만약의 경우가 생겨도 제 몸을 바쳐서라도 아가씨를 구하겠습니다.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그럼 윈스턴이 다치잖아?"
“어차피 그런 일은 없을 테니까요.”
손도 불편하면서….
내 뒷말에 그가 씨익 웃었다.
다행히도 힘에 자신 있다는 말은 사실이었는지, 성큼성큼 올라가 계단의 끝에 도착하는 것은 금방이었다.
당연한 거겠지만, 엄마의 집무실에 들어갔을 때 어제 봤던 시체는 사라진 상태였다.
“저기, 저기가 내 자리야."
큰 책상 옆에 마련되어 있는 작은 책상.
앞에 있는 의자를 치우고 휠체어를 의자 대신 쓰며 책상에 놓여 있는 책을 펼쳤다.
그렇게 한참을 윈스턴과 함께 공부를 하고 있을 때, 시계에서 반짝하고 빛이 났다.
'혹시 이번에도 암살자나 침입자는 아니겠지?'
저 빛과 함께 남자 주인공이 등장했을 때가 떠올라 움찔하고 몸을 떨다가, 시선이 느껴져 슬쩍 고개를 올려 보았다.
“아가씨께서 걱정하실 만한 일은 다시는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내가 하는 걱정?"
"다시는 아가씨를 위험에 빠뜨리지 않기 위해 모두 안 떨어지는 걸음을 억지로 떼셨는걸요.”
그 말과 함께 윈스턴은 시계 쪽을 바라보라며 슬쩍 눈짓했다.
나는 들고 있는 펜을 꼼지락거리다가 결심한 듯 천천히 고개를 올렸다.
빛이 사라짐과 동시에 그 앞에 레녹스와 리카르다가 나타났다.
둘은 웃으면서 나를 반기려다가 흠칫하고 그 자리에서 굳었다.
“레녹스? 리카르다?”
둘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은 것이 이상해 고개를 갸웃하는데, 뒤에서 작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뭐지?'
윈스턴이 웃는 것을 보니 마냥 나쁜 상황은 아닌 것 같은데.
고개를 갸웃하다가 뒤늦게야 그들의 시선이 휠체어에 닿아 있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아. 맞아! 휠체어 처음부터 준비되어 있었다는데요?"
지금껏 보였던 어리광이나 부끄러운 모습이 떠올라 목소리가 저 절로 뾰로통하게 튀어나갔다.
그 목소리에 둘은 그제야 굳어 있는 몸을 풀더니 서로 눈짓을 교환했다.
그리고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레녹스였다.
"아니, 분명 리카가 준비가 덜 되었다고 했었는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분명 형이 준비가 덜 되었다고 했었는데 어디서 튀어나온 거지?"
“둘이 지금 말 다르거든요."
레녹스는 리카르다 탓으로, 리카르다는 레녹스 탓으로 돌렸다가 내 말에 그제야 아차 하는 표정으로 입을 꾹 다물었다.
"둘 다 날 속였어.”
내 말이 이어지자마자 둘은 황급히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아니야! 속이다니 무슨 소리야!”
“맞아, 절대 아니야, 다프네! 그러니까… 실은… 어머니께서 !"
어디 한번 말해 보라는 듯 내 눈이 새초롬하게 올라갔다.
레녹스가 이때다 싶어 어머니 탓으로 돌리려는 그 순간 다시 시계가 빛을 뿜더니 엄마가 돌아왔다.
엄마는 조금 피곤해 보였으나, 입가에 웃음을 띠고서 내게 인사해 주었다.
그러나 나를 보는 순간 엄마의 눈이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렸다.
“좋은 하루 보냈니?"
그와 함께 엄마의 말끝이 흐려졌다.
붉은색 눈동자에 순간적으로 당혹함이 보였다 사라졌다.
표정 관리가 중요하다고 알려 주셨으면서, 뒤늦게 이상함을 알아차리고서 표정을 바꾸는 모습을 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바라보았다.
물론, 엄마는 언제 당황했냐는 듯 빙긋 웃으며 레녹스와 리카르다에게 말했다.
“어머나. 휠체어가 준비되어 있으면 말을 해 주지 그랬니, 얘들 아?”
엄마마저 둘에게로 책임을 돌려 버렸다.
그 말에 레녹스와 리카르다가 당황스럽게 나를 쳐다보았다.
둘의 억울한 표정과 엄마의 당당한 눈빛이 참으로 대비되어 보였다.
나는 셋을 빤히 바라보다가 에휴우,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내 한숨 소리에 참다못한 윈스턴이 큰소리로 웃음을 터트렸다.
“푸흡, 푸흐흐. 세 분 다 다른 말 하고 계신 것 아세요?"
“다들 알고서 나를 속인 거예요.”
나는 그것도 모르고 계속 안겨다니고, 다시 푸우우, 하고 한숨이 나왔다.
그 한숨 소리에 움찔하던 세 사람이 서로 눈빛을 교환하더니 어색하게 웃었다.
“그냥, 품에 안고 다니는 게 다 프네가 더 안정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다프네가 추울까 봐 그랬어!"
"아가를 안고 다니고 싶어서 그랬단다.”
셋은 말 돌리기를 포기했는지, 이제는 변명을 덧붙였다.
리카르다와 레녹스, 그리고 엄마의 변명 아닌 변명이 이어지자 나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
“그게 뭐예요.”
필사적으로 꺼낸 변명도 결국 나를 걱정해서라니.
