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화.
나를 보며 무어라 말하고 싶은지 우물쭈물하던 라그나르도, 그대로 나를 품 안에 포옥 안아 버린 레녹스도.
그리고 내 시선까지 집중되니 리카르다가 그려 놓은 그림 위에 손을 올려 무어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분홍빛 마력이 넘실넘실 돌아다니다가 그림 위에 안착했고, 그림은 곧 마법진이 되어 새로운 빛을 내뿜었다.
“이게 뭐야?”
“궁금해?"
"궁금해!”
알려 줄까, 말까 하는 그 눈빛에 내가 빤히 쳐다보았다.
리카르다도 레녹스도 둘 다 쉽게 알려 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래서 투덜거렸다.
"나도 그렸으니까, 알 권리 있잖아.”
“아이고, 이런 똑 부러진 말을 어디서 배웠나 몰라.”
리카르다가 바보 같은 표정을 지으며 헤실헤실 웃었다.
내가 그 정도도 모르는 바보처럼 보이나?
조금 전보다 더 뾰로통한 표정을 지으니 그가 놀리는 것을 그만두고 눈을 반짝이는 라그나르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일주일 동안 라그나르를 관찰했는데 걸린 마법이 모두 해지된 걸 확인했어. 그래서 모두와의 상의 끝에 만든 거야.”
"만들어?”
라그나르가 철창 밖으로 머리를 내밀고 싶다는 듯 앞까지 다가왔다.
자세히 보고 싶은 모양이다.
"복도와 이곳을 워프로 연결해 놓았어. 새로운 텔레포트 마법진이야.”
"텔레포트 마법진을 왜?”
라그나르의 목소리가 어두워졌다.
딸기를 먹으면서 눈을 반짝반짝 빛내더니 지금은 보랏빛 눈이 어둡게 가라앉아 있는 게 보였다.
텔레포트 마법진이 무엇인지 잘 아는 기색이었다.
어둡게 가라앉은 눈빛에서는 긍정적인 그 무엇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름다운 보라색이 분명한데 마치 검은색 물감을 떨어뜨려 탁하게 물들어 가는 그런 느낌.
나도 흠칫 놀랄 정도였다.
내 시선이 느껴졌는지 라그나르가 고개를 들었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몇 번이고 눈을 깜빡인다.
어느덧 눈은 맑은 보라색으로 돌아와 있었다.
“리카. 애들이 궁금해 하잖아.”
갑작스럽게 찾아온 침묵을 깨트린 것은 레녹스였다.
레녹스는 내 눈가를 가볍게 쓸어 주더니 나를 내려놓았다.
“가까이서 보는 게 좋겠지."
내 뺨을 쓰다듬는 레녹스의 손길을 느끼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라그나르가 창살 밖으로 조심스럽게 손을 꺼내더니 내 손을 슬쩍 잡았다.
손에서 느껴지는 차가운 느낌에 움찔하다가 꼭 잡아 주었다.
레녹스도 리카르다도 시선을 맞추기 위해 우리의 옆에 앉았다.
“날씨가 상당히 추워져서 다프네가 왔다 갔다 하기 힘드니까.”
리카르다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그렇다고 라그나르를 보러 가지 말라고는 할 수 없어서 워프로 연결해 놓기로 했어."
그 말에 라그나르의 눈이 동그랗게 떠지더니 갑자기 자신의 뺨을 거세게 때렸다.
짜악-!
“라그나르!”
성인 남성이 때렸다고 해도 믿을 만큼 큰 소리에 깜짝 놀랐다.
자신의 뺨이 붉어진 것은 신경도 쓰지 않은 채 라그나르는 마법진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꿈이 아니구나.”
떨리는 목소리에는 설렘이 가득했다.
“꿈이 아니래!”
“자”
“아직 자려면 멀었는걸."
나는 철창 안으로 손을 집어넣어 라그나르의 뺨을 살펴보았다.
붉게 달아올라 아파 보이는데도 뭐가 좋은지 실실 웃기만 하는 모습에 어처구니가 없었다.
"안 아파?”
“응. 오히려 너무 좋아!"
볼이 이렇게 빨간데 무슨.
뭐가 그리 좋다고.
차가운 얼굴 중 뺨만 열기를 머금으며 빨갛게 달아오른다.
다행이라 해야 할지 지금 내 손은 그의 뺨보다는 차가웠다.
라그나르의 뺨에 내 손을 대고서 문질문질하니까 시원하다고 또 웃는다.
“깜짝이야.”
