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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딸로 태어났다-28화 (28/185)

제28화.

하늘에 어둑한 구름이 잔뜩 꼈다.

달마저 구름 속으로 숨어 버린 밤, 이런 날은 나가기 더 무서웠다.

그럼에도 나는 몰래 침대 밖을 나서 여느 때처럼 라그나르에게로 향했다.

낮에 그의 상처를 봤기 때문일까.

이렇게 어두운 날 그를 혼자 있게 놔두고 싶지 않았다.

깜깜한 밤, 그리고 차가운 감옥, 그 안에 어두운 라그나르.

라그나르는 나를 보더니 언제나처럼 방긋 웃었다.

낮의 일은 말끔히 잊어버린 모습이 괜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오늘도 왔네?”

안 올 줄 알았어.

그 말에 나는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익숙하게 맞은편에 앉았다.

괜히 심통이나 무어라 말하기 싫었지만, 그렇다고 이 조용한 분위기가 좋은 것은 아니었다.

“왜 안 올 줄 알았는데?"

“그냥. 그럴 것 같았어.”

투덜거리는 목소리에도 라그나르의 보랏빛 눈이 반짝이며 빛이 났다.

어둡고 깜깜한 이곳을 버틸 수 있게 해 주는 유일한 색.

깊이를 알 수 없는 반짝이는 눈빛은 복잡한 마음을 천천히 가라 앉혀 주었다.

"오늘은 오래간만에 질문 놀이를 해 볼까?”

라그나르가 궁금해졌다.

이 이상 선을 넘으면 안 될 것 같았지만, 그래야만 이 답답한 마음이 풀릴 것 같았다.

"내 이름은 라그나르."

“내 이름은 다프네."

오래간만에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두 눈을 마주쳤다.

"다프네가 먼저 물어봐.”

“라그나르가 있던 곳은 어떤 곳이었어?”

엄마도, 레녹스도, 리카르다도 굳이 내게 자세히 말해 주지 않았다.

가볍게 넘어가야 하는데, 그런 모습을 보니까 넘어갈 수 없잖아.

힐끗 쳐다본 라그나르의 팔에는 낮에 감은 붕대가 돌돌 말려 있었다.

아파도 아프다고 말할 수 없는 곳, 무기나 마법은 알아도 꽃은 알려 주지 않는 곳.

아무렇지 않게 어린아이를 암살자로 키우는 곳.

그리고 라그나르가 무서워하는곳.

“내가 살던 곳은….”

시작되는 답에 고개를 드니 낯선 표정이 보였다.

지금껏 보여 주었던 순진무구한 아이의 표정과는 다르게 정말 괴롭고, 슬퍼 보였다.

“무서운 곳이었어."

“…얼마나?”

“언제나 사람들의 비명 소리가 가득했고, 나를 괴롭히고, 싫어하는 사람들이 많았어.”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두려운지 대답해 주는 고개가 천천히 아래로 수그러들었다.

“때리는 것도 쉬운 곳이었고, 죽이는 것도 쉬운 곳이었어.”

나지막이 들려오는 목소리에 가득 담긴 것은 두려움.

담요 아래 보이는 작은 손이 달달 떨리고 있는 것이 보여 그 손을 슬며시 잡았다.

차가운 라그나르의 손과 내 손이 맞닿았고, 그는 숙인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형을 만나고 싶으면 사람들을 죽이랬어. 싫다고 하니까 내게 마법을 걸었어.”

".......”

“그리고 말을 안 들으면 나를 때렸어. 도망가고 싶어도 가지 못하게 막았어.”

천천히 흘러나오는 말은 차마 듣기 힘들 정도로 끔찍했다.

라그나르의 말은 내 보육원 시절을 떠올리게 했다.

이유 없이 학대를 받으며, 많은 이들에게 조롱당하고, 이 세상에서 살아갈 의미가 없게 느껴지는 그 순간을.

“가끔은 그냥 죽어서 엄마랑 아빠를 만나러 가고 싶었어.”

남을 죽일 수는 있지만, 자신은 죽을 수 없었다는 말에 나는 입술을 앙 깨물었다.

입술을 물지 않으면 참고 있는 화가 와락 터져 나올 것 같았다.

라그나르는 나를 보더니 평상시내게 보여 주는 것처럼 밝게 웃었다.

“그런데 그런 곳에서 나를 구해 줬어.”

"......."

“다프네가.”

말문이 턱 막혔다.

나는 목적이 있어서 너를 이용하는 건데.

그리고 가차 없이 너를 다시 버릴 건데.

