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화.
우리를 비춰 주는 달빛이 언제 다시 구름 뒤로 숨을지 모른다.
언제고 다시 암흑이 찾아올 수 있겠지만 왠지 괜찮을 것 같았다.
나는 숨을 들이켜고서는 천천히 휠체어에서 내려갔다.
내가 철창 앞에 앉자 라그나르가 담요를 가져와 내게 건네주었다.
“나도 덮어 주고 싶은데….”
철창 밖으로 나올 수 없으니 주는 게 한계일터.
뭐가 그리 속상한지 시무룩한 것을 보여 주는 듯 눈썹이 아래로 추욱 내려갔다.
“난 괜찮아.”
“다프네는 아프잖아. 아픈 건 싫어.”
아픈 건 난데 왜 자기가 아픈 것처럼 인상을 찌푸리는 걸까.
라그나르의 눈가가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그 눈가를 가볍게 쓰다듬어 주었다.
“안 아플게.”
약속도 아닌 그저 흘러나오는 말에도 라그나르가 좋다며 웃는다.
‘웃음이 헤프잖아..'
남자 주인공이 이래도 되는 걸까.
조금 걱정이 들기는 하지만….
나는 모르는 척 그의 눈가를 더 만져 주다가 주섬주섬 담요를 덮었다.
확실히 저녁은 어쩔 수 없이 낮보다 쌀쌀했다.
“몰래 온 거야?”
“응.”
“왜? 내가 보고 싶어서?"
이런 말은 또 어디서 배웠지.
리카르다에게 배운 게 분명하다.
그렇다고 말하려 입을 열려다가 꾹 닫았다.
“그냥 왔어."
“그냥?"
“오고 싶은데 이유가 필요해?"
내 말도 안 되는 소리에 그가 그건 그렇다며 고개를 끄덕인다.
“실은 이거 주려고 왔어."
휠체어 옆에 걸어 두었던 보온병을 보여 주자 그가 밝게 웃는다.
“코코아?"
"응, 코코아.”
낮에 안 마시고 몰래 숨겨 놨었다.
보온병에서 찰랑이는 소리만 나도 그는 행복해 보였다.
"마실 거지?"
“다프네는?"
"나는….”
잠시 머뭇거렸다.
말해도 되지 않을까.
생각을 해 보다가 이게 뭐라고 비밀인가 싶어 그냥 입을 열었다.
“난 코코아 싫어.”
그 말에 충격받은 표정은 음, 솔직히 그림으로 남기고 싶을 만큼 웃겼었다.
* * *
호로록하는 소리가 조용한 숲을 울렸다.
우리는 철창을 사이에 두고서 발을 가까이 붙였다.
커다란 담요의 한쪽은 내 몸을 감싸고 있었고 다른 한쪽은 마주댄 우리의 발을 덮고 있었다.
담요 아래 발가락이 꼼지락꼼지 락거리는 것이 보였다.
호호 불어 가며 마시는 코코아가 참 맛있는지 라그나르의 발가락이 신이 났다.
'이렇게 함께 지내다 보면 내게 더 의지하겠지?'
낮에는 매일 찾아와 놀이 상대도 해 주고, 밤에는 몰래 찾아와 맛있는 것도 가져다준다.
'싫어하기 힘들어질 거야.'
좋아, 계획에 한 걸음 가까워진 기분이다.
혼자 고개를 끄덕끄덕하다가 앞에서 들리는 호로록 소리에 저절로 라그나르에게로 시선이 향했다.
“맛있어?”
"응!"
내 질문에 라그나르는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온몸으로 표현하고 싶은데 손은 보온병을 쥐고 있고, 발은 담요에 덮여 있어서 움직일 수 있는 머리로 최대한 표현하려는 것 같았다.
"안 달아?"
“?"
“이게 달아?
오히려 되돌아오는 질문에 할 말을 잃어버렸다.
내 입에는 엄청 단데, 라그나르의 입에는 괜찮나 보다.
그럴 수 있지.
그럼에도 괜히 나도 모르게 심통이 났는지 새침한 목소리가 나와버렸다.
"나는 단 거 싫어.”
“…나, 나도 싫어!"
그 말에 어처구니가 없어졌다.
마실 때 그 누구보다 눈을 반짝 반짝이면서 마시면서.
그리고 무엇보다….
“입가에 묻은 것부터 닦고 이야기해.”
내 지적에 황급히 옷소매로 입가를 북북 닦는다.