이렇게 마음이 따뜻하면 더는 화도 못 내겠잖아.
어째서인지 지금이라면 자연스럽게 웃음이 나올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언젠가 거울을 보면서 연습했던 어색한 웃음이 아닌, 바들바들 떨리지도 않고 자연스럽게 나올 수 있는 그런 웃음이.
그래서 나는 지금 내가 느끼는 감정을 담아 방긋 웃었다.
눈을 곱게 휘고, 입가도 부드럽게 끌어 올려 그들이 내게 주었던 웃음을 그대로 돌려줄 수 있게.
"다녀오셨어요.”
내 웃음에 레녹스가 눈을 마구 깜빡였다.
리카르다는 잘못 본 건가라며 중얼거리더니 눈을 비비적거렸다.
엄마는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보다가 나를 따라 함께 웃어 주었다.
그리고 답해 줬다.
“그래, 다녀왔단다.”
엄마가 내 앞으로 다가와 팔을 벌려 주었다.
어제까지는 내가 안아 달라 했지만, 오늘은 엄마가 먼저 안아 달라고 하는 거니까.
그리고 나도 엄마 품은 좋으니까.
스스로 합리화를 하며 엄마 품에 꼭 안기었다.
조금 창피하고, 부끄러우면 어때.
내가 좋은걸.
엄마의 품에 폭 기대니 이제야 정신을 차린 듯 레녹스와 리카르다도 내게 말했다.
"다녀왔어, 다프네.”
"나도, 나도. 다녀왔어!”
곧이어 집무실은 모두의 웃음으로 가득 찰 수 있었다.
물론, 그 안에 내 웃음도 포함이었고 말이다.
* * *
“안 돼.”
어제 하루가 어땠는지 윈스턴의 보고가 들어갔나 보다.
아침 식사를 앞에 두고서 엄마는 다음부터는 절대 그 소년을 찾아가지 말라며 단호하게 말했다.
“하지만 거기는 춥고, 외롭고….."
“그래도 안 된다면 안 된단다.
암살자로 자란 아이가 얼마나 위험한데.”
나를 걱정하는 말에 이대로는 끝까지 고집 피워도 허락받지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보다 엄마의 태도가 너무 강경했다.
'일단 걔랑 친해져야 하고, 그리고 다정하게 대해 줘야 하는데..…
그리고….’
또 걔가 식사를 굶었다는데….
내가 안 가면 밥도 안 챙겨 먹을 것 같은걸.
내 앞에 놓인 따뜻한 아침 식사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엄마는 단호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 또한 굳은 마음으로 힘껏 말했다.
“그럼 저 소원 사용할래요! 두번째 소원.”
“다프네.”
레녹스가 나를 말리려고 했지만, 리카르다가 들어나 보자며 그를 만류했다.
“저는 두 번째 소원으로 그 아이랑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어요.
분명 걔는 제가 없으면 굶을 것이고, 거기가 무서울 수도 있잖아요."
내 말이 그저 순진하게만 들렸던 건지 엄마는 한숨을 내쉬었다.
“세뇌가 풀렸다고 한들 위험한 것은 변하지 않아.”
걱정스러운 목소리에 레녹스도 리카르다도 공감하는 듯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가, 엄마는 네가 더는 다치지 않았으면 한단다. 아직도 목에 있는 자국이 사라지지 않았잖니.”
"걔가 한 건 아닌걸요. 그리고 약속했어요, 또 찾아가겠다고."
엄마의 눈이 내 목에 걸린 앙증맞은 손수건으로 향했다.
귀여운 분홍색 손수건 아래에는 지지난밤 사내에게 목이 졸리느라 남은 멍 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으니, 충분히 걱정될 만했다.
나는 걱정하는 가족들을 이해하지만, 그럼에도 이 의견을 굽힐수 없었다.
“제가 걔랑 친구가 되어 보고 싶어서 그래요.”
“친구라니. 걔는 암살자고….”
“철창 안으로 들어가지도 않을 거고, 함부로 열어 주지도 않을게요. 걱정되면 꼭 옆에 누군가와 함께 있을 때만 갈게요!"
내 말이 이어질수록 엄마는 조용히 듣고만 있었다.
그러자 오히려 옆에 있는 레녹스가 허락하면 안 된다는 듯 나를 설득하려 했다.
“그럼에도 변하지 않고, 여전히 우리를 위협한다면 그때는 저도 포기할게요.”
"걔가 안타까워서 그러니?"
"조금요.”
마지막 말에 결국, 엄마는 백기를 들었다.
"네 소원이니 네 맘대로 써야지.
다만 네가 말한 것은 꼭 지켜야 한단다.”
"네!"
엄마의 허락과 내 큰 대답이 나오자 레녹스가 인상을 찌푸렸다.
"어머니, 아무리 그래도….”
“그리고 리카르다, 오늘은 네가 함께 있으렴.”
"네…?"
오늘은 어머니 차례인데….
리카르다가 눈치껏 엄마와 레녹스, 그리고 나를 한 번씩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가서 멀쩡한지 잘 확인하고 올게요!”
세뇌 마법이 잘 풀렸는지 확인하려나 보다.
어쨌든 내 두 번째 소원이 무사히 이루어졌다는 것에 조금 설레는 마음으로 리카르다에게 말했다.
“리카르다! 우리 얼른, 얼른 가요.”
“잠깐, 아침 식사는 다 해야지."
"아!”
수프를 떠먹는 손이 빨라졌다.
오늘따라 유난히 수프가 맛있는 것은 기분 탓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