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녀의 딸로 태어났다-24화 (24/185)

제24화.

오늘은 두툼하게 외투도 챙겨 입고서 숲으로 향했다.

“안녕.”

내 인사에 철창 구석에 자기 몸을 말고 있던 남자 주인공이 획고개를 들어 올렸다.

마치 주인을 반기는 강아지 같은 모습이었다.

시선을 내리니 어제저녁에 내어준 차갑게 식은 음식이 담긴 그릇이 보였다.

“또 밥 안 먹었네."

나는 옆에서 멀뚱히 바라보고 있는 리카르다에게 손을 뻗었다.

“나 내려 줘요.”

"바닥이 얼마나 찬데!"

“방석 가져온 것 다 아는데."

등 뒤에 매고 있는 무거운 가방이나 숨기고서 얘기하지.

내 지긋한 눈빛에 리카르다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가방을 땅에 내려놓았다.

“하, 이건 또 언제 봤지.”

가방을 열자 저게 다 들어갈까 싶을 정도로 많은 물건이 튀어나왔다.

"자, 이건 방석, 담요, 그리고 혹시 추울까 봐 챙겨 온 장갑이랑 목도리,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다프네가 제일 좋아하는 따뜻한 코코아지!”

'으.' 방긋방긋 웃으며 하는 말에 애써 표정 관리를 하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가방에서 무언가 하나씩 나오니, 남자 주인공의 몸이 서서히 앞으로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마치 하나하나 눈에 담아 보고 싶다는 듯이.

'암살자였는데 이런 것 본 적이 없을까? 암살자로서의 기억은 그대로일까?'

천천히 대화를 하다 보면 알게 되겠지.

* * *

을씨년스러웠던 곳이 가방에서 꺼낸 물건들로 인해 소풍이라도 온 듯 아늑하게 변했다.

나는 품에 안고 있던 작은 바구니를 바닥에 내려놓고 리카르다를 재촉했다.

"얼른 내려 줘요.”

"내려오기 전에….”

“철창 안으로 손을 넣지 않는다.

문을 열지 않는다.”

내 빠른 대답에 리카르다가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리카르다가 나를 땅에 조심히 내려놔 주었다.

나는 내 바로 앞까지 다가온 남자 주인공을 위해 옆에 놓아 둔 바구니를 끌고 왔다.

“배 안 고파?"

“…고파.”

처음으로 들은 목소리에는 경계 심이 가득했다.

그럼에도 눈은 내가 들고 온 바구니에서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아무래도 이 안에서 나는 냄새를 기가 막히게 맡았나 보다.

"따뜻한 수프랑 부드러운 빵, 그리고 과일도 들어 있는데. 먹고 싶지 않아?”

“…먹고 싶어.”

“그냥은 줄 수 없고….”

나는 일부러 말끝을 흘리며 바구니 위에 덮인 천을 거두었다.

감옥 앞이 맛있는 음식 냄새로 가득 차자, 익숙한 꼬르륵 소리가 들려왔다.

"…때려도 돼.”

“뭐?”

갑자기 들려온 뜬금없는 소리에 무슨 말이냐는 듯 쳐다보니, 그가 굳은 표정으로 말하고 있었다.

“때려도 된다고. 그러니까 그거 줘.”

“왜 때려야 하는데?"

“그냥 줄 수 없다며?"

내 말에 그가 고개를 갸웃했다.

이해가 가지 않는 앞뒤가 안 맞는 말에 내가 어제 준 음식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건 그냥 줬는데 안 먹었잖아."

"이상한 냄새가 나."

"이상한 냄새?”

그새 음식이 상하기라도 했을까.

나름 심각한 표정으로 굳어 버린 음식을 내려다보는데 리카르다가 큼큼하고 헛기침하며 그 그릇을 치웠다.

그리고 손을 펼쳐 감옥 안에서 보이지 않도록 입을 가리더니 뻐끔뻐끔했다.

자. 백. 제.

아, 레녹스가 자백제를 먹인 다음에 심문한다고 했었지.

음식을 먹기 시작한다는 것을 알고 그 후에 집어넣었나 보다.

그걸 오로지 냄새로만 알아차리다니 보통 예민한 감각이 아니었다.

내가 눈짓으로 내 바구니를 가리키자 리카르다가 고개를 저었다.

지금 들고 온 것에는 없다는 말에 나는 다시 고개를 돌려 그 녀석을 쳐다보았다.

"너한테 밥 주는 사람들이 너에게 뭘 했는데?"

“주먹질하거나. 발로 차거나. 아니면 욕을 한다든가….”

