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0화.
엄마의 손에는 펜이 들려 있었는 데, 잉크가 마르지도 않았는지 펜촉의 잉크가 한 방울 뚝 하고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일하다 오신 걸까?'
급하게 달려온 모양새에 괜히 더 죄송해졌다.
그리고 조금 무서워졌다.
'약속을 어겼으니 화를 내시겠지.’
라그나르를 보러 갈 때 동행자와 함께 가기로 했는데 지키지 않았으니까.
'혹시 이 일로 나를 싫어하게 되면 어떻게 하지?'
이럴 줄 알았으면 매일 나가지는 말 걸.
쓰러질 줄 몰랐단 말이야.
차마 고개를 들고서 엄마를 마주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고개를 들렴, 다프네.”
딱딱한 목소리에 억지로 목에 힘을 주었다.
따끔한 말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엄마에게 들을 생각을 하니 무서워서 고개가 들리지 않았다.
"다프네.”
하지만 단호한 목소리에 나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들 수밖에 없었다.
익숙한 하얀색 머리가 보였고, 그 아래에 걱정 가득한 엄마의 얼굴이 보였다.
“.…엄마.”
"드디어 깨어났구나.”
입가는 미소를 짓고 있지만, 눈은 그렇지 않았다.
화가 났다는 듯 딱딱하게 굳은 그 눈빛에 죄를 지은 것 같아 다시 고개를 푹 숙이려는데 엄마가 나를 끌어안았다.
“다행이다. 얼마나 걱정했는지 몰라.”
그저 감기였기에 약만 먹으면 나을 줄 알았는데 일주일이 지나도 깨어나지 않았다.
그 말과 함께 목소리에 작은 물기가 어려 있었다.
“…아무것도 해 줄 수 있는 게 없어서 위험을 무릅쓰고 신관이라도 불러야 하나 했는데. 다행이다.
깨어나서 다행이야.”
물기가 어려 있었지만, 그 안에 스며든 것은 안도감이었다.
엄청 혼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돌아오는 것은 따뜻한 포옹이었다.
엄마의 체온이 느껴지자 이상하게 갑자기 몸이 더 아픈 것만 같았다.
갑자기 머리도 아픈 것 같고, 목도 따갑고, 콧물도 나오는 것 같고.
서러움이 밀려와 더 어리광을 부리고 싶었다.
괜히 눈물이 맺힐 것 같아 나는 엄마 품에 고개를 묻고서 마주 껴안았다.
“죄송해요. 제가 라그나르랑 놀고 싶어서 몰래 나갔어요. 라그나르는 잘못이 없어요.”
“그렇지. 잘못했지."
따스한 분위기도 잠시 엄마가 점잖은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다프네. 엄마랑 무슨 약속을 했었지? 다프네가 말해 보렴.”
"라라를 보러 갈 때 혼자 가지 않기로요.”
바로 탓하는 목소리가 돌아올 거라 예상하며 눈을 질끈 감는데, 엄마가 내 눈가를 부드럽게 쓸어주었다.
“맞아. 이렇게 추운데 매일 밤마다 몰래 나가 놀아서 감기에 걸린 것 같더구나. 다 나은 지 얼마 안돼 몸도 약했는데 말이야."
"......."
조곤조곤 상황을 읊어 주는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갑자기 쓰러진 상태로 나타나서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 네가 걱정돼서 일이 손에 잡히지도 않았단다.”
그 말이 진짜라는 것은 문 앞에 떨어져 있는 펜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정말 걱정했어. 괜한 욕심에 신관을 부르지 않아서 일이 커지는 건가 후회가 되기도 했고, 어서 일어나 줬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이었지.”
"엄마…."
이렇게 다정하게 말해 주는 것이 오히려 더 속상해 눈물이 핑 돌았다.
“이제 엄마는 어떤 이유는 네가 아프면 이제 심장부터 철렁한단다."
“죄, 죄송해요. 다음부터 이렇게 걱정시키지 않을게요.”
아파서 그런지, 엄마의 말이 너무 다정해서 그런지 평소보다 더 응석 부리듯 울먹이며 엄마의 품에 얼굴을 비볐다.
"…아픈 게, 낫지 않는 게 네 탓은 아니니까.”