거의 옷을 찢어 버릴 기세였다.
그 모습이 재미있어 작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큭큭 하고 작게 웃는 소리에 그가 하던 행동을 멈추었다.
닦는 것도 잊은 채 빤히 바라보는 시선에 눈싸움에서 지지 않으려고 꿋꿋이 피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드물게 그가 먼저 질문을 꺼냈다.
"다프네는 왜 단 게 싫어?"
질문 놀이는 아니었다.
갑자기 피어오른 호기심인지 그의 눈은 반짝이고 빛이 났다.
나는 잠시 그의 눈을 바라보다가 이게 뭐 별건가 싶어 입을 열었다.
"단 걸 먹으면 너무 달아서."
“응, 달아서?"
"나까지 함께 녹아 버릴 것 같아 무서워.”
내 현실을 잊어버릴 정도로 달콤해 버리면 살아 나가고자 하는 의지가 없어지는 것 같잖아.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에 작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조금 전 내가 웃은 것과 같은 소리에 시선을 마주치니 그 눈빛이 좀 이상했다.
“그 눈빛은 뭐야?"
“아니, 아기 같아서? 귀여워서?"
라그나르가 어색한 표정으로 말을 꺼냈다.
어린애한테 어린애 취급당해 버렸다.
갑자기 창피함이 몰려와 얼굴에 따끈한 열기가 맴돌았다.
분명 부끄러움에 얼굴이 발갛게 물들어 있을 것이다.
“…나 갈래.”
"아, 아니 가지마."
당황한 그가 보온병을 내려놓았다.
라그나르는 그 좋아하는 코코아에 시선도 주지 않고 내 손을 꼭 잡았다.
"내가 녹아내리지 않도록 꼭 붙잡아 줄게!”
“…진짜 녹지는 않아, 바보야."
투덜거리는 말투에도 뭐가 좋은지 싱그럽게 웃는다.
분명 지금은 겨울인데 라그나르는 꼭 봄에 피어나는 귀여운 꽃과 같은 미소를 잘 지었다.
“다프네가 날 믿어 줬으니까, 계속 옆에서 지켜 줄 거야.”
그가 제법 멋진 대사를 힘차게 던졌다.
이런 것을 보면 남자 주인공 같다는 느낌이 확실히 와닿는다.
나는 괜히 손을 꼼지락꼼지락하다가 함께 마주 잡았다.
저렇게 얘기를 해 주는데 거절할 수는 없으니까.
맞잡은 손은 차가웠지만, 우습게도 속은 따스해져서.
그 순간이 꽤 즐겁다고 생각했었던 것 같다.
* * *
겨울은 찬바람을 몰고 오기도 하고, 갑자기 따뜻한 바람을 데리고 오기도 했다.
날씨는 들쭉날쭉했지만 마법 아래에 있는 집과 숲은 언제나 따사로웠다.
여느 날처럼 우리는 숲에 놀러 갔다.
라그나르는 가끔 무언가를 하는 듯 손을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물론 내가 없을 때.
내가 있을 때면 황급히 그것을 숨기고 내 손을 잡고서 놀기 바빴다.
'그러고 보니 요새는 질문 놀이를 통 안 했네.'
밤마다 몰래 나오는 산책에서 사소한 것들을 물어보고 나니 자연스럽게 하지 않게 됐달까.
이곳에 온 지 벌써 두 달이 지났고, 라그나르를 만난 지도 한 달이 넘어간다.
“곧 겨울도 끝나겠다.”
찬바람이 횡횡 부는 것이 보이는데?
내 시선에 레녹스가 빙긋 웃었다.
“서서히 풀이 올라오고 있는걸보니 곧 봄이 올 거야.”
"그 전에 새해가 오지 않을까?"
며칠만 지나면 한 살 더 먹는다고?
리카르다의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에 그동안 궁금하지 않았던 것이 갑자기 떠올랐다.
“레녹스랑 리카르다는 몇 살이야?”
“나는 열다섯 살, 형은 열일곱살.”
내 질문에 라그나르가 고개를 돌려 둘을 쳐다보았다.
"어른인 줄 알았는데."
라그나르의 시선이 리카르다에게 향해 있었다.
“꼬맹이, 너보다 크다고 다 성인은 아니다?”
확실히 리카르다가 나이에 비해 크기는 했지만, 성인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레녹스는 조금 그리 보이지만.
내 시선에 이해한다는 듯 리카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형이 키가 크지.”