작은 입에서 나오는 가혹한 학대에 내 미간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남자 주인공이 안 좋은 과거를 보냈다는 말이 이런 거였을까.

'나랑 비슷하네.'

아니, 암살자로 자라 왔으니 더하면 더하지 않았을까.

'이상하게도 나랑 참 닮은 것 같아. 기분 탓일까.'

나는 바구니를 뒤적여 차곡차곡음식들을 꺼내 철창 앞에 두었다.

지난번 충고처럼 철창 안으로 손을 넣지는 않고, 최대한 가까이 놓은 후 나를 빤히 바라보는 녀석에게 말했다.

"나 너 때릴 정도로 힘없어.”

"…그럼 내가 뭘 해 줘야 하는데?"

의문이 담긴 목소리에 나는 별것 아니라는 듯 말했다.

"내 이름은 다프네야.”

"......."

"다음에 만나면 이름 알려 달라고 했잖아. 이름 알려 줘. 그거면 돼.”

언제까지 남자 주인공, 그 녀석, 소년 이렇게 부를 수는 없잖아.

소설에서 보아 알고 있었지만 소년에게 직접 듣고난 뒤 불러 주고 싶었다.

속으로 투덜거리며 야무지게 앞에 물병까지 내려놓았다.

“그래서 이름이 뭐야?"

돌아오는 답이 없었다.

혹시 이름을 가르쳐 주고 싶지 않은 것인가 싶어 눈을 마주치자 그가 입을 열었다.

"라그나르.”

“그래, 라그나로, 이제 밥 먹어도 돼.”

허락하는 말에 라그나르는 앞에, 놓인 음식을 향해 천천히 손을 내뻗더니, 음식이 손에 닿자마자 어제와 같이 허겁지겁 먹기 시작했다.

채 5분도 지나지 않아서 간단하게 준비해 온 아침 식사가 끝이나 버렸다.

“맛있다.”

라그나르가 말을 내뱉어 놓고서 당황한 듯 입을 틀어막았다.

그리고 눈을 굴려 리카르다의 눈치를 본다.

그리고 딸꾹, 하고 딸꾹질을 하기 시작했다.

입을 틀어막은 채 희미하게 나오는 딸꾹질과 들썩이는 몸.

부릅뜬 눈은 반항이라도 하듯 사나웠지만, 그 안에 담긴 것은 명백한 두려움이었다.

겉으로 강한 척 가시를 세우지만, 결국 무서워 꼬리를 말고 물러나는 것이다.

마치 훈련받은 개처럼.

라그나르는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 리카르다가 무섭게 생긴 외모는 아닌데. 그렇다면 덩치가 커서 무서워하는 걸까?'

입을 꾹 다문 채 조용히 고개를 숙이는 모습에 나는 어쩔 수 없이 리카르다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리카르다는 관찰자의 눈빛으로 라그나르를 바라보다 내 부름에 눈을 휘며 답했다.

"응? 왜 그래, 다프네?"

나는 덮고 있는 담요를 바닥에 깔고서 그 위를 손으로 통통 쳤다.

“리카르다도 여기 앉아.”

"엥?"

"얼른 앉아.”

다시 소매를 잡아당겨 재촉하자리카르다가 영문 모를 표정으로 담요 위에 앉았다.

그제야 라그나르의 떨림이 조금 멈추었다.

'역시 덩치 큰 사람을 싫어하는 것 같지?’

아까 했던 말을 듣고 유추해 보면 그런 놈들이 아무래도 학대를 했던 것 같고, 저 두려움은 훈육의 결과겠지.

정말, 나랑 비슷한 애네.

다만 나에게는 벗어나고자 하는 의지가 있었고, 라그나르는 그조차 가질 수 없었던 거고, 최면에 걸려 있었다니 그러한 생각도 하지 못했겠지.

휴, 한숨이 절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내 옆에 앉은 리카르다도 눈치를 챘는지 당황한 기색을 지우고는 다시 조용해졌다.

“라그나르.”

"어, 어어.”

이름을 불리는 것도 익숙하지 않는다는 듯 반응이 느렸다.

나는 빈 컵을 앞에 두고서 보온 병의 뚜껑을 열었다.

내가 움직이자 두 남자의 시선이 동시에 내게 향했다.

둘의 시선이 향하든지 말든지, 나는 보온병을 열어 컵에 내용물을 쪼르륵하고 따랐다.

따뜻한 코코아가 아직도 열기를 품은 채 하얀 연기를 내뿜고 있었다.

나는 컵에 가득 담긴 코코아를 라그나르 앞에 내려놓았다.

“마셔."

“…이게 뭔데?”

“음.”

