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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딸로 태어났다-32화 (32/185)

제32화.

사내는 그 큰 몸을 가누지 못하고 무릎을 꿇고서 울기 시작했다.

곱슬거리는 은발이 처량하게 기우는 몸을 따라 아래로 흔들렸다.

별을 부숴서 흩뿌리기라도 한 것처럼 빛나는 은발은 흔치 않은 색이었다.

게다가 사내의 눈은 금색이었다.

분명히 귀족일 가능성이 커서 경계해야 할 텐데.

“흑, 흐으윽. 어떻게, 어떻게 내게 이럴 수가 있어!”

사내는 뭐가 그렇게 서럽고 속상한지 미친 듯이 눈물을 쏟아 내고 있었다.

누군가가 본다면 일어나서는 안될 일을 목격한 사람처럼 정말로 격한 반응이었다.

'도대체 누구지.….'

우리를 보자마자 놀란 눈으로 펑펑 눈물을 터트리는 것이 위협적인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

너무 갑작스러워서일까 도무지 누구인지 갈피가 안 잡히는 그 순간, 머릿속으로 예전에 레녹스가 해 주었던 말이 지나갔다.

“…울보 아저씨?”

“울보라니! 아니야!"

눈가에 엄청나게 고여 있는 눈물부터 닦고 얘기하면 더 신뢰가 갈것 같은데.

라그나르는 여전히 경계를 풀지 않은 채 사내가 내게로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고 있었다.

라그나르도 고작해야 나보다 조금 더 큰 정도이건만.

아니면 낯선 사내가 계속 울기만 해서 그런지 이 상황이 무섭지 않았다.

어쩌면 둘 다일지도 모른다.

나는 라그나르의 뒤에 있다가 힐끗 고개를 내밀었다.

사내는 나쁘게 말하려 해도 잘생겼다는 말을 뺄 수 없을 정도로 훌륭한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보통 사람들보다 조금 어두운 피부를 가지고 있고, 눈썹이 두꺼워서인지 인상이 조금 무서워 보이기는 했지만….

큰 키와 체격, 그리고 평범한 사람들에 비해서 발달한 골격을 보면 기사이지 않을까?

적어도 귀족이고, 아마도 기사일울보 아저씨…?

머릿속에서 차마 한 인물을 가리키지 못해서 그런지 엄청난 위화감이 느껴졌다.

“넌 누구야.”

그렇게 내가 생각에 빠진 동안 라그나르가 입을 열었다.

저 작은 입에서 어떻게 저렇게 살벌한 목소리가 나오는지 등줄기에 오소소 하고 소름이 돋았다.

그래서 더욱더 라그나르의 옷자락을 세게 잡았다.

아마 내가 무서워한다고 생각하는 걸까?

라그나르는 슬쩍 나를 돌아보더니 걱정하지 말라는 듯 웃었다.

그리고 바로 고개를 돌려서 표정을 굳히고서 사내를 경계했다.

혹시 라그나르가 걱정할 수도 있으니 그의 등 뒤로 아예 몸을 숨기는데 울음소리가 서서히 커지기 시작했다.

“흑, 흐으윽. 허어엉.”

사내는 라그나르의 말은 들리지도 않는다는 듯 눈물 폭포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몹시 서러운 자기 마음을 보여 주려는지 가슴을 쥐어뜯는 듯 옷자락을 잡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 모습이 어쩐지 궁금해져 다시금 슬쩍 고개를 내밀었다.

그러자 사내와 눈이 마주쳤다.

나와 비슷한 금안이 눈물에 잠겨서 반짝이고 있는 모습이 참 예뻤다.

하지만 금세 울망울망해지는 것이 다시 눈물이 터질 것 같이 불안 불안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사내는 내 걱정과 다르게 또 눈물을 터트리지는 않았다.

'아, 혹시?'

설마 하는 마음에 다시 라그나르의 등 뒤로 고개를 숨기는데 훌쩍이는 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약 30초 후 다시 고개를 내밀자사내는 언제 그랬냐는 듯 울음을 멈춰 가며 반짝이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다.

“.…?

“…아저씨 누구예요?"

아무래도 내 얼굴을 보면 그나마 안정되나 보다.

'분명 내 얼굴을 보고 울음을 터트리지 않았나?'