“작은 것보다는 낫지. 언제 클래?”
분명 나이 이야기였는데 갑자기 둘이 투닥거린다.
“또 싸운다.”
“이제 익숙해.”
라그나르랑 내가 어떻게 쳐다보는지도 모르는지 둘은 나이랑 키, 힘 등을 꺼내며 말다툼을 멈출 줄 몰랐다.
주먹다짐하지 않는 게 다행이지.
라그나르는 그 모습을 구경이라도 하는 듯 웃는데 갑자기 인상을 찌푸렸다.
“왜 그래?”
무슨 일인가 싶어 물으니 그가 휙휙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서 손을 감추는 것을 보고 내가 황급히 그의 손을 끌어왔다.
손을 움켜쥐자 그가 윽 하는 소리를 내뱉는다.
황급히 소매를 걷어 올리니 손목아래로 크게 상처가 난 것이 보였다.
“이게 뭐야? 언제 다쳤어?”
작은 소란에 레녹스와 리카르다도 싸우는 것을 멈추고서 다가왔다.
"별거 아닌데.”
라그나르가 다시 상처를 숨기려고 해 봤자 레녹스의 손길이 더 빨랐다.
익숙하게 상처를 살펴본 그가 깨끗한 수건을 가져와 물에 적셔 상처 주변에 묻은 피를 닦아 주었다.
그러고 보니 리카르다가 그릇 하나가 빈 것 같다고 했는데, 혹시 그걸 깨트려서 치우다 다친 걸까?
따끔한지 자꾸 인상을 찌푸리는 것에 물었다.
“이렇게 아픈데 왜 말 안 했어."
“말하면 혼날까 봐….”
"아픈 건 싫다고 그랬잖아.”
자기 입으로 얘기했으면서.
내 말에 라그나르가 고개를 푹숙였다.
“아픈 건 싫지만, 이렇게 하면 흉터가 생기니까 괜찮지 않아?”
“흉터가 생기는 게 왜 괜찮아?"
이해할 수 없는 말에 되물으니 라그나르가 눈치를 본다.
나는 라그나르의 고개를 들어 올려 두 눈을 마주쳤다.
그 시선에 이기지 못한 채 라그나르는 입술을 몇 번이고 달싹이더니 입을 열었다
"이 정도 가지고 아파하면 안 되니까. 그리고 흉터는 남자의 상징이라고 오히려 훈장으로 여기라고, 자랑스러워하랬어.”
“…누가?”
“.......”
이어지는 질문에 말이 없었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그 상대들이 누구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널 때리던 사람들이 그랬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에 화가 났다.
왜 그걸 당연시하는 거야.
당연히 잘못된 일인데, 왜.
왜.
거부라도 하지. 바보같이.
사실은 그 상황에서 반항하기가 쉽지 않다는 걸 나도 알고 있었다.
나도 겪어 봤는걸.
반항하면 더 맞고, 더 괴롭힘당하는 것을.
'그래도, 그래도.…!"
무어라 말해 주고 싶은데 굳게 다문 입은 달싹일 뿐이었다.
나는 숨을 크게 들이 내쉰 뒤 어느덧 치료가 끝난 손을 조심스레 붙잡았다.
“그건 헛소리야. 여자든, 남자든 흉터가 생기면 다치는 거고, 아픈 거니까 훈장으로 삼지 마.”
“왜?”
"…주변 사람들이 속상하단 말이야."
그 말에 라그나르가 눈을 깜빡이더니 울먹이는 소리로 물었다.
“…다프네도 속상해?"
“응, 속상해.”
그래, 나는 지금 속상했다.
바보같이 웃는 아이가 이렇게 당연하게 폭력을 받아들이는 것이..
남이 아픈 것을 걱정하면서도 자기가 아픈 것은 참고 삼키려는 것이.
너무 속상해서 눈물이 흐를 것 같았다.
“이제부터 이런 거 안 숨긴다고 약속해.”
"알겠어.”
조금 전까지 아무렇지 않게 아픔을 참았으면서, 또 바보같이 웃는다.
내가 자신을 걱정했다는 것이 못내 기쁜 듯했다.
멍청하고, 바보 같은 게 웃음만 많아서.
그래서인지 몰라도 조금 불안해졌다.
'과연 내가 얘를 버릴 수 있을까.'
차올랐던 확신이 조금씩 가라앉는다.
두렵지만 그럼에도 잡은 손은 놓고 싶지 않았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래, 그냥 그러기 싫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