나는 옆에서 황망한 얼굴로 코코아가 담긴 컵을 보는 리카르다의 눈치를 보며 말을 지어냈다.

“세상에서 제일 맛있고, 따뜻한 코코아야. 내가 제일 좋아하는 건데 너 줄게.”

“…내가 마셔도 돼?"

"마시라고 준 거야.”

퉁명스러운 대답에 라그나르가 조심조심 컵을 잡더니 후룩 소리를 내며 코코아를 마시기 시작했다.

컵에 얼굴을 묻은 채 마시는 모습을 보며 나는 옆에 있는 리카르다의 손을 톡톡 두드려 줬다.

"미안해, 쟤한테 줘서.”

“후후. 괜찮아! 다프네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코코아는 돌아가서도 타 주면 되니까.”

아.

이렇게 자연스럽게 오늘 치 간식을 넘기려 했는데.

왜인지 모르겠지만, 감동받은 모습에 괜찮다는 말도 못 하겠다.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는데 푸하~ 하며 입을 떼는 소리가 들려왔다.

“맛있어!”

그 독특한 보라색 눈을 반짝이며 나를 바라보는 그에게 인정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달아서 그렇지, 맛있기는 하니까.

정말 맛있었는지 눈을 반짝이며 입술에 묻은 것 하나하나 혀로 핥는 모습에는 이미 조금 전의 경계는 사라진 상태였다.

'단순하네.'

맛있는 걸 주고 길들이는 것 같아 기분이 좀 이상하지만.

나름 분위기가 잘 흘러가고 있는 것 같아 오늘은 이제 그만 만족하려 했다.

그때, 자신이 너무 흥분했다는 것을 알아차렸는지 갑자기 라그나 르의 얼굴이 굳었다.

"아니, 그러니까… 마, 맛있는데...”

경계를 풀었다가, 가졌다가.

계속해서 변하는 반응에 나는 괜찮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이제는 뭘 하려는지 궁금해서 라그나르를 빤히 쳐다보는데, 내 시선이 부담스러웠는지 그가 움츠러든 채 말했다.

"…다. 프네?”

"응."

라그나르가 우물쭈물거렸다.

입술을 앙 물었다 떼었다, 주먹을 쥐었다. 폈다, 계속 가만히 있지 못하더니 힘겹게 입을 열었다.

“다프네는 내가 안 징그러워?”

“징그러워해야 해?"

내 물음에 그가 입을 꾹 다물었다.

무언가 말하고 싶은 듯 다시 몸을 움찔움찔하더니 시선을 피하고서는 작은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내 눈 징그럽잖아. 다들 징그럽다고.….”

“조금 특이하다고는 생각하는데.”

“.......”

최면이 풀리자 흰자는 돌아왔지만, 동공은 여전히 파충류처럼 찢어져 있었다.

하지만 고개를 푹 숙이는 모습은 시무룩한 강아지 같이 보였다.

“라그나로, 내 다리 봐 봐."

“…아.”

그동안 눈치를 못 챘는지 다리에 돌돌 감겨 있는 붕대를 보고서 그가 놀란 듯 눈을 크게 뜬다.

밝은 곳으로 나오자 라그나르의 동공이 가느다랗게 좁혀지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대수롭잖다는 듯 말했다.

"난 다리가 이래서 혼자 못 걸어. 그래서 휠체어 타고 다니고."

“아….”

“그런 내가 징그럽니?"

“…아니. 아니, 안 징그러워."

"나도 그래. 너 안 징그러워."

계속 우물쭈물하는 모습에 마지막 말을 덧붙여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러니까 눈 피하지 말고 얘기 해.”

그의 눈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의 반짝이는 보라색 홍채를 보면 내가 잃어버린 색을 보여주는 것 같아 나쁜 기분이 들지 않았다.

"나 보라색 좋아하니까, 많이 보여 줘.”

“…언제까지?”

라그나르의 목소리가 떨려 왔다.

그와 함께 쥐고 있는 손이 추위에 붉게 달아올라 있는 게 눈에 띄었다.

“손 좀 줘 봐.”

“어?”

“빨리.”

그가 갑작스러운 내 말에 놀라더니 조심스럽게 철창 밖으로 손을 내밀었다.

슬쩍 만지니 역시나 차갑다.

나는 그 손에 리카르다가 챙겨 온 분홍색 장갑을 끼워 주며 말했다.

"네가 안전하다고 파악되기 전까지.”

"......."

“계속 보여 달라는 거야. 매일 놀러 올 테니까.”

그 말에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아니, 굳이 말이 필요 없었다.

시체처럼 하얗던 얼굴에 생기가 도는 듯 붉게 달아오르는 것이 보였으니까.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