나도 모르게 눈에 가득 차오르는 눈물은 조절조차 할 수 없었다.

라그나르는 손을 들어 그렁그렁매달린 내 눈물을 부드럽게 훔쳐주었다.

“그러니까 나는 이제 괜찮아. 다 프네가 나를 구해 줬으니까, 내 옆에 있어 주니까.”

어째서 신은 이렇게 우리에게 가혹한 걸까?

다시 울컥 차오르는 눈물에 결국 참지 못하고 눈물이 또르륵 하고 흘러내렸다.

우는 것은 난데 오히려 라그나르가 더 아픈 사람처럼 표정을 구겼다.

“지금은 철창이 너무 밉다. 나도 레녹스랑 리카르다처럼 다프네를 안아 주고 싶은데.”

나는 참지 못하고 고개를 푹 떨구었다.

차마 무어라 말을 이어 가지도 못하겠고, 그냥 내가 너무 이기적 이어서.

진짜로 내가 나쁜 사람이 되어가는 것도 무서웠고, 나를 생각해 주는 사람에게 못된 생각을 품는 것도 싫었다.

“그럼 이제 내 차례지?"

"응. 물어봐.”

라그나르가 천천히 숙여진 내 고개를 위로 올렸다.

우리는 다시 눈이 마주쳤고, 라그나르의 눈 안에는 울고 있는 내가 보였다.

라그나르는 다시 조심스러운 손길로 눈물을 닦아 주며 물었다.

"다프네는 왜 나를 무서워해?”

“…무서워하지 않아.”

“그럼 다시 물어볼게. 왜 밤에 만나는 나를 무서워해?"

아.

갑자기 정곡을 찌르는 질문에 입을 벙긋거렸다.

아니라고 답을 해 줘야 할 텐데.

“다프네.”

“응.”

“어두운 게 무서워?"

언제부터 눈치를 챘던 걸까?

긴장으로 굳어져 있던 몸에 힘이사르르 풀렸다.

정곡을 찔리고, 거짓말할 타이밍마저 놓쳤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솔직해지는 것뿐이었다.

"응, 무서워.”

“왜 무서워?”

"어둠은 날 싫어하고, 나를 잡아먹으려고 하니까.”

손을 둥글게 말아 꽉 쥐었다.

바들바들 떨리는 손을 애써 숨기며 말을 이어 갔다.

“내가 도망치지 않으면 언젠간 어둠이 나를 잡아먹을 것 같아서.

그래서 무서워. 그리고….”

“그리고?"

“나를 매정하게 버린 친아빠도 어두운 색을 가지고 있었어.”

애써 아니라고 부정하고 싶어도 그럴 수 없었다.

나를 버린 아버지의 색도, 나를 죽이려고 들었던 숲도, 나를 쳐다보는 사람들의 시선도 어둠이 가득한걸.

그들이 지금은 내 앞에 없다는 것을 알지만 어두운 색만 보면 본능적으로 두려움이 느껴지는 건, 라그나르를 바라봐도 마찬가지였다.

단둘이 있을 시간을 마련하기 위해서 이 밤중에 용기를 냈다지만 언제나 가슴 한쪽은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어두운 숲도 싫었고, 감옥 안의 깜깜함도, 그리고 그곳에 스며든 라그나르도 모두 무서웠다.

“라그나르의 까만 머리카락은 너무 어두우니까. 그래서 나도 모르게 그랬어.”

상처가 될 말이지만 한 번 터진 입은 멈추지 않았다.

그 누구에게도 쉽게 말할 수 없었던 내 두려움을 라그나르에게 꺼내게 될 줄은 몰랐는데.

"하나만 더 물어봐도 돼?"

“…응.”

원래라면 서로 하나씩 물어봐야겠지만 미안한 마음에 그러라 고개를 끄덕였다.

“다프네의 아빠는 왜 다프네를 버렸어?"

“…내가….”

얼핏 눈앞에 스치는 어머니의 마지막 모습이 아른거렸다.

나를 경멸 가득한 눈으로 쳐다보는 괴물 같은 사람들도. 나를 내쳐 버린 친아빠의 커다란 그 손도.

금방이라도 나를 죽이려고 드는 시선이 다시금 느껴져 몸이 두려움에 떨려오기 시작했다.

내가 그런 취급을 받아 온 단 하나의 이유.

"내가… 악녀의 딸이라서."

"......."

“우리 엄마가 악녀여서, 그래서, 그래서….”

이제는 터져 나오는 눈물을 참기가 너무 힘들었다.