엄마가 내 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따뜻한 온기가 익숙하여 더더욱 엄마 품에 파고드는데 위에서 무언가 결심한 듯 단호한 목소리가 들렸다.
“네가 다친 지도 몇 달이 흘렀구나.”
“네.”
나는 시무룩한 표정을 지우지 못한 채 다친 다리를 내려다보았다.
그저 고통이 줄었을 뿐 다리를 제대로 못 쓰는 것은 여전했다.
그리고 그 문제는 우리 가족이 오랫동안 앓고 있는 고민거리기도 했다.
"마법도, 물약도 효과가 없다면 결국 방법은 하나뿐이겠지."
“엄마?”
엄마는 골똘히 생각에 잠긴 것 같았다.
'…방해하지 않는 게 좋겠지?'
엄마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를 위해 고민한다는 것을 아니까.
나는 괜히 손을 조물딱거리며 엄마의 생각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그때 열린 문 너머로 레녹스가 나타났다.
“어머니. 그렇게 뛰어가시면 어떻게 해요.”
“급하니 어쩔 수 없지."
“아저씨가 많이 놀랐다고요.”
처음 듣는 호칭에 나는 고개를 빼어 레녹스를 쳐다보았다.
"아저씨?”
"아. 그 예전에 말했던 울보 아저씨.”
자세하게 이야기해 주기에는 상황이 여의치 않은지 레녹스는 미소로 말을 마무리했다.
그런 작은 미소에도 다정함이 담겨 있어서 나도 어색하게 따라 웃었다.
“그것보다 깨어나서 다행이다."
미소만큼 부드러운 손길이 내 머리를 도닥여 주었다.
익숙한 손길을 받으며 속상한 마음을 애써 떨쳐 내고 있는데 가까운 곳에서 시선이 느껴졌다.
‘아, 라라가 있었지..'
라그나르가 구석에서 우리를 멀뚱멀뚱 바라보고 있었다.
내 시선이 라그나르에게로 향하자 곧이어 엄마와 레녹스의 시선도 그리로 향했다.
"아, 라그나르를 잊고 있었구나."
조금 전까지 다정했던 엄마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암살자 라그나르에 대한 첫인상이 아직 남아 있던 탓인지 그다지 반기는 목소리는 아니었다.
“이리로 와 보겠니?"
하지만 그럼에도 목소리에는 적의가 담겨 있지 않았다.
라그나르는 엄마의 눈치를 보면서 쭈뼛쭈뼛 다가왔다.
“이름이 라그나르라고 했지. 성은?"
“라그나르 시어볼드."
엄마의 질문에 라그나르는 빠르게 자신의 이름을 말해 주었다.
엄마와 마주 볼 자신이 없어 금세 목소리가 작아지기는 했지만 확실하게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래. 라그나로, 내가 궁금한 게 있단다."
내게 보여 주던 상냥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엄마의 분위기는 찬바람이 불 듯 날카로웠다.
그에 라그나르도 웃음을 지우고서 엄마를 바라보았다.
“감옥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으면서 지금껏 가만히 있던 이유가 뭐지?”
그 물음에 라그나르는 망설임 없이 답했다.
"내가 나가면 다프네가 무서워할지도 모르니까요."
너무 빠른 대답에 오히려 뒤에 있는 레녹스가 놀랐다.
“다프네가 무서워한다니?”
그리고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목소리로 물었다.
“내가 처음에 다프네를 해치려고 했으니까…. 나가면 무서워할 게 뻔히 보였는걸요.”
지난밤 했던 대화를 숨기려고 하는지 제법 타당한 이유가 나왔다.
라그나르는 내가 자신을 무서워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내 딴에는 숨기고 있었으나 마음이 여린 라그나르라면 상처받을 수도 있었을 텐데.
이런 상황에서도 숨겨 주려 하니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그럼 이번에 다프네를 데리고 이 밤중에 빠져나온 이유는? 나올 수 있다는 것을 알면 더는 이곳에 있을 수 없을 텐데?”
“나보다는 다프네가 소중한걸.
아픈 걸 보고 싶지 않았어요.”
내 걱정과 다르게 라그나르는 상처받은 눈빛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저 활짝 웃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다프네가 무사하면 됐어."
