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화.
달조차 구름 뒤로 숨어 잠에 빠진 새벽.
갑자기 위층에서 우당탕하고 커다란 소리가 들렸다.
갑작스러운 소음에 리카르다는 놀라 잠에서 깨어났다.
"이게 무슨 소리지?"
리카르다는 억지로 깨어난 것에 짜증이 나 미간을 찌푸리면서 책상 위에서 일어났다.
"아, 이런.”
다프네를 위해서 치료 마법을 연구하던 도중 깜짝 잠이 든 모양이었다.
뺨에 붙은 종이를 떼어 내고서는 그는 눈을 비볐다.
앞이 흐릿해 우선 안경을 집어 썼다.
시야가 또렷해지는 그 순간 다시 한번 위층에서 커다란 소음이 들려왔다.
마치 무언가 바닥을 때리는 느낌에 리카르다는 옷을 추스르고서 방문을 열었다.
리카르다가 방을 나서자마자 본것은 의문에 찬 표정으로 나오는 레녹스였다.
“형, 이게 무슨 소리야?"
"갑자기 위층에서 들렸어. 마법에 이상은 없고?"
레녹스의 물음에 리카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법이 파괴되지는 않았다.
레녹스는 긴장 어린 표정으로 위를 올려다보았다.
"올라가자.”
“응.”
위층에는 어머니와 다프네의 방이 있다.
혹시 다프네가 자리에서 일어나다가 실수로 떨어진 것이 아닐까 싶어 둘은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어머니!”
다행이라 해야 할지 클로에는 별 이상 없어 보였다.
다만 그녀의 표정은 굉장히 심각했다.
혹시 다프네에게 문제가 있는 건가!
레녹스와 리카르다는 황급히 계단을 타고 올라갔고, 그곳에서 전혀 예상치 못한 모습을 보았다.
"다, 다프네가… 다프네가.….”
검은 머리의 소년이 두 눈 가득 고인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복도 아래 마력을 머금은 마법진, 그리고 그 위에서 울고 있는 라그나르와 품에 안긴 다프네.
셋은 갑작스러운 이 상황에 당황한 듯 멈칫했지만 바로 정신을 차렸다.
“이리로!”
클로에가 황급히 팔을 벌렸고 라그나르는 망설이다가 다프네를 넘겨주었다.
"몸이 엄청 뜨거워!"
다프네의 얼굴은 뜨겁게 달아올라 있었고, 숨쉬기도 힘든지 헐떡이며 숨을 내뱉고 있었다.
클로에는 다프네의 이마에 손을 올려 보았고, 뜨겁게 느껴지는 열기에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열이 심하게 나는 것 같으니 우선….”
병상에서 일어난 지 얼마나 됐다고 또….
클로에는 말을 이을 필요도 없다는 듯 바로 발걸음을 옮겼다.
클로에는 힘이 빠진 채 축 늘어진 다프네를 바로 안아 들고서 라그나르를 지나쳤다.
라그나르는 울먹이면서 클로에를 바라보다가 훌쩍이는 눈물을 참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낮까지는 멀쩡했었는데 갑자기 아픈 건가."
레녹스가 중얼거리다 약을 가져오기 위해 다시 아래로 내려갔고, 리카르다는 쓰러져 있는 라그나르를 부축해 주었다.
“괜찮아?"
라그나르는 간신히 눈물을 멈추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요 며칠 동안 다프네가 아침잠이 늘었다 싶더니.’
리카르다는 나오려는 한숨을 삼키고서는 라그나르를 살펴보았다.
라그나르 또한 상태가 멀쩡해 보이지는 않았다.
허락되지 않은 자가 마법진을 넘어온 탓이었다.
라그나르가 넘어가는 것을 원치 않은 마법이 그를 공격했다.
어떤 공격을 당했는지 몰라도 옷의 많은 부분이 불타 있었고, 피부에 작은 생채기가 난 것도 보였다.
“우선 다른 곳으로 가서 얘기하자.”
리카르다는 라그나르를 데리고서 방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자신이 지금까지 보았던 라그나 르라면 이 눈물이 거짓은 아닐 테니까.
당연히 일어날 것이라는 반응과는 다르게 라그나르는 고개를 격하게 저었다.
"다프네가 쓰러졌으니까…. 일어날 때까지만… 여기 있으면 안 돼요?”
보라색 눈에 담긴 눈물은 투명했고, 또 서러워 보였다.