아, 사소한 것은 넘어가기로 하고, 본론에 집중해야지.

사내는 내 시선이 뭐가 그리 좋은지 울먹이는 눈을 부드럽게 휘었다.

눈가가 부드럽게 접히면서 눈물을 또로록 흘려서 일까?

위협적일 수도 있는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다.

사내의 답을 기다리는 것도 잠시, 떼어지지 않을 것 같은 입술이 드디어 열렸다.

"…아저씨가 아니야."

사내는 소매로 눈물을 거칠게 쓸었다.

한참 울었다는 것을 보여 주는 듯 눈가가 붉게 달아올라 있었고, 코도 눈가만큼 붉어져 있었다.

어쩐지 그 모습이 참 처량해 보여서 다시 한번 물어봐 주었다.

"그럼 누구세요? 나쁜 사람이에요?"

"아냐! 나는….”

사내는 말을 하려다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차마 뒷말을 잇지 못하겠다는 듯 목소리에 벅찬 감정이 담겨 있었다.

얼굴이 살짝 일그러질 정도로 힘을 주어 눈물을 참은 눈이 무언가 결심을 한 듯 보였다.

몇 번이고 올라오는 울컥함을 참았을까.

사내는 다시 힘겹게 입을 뗐다.

그리고 너무나도 기쁘다는 듯 가슴에 두 손을 올리고서 마치 간절한 선물을 받은 아이처럼 기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 표정은 너무나도 황홀해 보였으나, 꺼낸 말은 그것 이상으로 충격적이었다.

“나는… 네 아빠야.”

“네?”

그게 무슨 소리인지.

받아들일 수 없는 말에 머릿속이 과부하가 걸리려는 그 순간 계단 쪽에서 누군가가 뛰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거침없는 발소리가 서서히 가까워지더니 끼이익 소리가 날 정도로 급하게 멈춰서는 소리까지 들렸다.

“악셀리우스-!!!”

엄마가 나타났다.

얼마나 뛰었는지 숨을 고르면서도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무래도 사내의 이름이 악셀리 우스인가 보다.

엄마가 알은척을 하니 안심해도 되는 상대인가?

“안전한 놈 맞을까?”

“일단 엄마가 아는 사람 같기는한데….”

라그나르가 속닥이며 물어 왔다.

나도 속닥이며 대답했다.

그 사내의 정체에 대해 우리끼리 토론하는 그 순간에 사내는 천천히 시선을 돌리더니 엄마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다시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 차오르기 시작했다.

"오, 허니!”

마치 오랜만에 재회한 연인을 보기라도 한 듯 감동에 찬 목소리에 나도 라그나르도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허…?”

"니…?”

우리는 한 글자씩 떼서 말하며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당혹스러운 시선은 덤이었다.

하지만 엄마는 우리의 시선이 느껴지지도 않는지 숨을 고를 새도 없이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악셀리우스의 등을 세차게 때려 댔다.

“악, 아악! 아파, 허니! 아파!”

"내가! 연락하고! 오라고! 했었을 텐데!”

말을 끊을 때마다 등에서 들리는 차진 소리에 우리는 서로 시선을 마주쳤다.

나는 이 두 사람이 잘 보일 만한 자리를 찾고서 조용히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라그나르가 눈치껏 내 휠체어를 뒤로 빼주었다.

우리가 빠지자마자 엄마는 거리 낄 것 없다는 듯 이제는 사내의 정강이마저 가볍게 찼다.

"악! 아파!"

“그럼 안 아플까! 아프라고 때린 건데!”

이렇게 격한 반응을 보이는 엄마는 처음 봤다.

신기한 눈으로 두 사람을 지켜보는데 어느새 부엌에 다녀왔는지 라그나르가 무언가를 주섬주섬 챙겨 왔다.

오늘 먹기로 한 달콤 짭짜름한 솔트 캐러멜 쿠키!

나는 기쁜 표정으로 쿠키가 담긴 바구니를 받아 들었다.

일단 내 입에 하나, 다음에는 라그나르 입에 하나.

"아.”

내가 손을 가져다 대니 자연스럽게 라그나르가 입을 벌렸다.

야무지게 받아먹는 모습이 뿌듯해서 평소라면 그 모습을 지켜보겠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악셀리우스는 현관문 앞에서 벗어나지도 못한 채 엄마에게 한 대씩 맞으면서 잔소리를 듣고 있었다.