저 해맑은 웃음을 보니 지금껏 갖고 있던 마음이 죄책감이 되어서 내 가슴을 날카롭게 찔렀다.
'바보가….’
감옥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으면 진작 도망을 가면 될 것을.
정말로 나 때문에 그 춥고, 외로운 곳에서 버티며 나를 기다렸다.
는 사실을 알고 나니 이렇게 속상할 수가 없었다.
"암살자로 자라서 그런지, 아니면 조금 특이해서 그런지 몰라도 마법 저항이 있는 것 같더구나."
엄마의 목소리에 레녹스가 맞장구를 쳤다.
"맞아. 리카가 쉽지 않았을 거라고 했어요. 실제로 상처도 많이 났고…."
"다쳤어?"
내가 깜짝 놀라 물었다. 분명히 멀쩡해 보였는데!
내가 놀란 눈으로 휙 고개를 돌리자 라그나르가 아니라며 손을 휘휘 저었다.
"아냐, 안 다쳤어!”
“화상을 좀 입기는 했지만, 치료를 받아서 나아졌지."
하지만 레녹스의 답은 라그나르와 달랐다.
화르르 눈을 불태우며 바라보자 라그나르가 어색하게 시선을 돌렸다.
“아프면 아프다고 해!”
그 모습에 화가 나서 욱하고 소리를 지르는데 갑자기 양쪽 볼이 잡혔다.
“우으?”
놀라서 고개를 돌리자 엄마가 화를 참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게 말이야. 아가, 엄마도 도같은 생각이란다.”
같은 생각이라고 하는 것 치고는 라그나르가 아닌 내게 말하는 것 같은데….
“우리 아가가 이렇게 매일 아파서 쓰러지는데. 아프다고 솔직하게 한마디라도 해 주면 좋을 텐데.”
“지그믄 갠차나여."
뺨을 잡히는 바람에 발음이 새서 웃긴 말투가 나왔다.
레녹스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친구 걱정하는 만큼 자기 몸도 걱정했으면 좋겠구나.”
그 말에 저절로 억울해질 수밖에 없었다.
밥도 잘 챙겨 먹고, 치료도 꼬박 꼬박 받고, 약도 꾸준히 챙겨 먹었는데!
내 눈빛에서 억울함이 느껴졌는지 엄마가 볼을 놔주었다.
세게 잡혔던 것은 아니기에 얼얼함은 없었지만 억울함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하지만 나 빼고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레녹스도 라그나르도 인정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으니까.
엄마는 그런 나를 보며 귀엽다는 듯 웃다가 다시 표정을 지우며 라그나르에게 물었다.
“형이 있다고 들었는데…. 혹시 네가 원한다면 네 형을 찾도록 도와주마.”
“엄마?"
엄마의 입에서 나온 말에 놀라 그녀의 팔뚝을 붙잡았다.
라그나르를 어디론가 보내겠다는 말인가 싶어 손이 저절로 떨렸다.
'안 되는데.’
이제야 제대로 마음을 열어서 친구가 될 수 있었는데.
얻자마자 뺏기는 느낌에 이렇게 초조해질 수가 없었다.
“형의 이름만 알려 준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찾아주 마.”
"......."
“그냥 주는 호의가 아니다. 네가 쓰러진 내 딸을 이곳까지 데려와줬으니 고마움을 표현하고자 하는 거야.”
엄마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받은 게 있으면 그대로 돌려줘야 상인이라고 할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나는 울망울망한 표정으로 라그나르를 바라보았다.
라그나르가 자신의 형을 좋아하고, 형을 찾기를 바라고 있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가끔 나와 레녹스, 리카르다를 보면서 그리움에 젖은 눈빛을 하고는 했으니까.
라그나르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놀란 감정을 최대한 눌러 보려는 듯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돌아가겠구나.'
섭섭하지만 이게 당연했다.
아무리 친구가 좋다고 해도 가족만큼은 아닐 테니까.
원한다면 보내 줘야 한다고 이성적으로 생각을 해도 표정이 쉽게 펴지지 않았다.
“형의 이름은 베르톨드 시어볼드, 아마도 어른이고….”
하지만 내 생각과 다르게 라그나 르의 표정은 밝아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