“악녀의 딸은 죽어야 한다고 해서….”

“아니야.”

“…라그나르.”

울먹울먹, 눈물에 가려져 시야가 흐릿했다.

몸이 뜨거워지는 것 같기도 했고, 핑글핑글 도는 것 같기도 했다.

라그나르를 제대로 보고 이야기하고 싶은데, 내 눈을 가린 눈물 때문에 보이지 않으니 더 서러웠다.

"다프네는 죽을 만큼 나쁜 사람이 아닌 걸.”

“하지만 모두가 그랬는걸…."

“그럼 내가 너를 지켜 줄게!”

라그나르가 조금 전 내가 했었던 것처럼 내 손을 꽉 잡았다.

조금 큰 손이 내 손에 덮였다.

차게 식은 손이건만 얼핏 온기가 느껴지는 듯도 했다.

그의 손길에 안심이 되는 것은 왜일까?

“모두가 다프네를 미워해도, 나는 다프네를 좋아할게! 그리고 내가 지켜 줄 거야!"

“…내가 악녀의 딸이어도 지켜 줄 거야?”

“다프네가 누구든 상관없어! 다 프네는 나를 구해 줬으니까!"

흐릿한 시야 너머로 빙긋 웃는 입꼬리가 얼핏 보였다.

“그러니까 이제는 내가 다프네를 지켜 줄래.”

“........”

“그래도 돼?”

이게 뭐라고 허락까지 받아.

우는 와중에도 왜인지 모르겠지만 작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작은 웃음소리는 또 어떻게 들었는지 라그나르도 나를 따라 헤헤거리며 웃었다.

"응, 그래도 돼.”

"내가 레녹스랑 리카르다보다 더 먼저 지켜 줄 거야.”

“응, 응.”

어전지 이 순간은 우리를 감싼 어둠이 무섭게 느껴지지 않았다.

“또 궁금한 것 있어?"

불어오는 바람 때문인지 몰라도 으슬으슬 추위가 느껴졌다.

볼에서 열기도 느껴지는 게 인제그만 들어가서 자면 좋겠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놀이가 금방 끝날 줄 알았는데 라그나르도 나처럼 궁금한 점이 많았나 보다.

“지금 가족은 진짜 가족이 아니야?”

“응. 하지만 내 가족이야.”

같은 피가 흐르지 않아도 느껴지는 걸.

내게 쓰인 악녀의 딸이라는 틀을 신경 쓰지 않고 나를 먼저 받아 준 소중한 사람들.

그리고 나를 소중히 여겨 주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을 가족이라고 표현하지 않으면 무어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떠오르는 것만으로 자연스럽게 미소가 지어졌다.

내 웃음에 라그나르는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가 확 얼굴을 붉혔다.

“왜 그래? 추워?”

빨개진 볼이 신경 쓰여 손을 들어 쓰다듬어 보는데 라그나르가 휙휙 고개를 돌렸다.

격한 반응에 놀라 손을 뒤로 물리자 그가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렇게 웃는 것 처음 봐!”

“…웃는 거 어려워.”

“이렇게 웃으면 돼.”

라그나르가 따라 하라는 듯 자신의 입꼬리를 위로 끌어 올렸다.

억지로 끌어 올려진 입꼬리가 바들바들 떨리는 것이 보였는데 왜인지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하하하.”

고작 웃음소리에 뭐가 그리 신나는지 라그나르는 나만큼 즐거워 보였다.

“…있지 다프네.”

“응?”

“나는 다프네의 가족이 아니잖아."

그건 그렇지.

맞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자 라그나르가 조금 부끄러운 듯, 그러면서도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그럼 나는 다프네의 친구야?"

친구… 일까?

나와 라그나르에 대해서 무어라 정의를 내려 본 적이 없기에 쉽게 입을 열기 어려웠다.

새로 태어나고 친구를 사귀어 본적이 없어서 헷갈렸다.

맞든, 아니든 답을 해 줘야 할 텐데 갑자기 무언가가 목을 막는 듯 숨이 쉬기 힘들어졌다.

“허억."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 오고, 온몸이 한기가 드는 듯 덜덜 떨려 왔다.

숨을 거칠게 내뱉어도 숨쉬기가 어려워 저절로 목을 감쌀 수밖에 없었다.

"다프네! 다프네!”

라그나르가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지만 답할 수가 없었다.

그 삐-과

그 순간 삐- 하는 이명과 함께 나는 몸을 추스르지도 못하고 앞으로 고꾸라져 버렸다.

의식을 잃는 것은 금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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