“편지만 보내면 다야?"

“그렇지만 한두 번도 아니고 이제는 익숙해질 만하지 않았어?"

능청스럽게 대처하는 말에 엄마가 더 화가 나 보였다.

그냥 가볍게 넘어가면 될 텐데 사내는 능글맞게 웃으면서 계속해서 말을 덧붙였다.

“하지만 평소에 바쁘니까 이렇게라도 해야 쉴 수 있잖아."

“그걸 지금 말이라고!"

보니까 엄마가 일하다 급히 달려온 것 같은데 저런 말을 하면 화가 날 만하지 않을까?

내 생각만 그런 것이 아니라는 듯, 라그나르도 짜게 식은 얼굴로 악셀리우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언제 왔는지 레녹스와 리카르다도 도착해서 우리 뒤에 서 있었다.

내가 놀라서 올려다보자 레녹스가 입술 위로 검지를 올려 쉿 했고, 리카르다는 찡긋하고 윙크했다.

아무래도 엄마를 뒤따라서 급하게 돌아온 듯했다.

내가 사내의 정체에 대해 물으려 할 때 다시금 둘의 대화가 이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언제나 급한 일을 모두 제치고 이렇게 나를 반겨 주러 오잖아?”

"이 뻔뻔한 놈!”

곧이어 엄마가 짜증을 가득 담아 소리쳤다.

레녹스와 리카르다가 급하게 우리의 귓가를 막았다.

아무래도 이쯤에서 당연히 화낼 것이라고 예상한 듯했다.

“있지, 레녹스.”

“응?”

"울보 아저씨 맞지?"

내 물음에 레녹스가 어떻게 알았냐는 듯 눈을 크게 떴다.

말하지 않아도 놀란 모습이 보여 내 예상이 맞았구나 싶었다.

“오자마자 울었어?”

리카르다가 되물었다.

목소리에는 안 봐도 뻔하다는 뉘앙스가 담겨 있었다.

"저 남자가 우릴 보자마자 바보처럼 엄청 울었어. 그래서 내가다프네를 지켜 줬어."

라그나르가 나를 대변해 주려는 듯 황급히 입을 열었다.

그리고 자기가 한 일에 대해서도 자랑스럽게 말했다.

둘의 시선이 내 품에 안긴 간식 바구니로 향했다.

리카르다와 레녹스는 모른 척 고개를 돌렸고, 둘 다 라그나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래, 라그나르가 지켜 주느라 수고했네."

그렇게 우리끼리 사이좋은 분위기를 내고 있는데 다시금 저쪽이 시끄러워졌다.

참다못한 악셀리우스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클로에도 정말 너무한 것 아냐?

어떻게 우리 딸을 이렇게 몰래 키우고 있을 수가 있어?"

“…뭐?"

응?

갑자기 따라갈 수 없는 대화에 우리는 하던 것도 멈추고 그를 바라보았다.

악셀리우스는 뭐가 그리 억울한 지 다시금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눈으로 억울함을 호소하듯 엄마를 향해 말했다.

“아이가 아파서 그런 거야? 혹시 내게 피해가 될까 봐 그랬어? 내가 그렇게 못 미더웠어?”

그 말에 우리끼리 눈을 마주치며 이게 무슨 상황인지 파악할 수 있었다.

나는 괜히 내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하얀색 머리카락에 금색 눈동자.

흔치 않은 조합이니 오해할 만도 했다.

"내가 울보 아저씨랑 닮았나?”

“아저씨가 아니라 아빠란다….”

저 상황에서 내 목소리를 용케들었다.

엄마도 이제야 악셀리우스가 한 오해가 무엇인지 알아차렸는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달아올랐다.

엄마는 차마 무슨 말도 꺼내지 못하다가 지금까지의 고음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높이 외쳤다.

“무슨 오해를 하고 있는 거야, 이 바보야! 네 딸 아니야!!!"

엄마의 목소리가 지붕을 뚫을 듯 높아졌고, 악셀리우스는 뒤통수라도 세게 맞은 듯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나를 한 번, 엄마를 한번 계속해서 번갈아 보았다.

"어?

“어? 어어어어??"

곧이어 우리 집에 악셀리우스의 높은 비명이 널리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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