"다시 감옥으로 가자는 게 아니야. 우선 네 상처도 좀 치료해야 하니까 다른 방으로 들어가자는 거야.”
리카르다는 라그나르가 무슨 오해를 했는지 단박에 알아차렸다.
"애초에 스스로 빠져나온 감옥으로 데려갈 생각도 없는걸.”
하지만 그 말에도 라그나르는 고개를 저었다.
“다프네 옆에 있을 거예요.”
그전까지는 치료도 하지 않겠다는 듯 완강한 거부를 하는 것에 리카르다가 참지 못하고 몸을 움직였다.
“으쌰.”
그리고 라그나르를 들어 올렸다.
‘오, 확실히 다프네에 비교하면 무거운데.’
이렇게 안아 볼 일이 없었기 때문에 조금 생소한 느낌이 들었다.
다프네에 비하면 확실히 많이 묵직한 느낌이었다.
생각보다 무거운 것에 조금 놀라 는데 라그나르 또한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우선 치료부터 받고 상황에 관해 이야기해 줘야지."
“하지만 다프네가 저렇게 아픈데!”
리카르다의 완고한 반응에 라그나르는 조금 분한 듯 호기롭게 내뱉었다.
“고작 이 정도 상처는 별것도 아닌데.”
“고작 이 정도 상처에도 다프네는 걱정할 거야.”
자기 때문에 치료 못 받았다고 속상해 할지도 몰라.
이어지는 그 말에 라그나르가 입을 꾹 다물었다.
삐죽 튀어나온 입은 불만이 있지만 받아들이겠다는 반응으로 보였다.
“나도 걱정돼서 죽겠어. 그러니까 얼른 치료받고 다프네에게 같이 가자.”
“네.”
리카르다는 빠른 걸음으로 빈방에 도착했다.
작은 침대에 라그나르를 앉히고, 작은 생채기부터 큰 상처까지 모두 마법으로 치료하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치료하면서 묻는 말에 라그나르가 고개를 푹 숙였다.
이미 모든 상황이 보였기에 리카르다는 작게 미소를 지었다.
"마법진이 생긴 이후로 다프네가 밤마다 놀러 갔구나."
“......."
“그 밤중에, 우리 모두 잠들었을때.”
반박하는 말이 없는 것을 보니 자신이 예상한 것이 확실했다.
리카르다는 아이고 소리를 내뱉으며 무릎을 조금 낮춰 라그나르와 시선을 마주쳤다.
“화내는 거 아니야.”
"…내가 다프네랑 더 놀고 싶다고 그래서 그랬어요.”
“그건 다프네가 일어나 보면 알겠지.”
크게 앓고 일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밤바람을 그렇게 쇠니 분명 감기에 걸려 열이 들끓은 것이 분명했다.
다프네를 감싸 주려는 건지 몰라도 자기 탓으로 돌리는 것에 리카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보다 진작 감옥에서 빠져나올 수 있으면서도 계속 그 안에 가만히 있었던 건가.’
자신의 마법에 자신이 있었던 리카르다는 손수 보완한 그 튼튼한 감옥이 사실 아무 소용없었다는 사실을 아니 조금 맥이 빠졌다.
‘하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니까.'
리카르다는 다시 라그나르에게 손을 내밀었다.
“형이 다프네에게 약을 먹였을 거야. 가서 어떤지 지켜보자.”
"옆에 있어도 되… 나요?"
“되니까 데려가지."
리카르다가 별소리를 다 한다는 듯 씨익 웃었다.
그 미소에 안심이라도 했는지 라그나르가 쭈뼛쭈뼛 손을 잡았다.
이상하게도 무서운 어른 같던 리카르다가 형과 같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래, 무섭지 않았다.
제 탓도 하지 않았고, 다프네의 옆에도 있을 수 있게 해 주는 것에 어쩐지 라그나르는 눈물이 날 것 같았다.
하지만 울면 다프네가 속상해 할 거야.
자신도 다프네가 울면 속상했으니까.
라그나르는 눈물을 그쳤다.
다프네가 다시 일어났을 때 눈물어린 모습을 보여 줄 수는 없으니까.
* * *
몸이 너무 뜨거웠고, 누군가가 목을 틀어막은 듯 숨을 내뱉는 것도, 들이쉬는 것도 너무 아파서 괴로움에 저절로 눈물이 흘러나왔다.
'모두가 걱정할 텐데.'
아픈 게 좀 나아진 지 얼마나 됐다고 또다시 이렇게 아프다니.
