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1화
“데리러 오지 않을 거야."
라그나르의 말에 엄마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나도 엄마를 따라서 갸웃했다.
분명 듣기로는 형이 자신을 꼭 구해 주러 올 거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리 말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기에 저절로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분명히 다시 데리러 온다고…."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라그나르의 눈에 눈물방울이 맺혔다.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구나 싶어서 나는 엄마의 품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내 침대 바로 옆에 있는 라그나르를 끌어와 품에 꼭 끌어 안았다.
"나 괜찮은데...."
그렇게 말하면서도 라그나르도 나를 껴안았다.
훌쩍이는 소리에 나는 그의 등을 두드려 주었고, 엄마와 레녹스도 조용히 이야기를 듣기 시작했다.
“사실 다프네에게 거짓말했어.”
훌쩍이는 소리가 가라앉고, 헐떡이는 숨이 진정된 후 나온 말에 도닥여 주던 손을 멈췄다.
"그게 무슨 소리야?"
놀란 것은 나뿐만이 아닌지 어느새 레녹스가 다가와 라그나르를 향해 물었다.
“형은 내가 나쁜 아이라고 했어."
“…뭐? 그게 무슨 소리야?”
라그나르는 슬픈 눈으로 말했다.
“나는 정말 나쁜 아이래. 그래서 나를 그곳에 두고 가는 거라고 말했어.”
"!”
“거기서 착하게 지내면 데리러 온다고 했어. 하지만 난 거기서 빠져나왔잖아. 형은 나쁜 동생은 필요 없다고 했는걸."
라그나르의 말에 모두가 머리를 한 대 맞은 것처럼 놀란 표정을 지었다.
물론 나 또한 어떠한 말도 하지 못한 채 굳어 버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다프네, 난 다시 돌아가기 싫어. 그곳에서 착하게 지낸 애들은… 모두 죽었으니까.”
라그나르가 눈물을 삼킨 듯 우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형은 내가 약속을 안 지켰으니까 데리러 오지 않을 거야. 그래도 나는 죽기 싫어. 죽고 싶지 않단 말이야.”
라그나르의 눈에 맺힌 눈물방울뒤로 반짝이는 보랏빛이 보였다.
힘없이 떨리는 보라색, 그리고 절망을 담고 있는 보라색.
죽어 가는 엄마, 죽기 싫다는 라그나르, 선명하게 빛나는 보랏빛이 이렇게도 아름다운데, 어째서 죽음을 몰고 다니는 걸까.
나는 욱하는 마음으로 버럭 소리를 질렀다.
"웃기지 마! 죽긴 누가 죽어!”
내 목소리에 라그나르가 깜짝 놀라 고개를 번쩍 들었다.
나는 그의 눈에 맺힌 눈물을 소맷자락으로 닦아 주며 말했다.
"안 죽어. 안 죽을 거라고! 라라는 절대 안 죽을 거야! 그리고 나도… 안 죽을 거야.”
더 말을 꺼내면 눈물이 터져 나올 것 같아서 말을 잇지 못한 채 그를 꼭 끌어안았다.
“죽기 싫어서 다른 사람들도 죽였어. 나는 형의 말처럼 정말 나쁜 애지 않을까?”
라그나르의 말에 나는 고개를 붕붕 저었다.
“네가 원해서 한 게 아니었잖아.
너도 무서웠잖아.”
"맞아. 무서웠던 것 같아."
라그나르는 조용히 내 어깨에 고개를 묻었다.
이제야 라그나르의 형제가 이야기에 등장하지 않은 이유를 알게 되었다.
어릴 적 형에게 버림받은 라그나르는 자신의 잘못으로 버림받았다.
생각한 것이다.
형과의 약속을 어긴 후, 그를 찾지 못하고 마음에 묻은 것이다.
죽고 싶지 않았으니까.
라그나르는 나처럼 이곳에 머물기를 스스로 선택했다.
나는 가여운 라그나르를 껴안으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우리는 죽지 않을 거야.
우리를 둘러싼 세계가 우리를 죽이려고 해도 살아남을 거니까.
‘살고 싶다는 마음을 끝까지 가지면 달라질 테니까.'
그때 우리의 머리 위로 따뜻한 손이 올라왔다.
살고 싶다는 자신의 의지를 내보인 것이 기특하다는 듯 부드럽게 쓰다듬는 손은 익숙했고, 또 다정해서 피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래. 네 뜻은 잘 알겠다. 그럼 앞으로 머물 곳이 필요하겠구나.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우리 집에는 손님방이 남아 있고….”