레녹스가 뒤늦게 가슴을 쓸어내리더니 황급히 가방을 뒤적였다.
직접 만든 연고를 꺼내는 것이 보여 살짝 뒤로 물러났다.
라그나르는 금방 레녹스의 손길을 받아들였다.
약을 조심스럽게 펴 바르는데도 계속 좋다고 웃고 있다.
남자 주인공이 바보인 걸까.
문뜩 드는 걱정에 휙휙 고개를 저었다.
원작에서는 성격이 나빠서 여자 주인공과도 싸우다 정들었는걸.
이내 약이 다 발린 것을 확인하자 리카르다가 키득키득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렇게 좋아?”
"응! 다프네랑 더 오래 같이 있을 수 있잖아!”
겨울은 해가 빨리 지니 오래 있을 수는 없었다.
순수한 어린아이의 답에 레녹스가 어쩔 수 없다며 웃는 것이 보였다.
환하게 웃는 라그나르의 눈이 내게로 향한다.
마치 내 의중을 묻는 것 같아서, 휙 고개를 돌렸다.
'걸린 마법이 없으니까 안전하다고 생각해서 만든 마법진이겠지.'
내가 다리도 불편하고, 날씨도 추우니까 걱정돼서 생각해 낸 해결책일 것이다.
만나게 해 주는 것 그 이상으로 바라지도 않았는데.
어쩐지 가슴 한쪽이 따뜻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무어라 말로 표현해 주고 싶은데,입을 몇 번이고 달싹거리다가 꾸욱 다물었다.
입을 닫은 채 땅만 바라보니 누군가가 내 머리 위에 툭 하고 손을 올렸다.
그리고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끼익 소리가 날 정도로 어색히 고개를 드니 리카르다가 활짝 웃으며 내 머리를 열심히 쓰다듬고 있었다.
"다프네도 기뻐?"
부드럽게 접힌 눈매는 기대감을 품고 있었다.
옆에 있는 레녹스도 안 그런 척내게서 나올 답에 집중하는 것이 보였다.
나는 눈을 깜빡이다가 고개를 돌려 라그나르를 쳐다보았다.
반짝이는 눈이 어린아이의 천진난만함을 보여 주어서, 왠지 나도 용기가 났다.
그래서 말했다.
“기뻐.”
굉장히.
덧붙이지는 않았지만 충분했다.
리카르다는 갑자기 나를 껴안고서 귀엽다는 말을 해 댔고, 레녹스는 다행이라며 웃었다.
어린아이처럼 기뻐하는 그 모습에 묘한 흥분이 느껴지며 볼이 달아올랐다.
내가 뭐라고 이렇게 기뻐해 준담.
속으로 유난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조금 있다 퇴근할 엄마에게도 꼭 말해 주어야겠다고 결심한 것은 나 혼자만의 비밀이다.
집으로 돌아오니 엄마와 내 방을 연결 짓는 복도 사이에 마법진이 하나 그려져 있는 게 보였다.
내가 그린 것과 똑같이 생긴 마법진을 보는 기분은 조금 신기했다.
직접 만들어 낸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뿌듯함이 차오른다고 해야 하나?
괜히 마법진 곁을 떠나지 않으니 뒤에서 익숙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반가운 마음에 고개를 획 돌렸다.
"다녀오셨어요!”
엄마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익숙하게 팔을 벌렸다.
나 또한 따라 하듯 팔을 벌려 그녀의 품에 안겼다.
“우리 아가가 오늘은 어떤 하루를 보냈을까.”
“엄마가 내준 숙제도 하고, 동화책도 읽어 보고, 라그나르랑도 놀고, 선물도 받았어요!"
뒤늦게 생각난 선물에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이야기하다가 훈훈한 미소로 바라보는 엄마를 마주 보며 웃었다.
“선물, 고맙습니다.”
“후후.”
엄마가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자신의 뺨을 톡톡 두드렸다.
무슨 뜻인지 몰라 눈을 껌뻑이며 바라보자 뺨에서 쪽 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 정도는 돌아올 줄 알았는데?”
입술이 닿은 뺨이 간질간질했다.
괜히 뺨을 문지르며 모른 척해도 엄마는 그 상태로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해 주지 않으면 내려 주지 않을 거라는 듯 뺨을 슬쩍 내미는 것에 내가 휙휙 주위를 둘러보았다.
'레녹스도 리카르다도 없어.'
누가 올 새라 재빠르게 입술을 쭈욱 내밀었다.
촉- 하고 가볍게 닿는 소리와 함께 꺄르르 소녀처럼 웃는 엄마의 웃음소리.