모두를 볼 낯이 없었고, 또 이렇게 쓰러져서 속상했다.
왜 내 몸은 이렇게 약한 걸까.
밤바람을 얼마나 쐬었다고 이렇게 열에 시달리느냔 말이야.
달뜬 숨을 내뱉으며 힘겹게 눈을 떴을 때는 흐릿한 시야 사이로 익숙한 인영들이 보였다.
흰 머리도, 녹색 머리도, 연분홍색 머리도 내가 아는 익숙한 색이었다.
'엄마랑, 레녹스랑, 리카르다네.'
내가 방에 없어서 모두들 숲속으로 찾으러 왔었던 걸까?
그렇다면 라그나르는…?
분명 바로 앞에서 갑자기 쓰러져서 놀랐을 텐데.
심약한 그 아이는 분명 자기 때문이라면서 울고 있을지도 몰랐다.
라그나르에게도 괜찮다고 전해줘야 할 텐데.
라그나르를 챙겨 달라고 말을 하고 싶어도 달뜬 숨을 내뱉는 게 고작이었다.
'너무 뜨겁다.'
뜨겁고, 아프고, 몸이 이리저리 뒤틀리는 듯 속도 좋지 않았다.
예전과 다른 아픔에 짜증도 울컥하고 올라왔다.
역시 어두운 것은 내게 도움이 하나도 되지 않았다.
나는 검고 검었던 숲을 생각하며 괜히 속으로 짜증을 냈다.
그새 물약이 효과를 발휘했는지 의식이 다시 아래로 가라앉을 것 같았다.
'싫어, 자기 싫어.'
덥고, 뜨겁고, 아프다고 말하고 싶은데.
그때 왼손에서 차가운 느낌이 들었다.
어째서 갑자기 손이 차가워진지는 모르겠지만 그 작은 냉기에 몸을 감싸고 있었던 불쾌함이 확 사라지는 느낌이 들었다.
의식이 천천히 가라앉았고, 흐릿한 시야 너머로 이곳에서는 볼 수 없는 검은색이 얼핏 보였던 것 같기도 했다.
***
“으음.”
목이 따갑고, 또 타들어 가는 듯 뻑뻑한 느낌이 들었다.
“무울….”
건조한 목을 켁켁거리며 물을 찾으니 누군가가 내 입가에 천천히 물을 흘려 넣어 주었다.
미지근한 물이 성수라도 되는 것처럼 반가워 꼴깍꼴깍 받아 마시.
고서는 눈을 떴다.
눈을 뜨니 이곳에는 있으면 안될 검은색 머리가 보였다.
동그란 머리가 고개를 들자 울먹이는 라그나르의 얼굴이 보여 나는 깜짝 놀라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떻게 여기 있어!"
“다프네네 엄마가 깨어날 때까지 있어도 된다고 했어.”
나는 당황한 듯 입을 벌렸다가 황급히 닫았다.
“…네가 데리고 왔구나.”
"응. 미안해, 다프네.”
자기 때문에 이렇게 아픈 것 같다고 라그나르가 눈물을 글썽였다.
'바보야….’
이미 진작에 감옥을 빠져나올 수 있었으면서.
그곳에서 도망치지 않고 계속 나를 기다린 것이다.
나는 내가 했던 고민이 얼마나 우스웠던 것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이제 서로 우는 것은 그만 보고 싶어졌다.
“내가 친구를 만나러 간 건데 뭐가 미안해.”
“…친구?”
이번에는 라그나르가 놀랐다.
더 이상 커질 수도 없을 것 같은 눈이 휘둥그레졌고, 입도 그만큼 크게 벌어졌다.
"정말???"
그리고 이내 기쁜 듯이 활짝 웃으며 물어 온다.
그래, 라그나르에게는 이런 표정이 잘 어울린다.
“응, 라라.”
갑자기 떠오른 귀여운 애칭을 나도 모르게 내뱉었다.
어울리지 않는 애칭에도 뭐가 좋은지 라그나르는 활짝 피어나는 꽃처럼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 이내 나를 껴안았다.
나도 함께 그를 마주 껴안았다.
아프다가 일어나서 그런 걸까?
아니면 그동안 끙끙 앓고 있었던 고민을 해결해서 그런지 몰라도 어쩐지 평소보다 더 개운한 아침을 맞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다프네!”
그때 내가 깨어났다는 소식을 들었는지 엄마가 찾아왔다.
나는 라그나르를 껴안고 있다가 어색하게 엄마와 눈이 마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