엄마가 심상치 않은 기색으로 말끝을 흐렸다.
나는 몰래 울던 것도 잊은 채 엄마를 올려다보았다.
“내 딸을 구해 줬으니 보답은 꼭 해야겠지. 원할 때까지 이곳에서 머무르도록 하거라."
“그, 그래도 돼요?"
라그나르가 이곳에 머물 수 있도록 해 주겠다는 말에 저절로 목소리가 갈라져 튀어나왔다.
라그나르가 아니라 내 목소리가.
갈라진 목소리에 놀라 입을 틀어 막자 엄마가 따뜻한 표정으로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라그나르를 보는 엄마의 눈빛은 더 이상 차갑지 않았다.
"네가 해 준 일이 그만큼 가치가 있다는 뜻이니까 부담스러워 하지 말고.”
“…네.”
라그나르의 말투가 저절로 공손해졌다.
나는 라그나르를 품에 안은 채 엄마를 올려다보았고, 엄마는 그런 우리를 따뜻한 눈길로 내려다보았다.
"아가, 친구도 좋지만 벌써부터 가족들을 두고서 친구를 선택하면 엄마는 슬픈데.”
장난스러운 어조에 천천히 라그나르를 놓으려고 하는데 그가 놔주지를 않았다.
당황한 눈빛으로 라그나르를 바라보는데 그는 모른 척 다시 나를 꼭 끌어안았다.
“라그나르.”
엄마의 웃음소리에도, 레녹스의 단호한 목소리에도 라그나르는 나를 놔주지 않았다.
나는 그런 라그나르의 머리를 도닥여 주면서 괜히 뾰로통한 목소리로 말했다.
"라라가 놀랐어요."
“듣다 보니 궁금해서 그러는 건데 라라는 혹시 애칭인 거야?"
레녹스의 물음에 나는 당연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내 반응에 오히려 레녹스가 어색한 눈빛으로 말을 더듬더듬이어 갔다.
"으음, 그렇지만 말이야. 너무 여자애 이름 같기도 하고… 일단 애칭이 너무 애완동물을 부르는 것 같지 않아?”
“난 좋아요.”
레녹스가 기껏 라그나르의 편을 들어주었지만, 소용이 없어졌다.
본인이 좋다고 하는데 그가 무어라 하겠는가.
“다프네가 친구라면서 불러준 애칭인걸. 소중해.”
바보같이 헤실헤실 웃는 미소가 귀여워 나도 따라 웃었다.
둘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미소를 짓고 있었고, 곧이어 아래층에서 리카르다의 목소리가 들렸다.
“다들 식사 시간!"
새로운 구성원이 생긴 첫날은 그렇게 소란스럽게 지나갔다.
* * *
깜깜한 밤, 클로에는 조용히 다 프네의 방으로 들어갔다.
라그나르를 이곳에 머물게 했으니 당연히 숲으로 향하는 마법진도 지웠다.
하지만 사고가 생긴 직후여서 그런지 걱정되는 마음이 가라앉지를 않았다.
다행히도 다프네는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오늘이 얼마나 즐겁고 행복했는지 자고 있는 아이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져 있는 것이 보였다.
행복한 꿈을 꾸는 것 같았다.
“이번 일은 무사히 지나가서 다행이지만….”
클로에의 시선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다프네의 다리는 여전히 고정된 채였다.
언뜻 보아도 아이가 얼마나 힘들어할지 보여서 마음이 괴로웠다.
자신이 조금만 정신을 차리고 있었다면은 이렇게까지 다치지는 않았을 텐데.
뒤늦은 후회라는 것을 알면서도 걱정과 죄책감이 섞인 한숨은 끊임없이 제게 돌아왔다.
비록 피가 이어져 있지 않다고 해도 마음으로 받아들이기로 한 아이다.
죄책감이 아닌 사랑으로 아이를 먼저 봐주고 싶은데 부모로서 부족한 점이 많아 답답할 뿐이었다.
'이제 어쩔 수 없겠지.'
다프네가 노출되기를 꺼려서 최대한 피했던 일이지만 이제는 그 몇 개월을 거쳐서 마법으로 치료를 해도, 약물 치료를 해도 다리가 나을 기미는 느껴지지 않았으니까.
클로에는 곤히 자는 다프네의 이마를 가볍게 쓸어주었다.
자잘한 상처들도 겨우 완벽하게 치료된 아이다.