뒤늦게 몰려오는 부끄러움에 엄마의 품에 고개를 묻으니 그녀가 나를 다시 한번 안전하게 품으로 끌어안았다.
“뽀뽀는 레녹스랑 리카르다에게 비밀이에요.”
품에 얼굴을 묻은 채 중얼거리는 말을 용케 들었는지 엄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귀엽기도 하지.'라며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었지만 못 들은 척 고개를 돌려 다시 마법진을 쳐다보았다.
다시 봐도 신기했다.
엄마도 나를 따라 시선을 옮기더.
니 마법진이 만들어진 배경을 설명해 주었다.
“레녹스가 제안했고, 내가 지원해 줬고, 리카르다와 다프네가 만든 거니 의미가 있겠구나.”
복도에 그려진 마법진은 엄마의 방에 있는 것처럼 인식된 자만이 드나들 수 있다고 설명이 덧붙여졌다.
그 말을 들으며 1층으로 내려가니 모두가 기다리고 있는 것이 보여 푸스스 웃었다.
* * *
식사도 맛있게 먹고, 가족끼리다 같이 시간을 보내고 나니 깜깜한 밤이 찾아오는 것은 금방이었다.
나는 졸린 눈을 비비며 침대에서 스르륵 일어났다.
조금씩 들리던 소음들도 밤이 오자 사라졌다.
벽에 걸린 시계를 보자 벌써 자정이 다 된 것이 보였다.
엄마의 자장가는 너무 따뜻해서 잘못하면 정말로 잠들 뻔했다.
'오늘 같은 날 일찍 잘 수는 없잖아.'
라그나르에게로 갈 수 있는 마법진이 만들어졌다는 것은 나 혼자서도 몰래 나갈 수 있다는 뜻.
앞으로는 몰래 둘이서 시간을 보낼 수도 있을 테니….
집이 조용해진 지 30분이 지났으니까 들킬 리는 없을 것이다.
나는 몸을 조심스레 움직여서 침대 옆에 있는 휠체어에 앉았다.
'이제는 혼자서도 잘 타고 다닐 수 있는걸.'
다행스럽게도 소음 하나 없이 훌륭한 휠체어는 내 계획에 잘 동참해 주었다.
방문도 소리 없이 부드럽게 열렸다.
조금 더 움직이자 마법진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나는 침을 꿀꺽 삼키고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혹여 침을 삼키는 소리가 날까봐 숨조차 꾹 참은 채 휠체어를 밀었다.
마법진 위에 올라가 살짝 빛이 났을 때 작게 중얼거렸다.
“이동할래.”
목소리에 반응했는지, 아니면 나라는 존재에 반응했는지는 몰라도 마법진에서 나온 마력은 금방 나를 감쌌다.
사아아~ 하고 바람이 지나가는 소리가 들린다.
꼭 감고 있었던 눈을 뜨고, 주위를 살펴보니 숲에 도착한 것을 알수 있었다.
감옥 옆에 있는 전등은 불이 꺼진 채 깜깜했다.
잠깐만.
생각해 보니 라그나르가 잘 수도 있는데.
따로 만날 수 있다는 사실에 들떠서 가장 기본적인 것을 까먹다니.
바보 같아.
불도 꺼져 있으니 자는 게 분명했다.
'깜깜해.’
철창 안의 까만 어둠이 마치 나를 잡아먹을 것처럼 넘실넘실 다가왔다.
'어두운 건 싫어.’
나는 괜히 휠체어를 꽉 쥐고서는 덜덜 떨리는 손을 진정시키려 했다.
그 순간 어둠 속에서 보랏빛 무언가가 반짝였다.
까만 공간 속에서 마치 보석처럼 빛나는 그 보라색은 마치 나를 끌어당기는 것같이 아름다웠다.
그 순간 달을 가려 주고 있던 구름이 바람과 함께 떠나기 시작했다.
은은하게 비춰 오는 달빛 아래 철창 안의 모습이 드러났고.
우습게도 하늘에 높이 떠 있는 달보다도 아름다운 보라색은 나를 사로잡아 버렸다.
말로 꺼내지 않고서는 도저히 못버틸 것 같아 입이 자연스럽게 열렸다.
"예쁘다.”
그렇게 꺼낸 말에 라그나르가 눈을 깜빡이더니 방긋 웃었다.
낮에 마법진을 보았을 때처럼 환하게 웃은 그는 마치 나를 따라 하듯 말했다.
“다프네가 더 예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