다리는 여전히 가망이 없어 보이니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있지만….
'그 녀석을 믿을 수밖에 없겠지.
적어도 프레이르의 딸이라는 것은 숨겨야겠어.'
믿을 만한 자이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언제나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으니까.
커튼 사이로 밝은 달빛이 은은하게 들어왔다.
마치 그 빛이 어둠 속에서 희망을 비춰 주는 것 같아서 클로에는 이 마지막 방법을 믿기로 했다.
클로에는 숙연한 마음으로 다프네의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리고 두 손을 모으고서 신께 기도를 올렸다.
얼른 다프네의 다리가 다 나아서.
직접 걸어서 제 품에 안길 수 있기를 바라며.
그 누구보다 반짝이는 아이가 될 수 있기를 바라며.
간절한 기도가 신께 닿기를 바랐다.
* * *
새해가 밝고 겨울이 끝나가고 있었다.
다행이라 해야 할지.
라그나르는 새로운 집에 무사히 잘 적응한 것 같았다.
나랑 함께 글을 배우기도 하고, 레녹스의 보조가 되어 주기도 하고, 리카르다와 함께 요리를 배우기도 했다.
가끔 리카르다의 눈치를 피해서 덜 단 코코아를 만들어 왔을 때는 기쁨을 삼키며 코코아를 마실 수 있었다.
리카르다가 조금 서운해 했지만 나는 모르는 일이다.
덕분에 나는 미친 듯이 단 코코아 대신 라그나르가 만든 코코아를 획득할 수 있게 되었다.
“다프네, 이거.”
겨울을 회상하고 있는데 라그나 르가 꼼지락거리며 무언가를 내밀었다.
수줍어하는 모습에 이것이 감옥에서부터 숨기고 있었던 것임을 알 수 있었다.
“…목도리랑 장갑?"
“다프네에게 주고 싶었는데….”
라그나르가 창문 밖을 내다보며 시무룩한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내가 실력이 없어서 이제야 완성했어.”
땅 깊이 파고들어 갈 만큼 우울한 말투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직접 만들었어?”
내 놀란 눈빛에 그가 조금은 쑥스럽다는 듯 웃었다.
“레녹스에게 배웠어."
"…연금술 보조를 하는 게 아니었어?”
“그전부터….”
라그나르가 부끄럽다는 듯 계속해서 손을 꼼지락거렸다.
보라색 털실로 만들어진 보송보송하고 두꺼운 목도리와 장갑은 솔직히 서툰 작품이었다.
울룩불룩 튀어나온 실이라든가 균형이 맞지 않는 길이라든가.
이미 찬 기운이 가고, 봄이 코앞까지 다가온 날씨였지만…..
나는 창문 밖으로 힐끔 시선을 던졌다가 뭐 어떻냐는 생각에 목도리를 목에 돌돌 말고, 장갑도 꼈다.
“잘 어울려?”
내가 보라색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서 이렇게 훌륭한 선물을 줬는데 어떻게 그냥 넘어갈까.
나는 기쁜 마음을 담아 작은 미소를 지었고, 그에 라그나르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아침이나 밤은 춥기도 하니까 날이 더워지기 전까지는 충분히 하고 다닐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은은하게 올라오는 향기에 웃으며 창밖을 가리켰다.
“그럼 외출 준비도 했으니까 밖에 놀러 나가자.”
오늘의 공부도 끝이 났고, 숙제도 어느 정도 했으니까 이제는 놀이 시간이다.
어른들이 잠시 자리를 비웠지만 괜찮을 것이다.
'무슨 일이 생기면 어때. 라그나 르가 있는걸.’
그 생각을 하기 무섭게 갑자기 문이 벌컥 하고 열렸다.
“?”
이 문으로 누가 들어온 것은 본적이 없어서 깜짝 놀랐는데 심지어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누구?”
사내는 굉장히 체격도 좋고, 키도 컸다.
고개를 치켜들고 봐야 할 만큼 커서 목이 다 아파 왔다.
갑작스러운 낯선 이의 등장에 라그나르가 경계하면서 내 앞을 막아섰다.
나 또한 라그나르의 옷깃을 꼭 잡았다.
처음 보는 낯선 사람, 불청객이 확실하다면 우리 둘만 집에 있다는 것을 아는 자가 있다는 뜻이니 위험하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다행이라 해야 할지.
우리가 걱정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사내가 나를 보자마자 주르륵 눈물을 쏟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