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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딸로 태어났다-33화 (33/185)

제33화.

방 안은 마치 먹구름이 낀 듯 어두컴컴한 분위기가 되었다.

밖의 날씨가 이렇게 맑기만 한데 무슨 소리냐고?

한쪽 구석에 앉아 있는 악셀리우스가 말로 표현하지 못할 만큼 우울함을 널리 널리 뿜어 대고 있었기 때문이다.

“클로에의 딸… 숨겨진 딸…."

엄마의 말이 끝나고 난 뒤 악셀리우스는 계속 저 상태였다.

엄마는 창문가에 기대어서 불편한 표정으로 악셀리우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는 흥미로워하는 눈빛을 숨기지 못한 채 두 사람을 보고 있었다.

호적도 그렇고, 다른 이들은 내가 엄마의 친딸이라고 알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악셀리우스에게도 공통으로 적용되는 정보였다.

“…그래서 날 안 만나 준 거구나. 새로운 사람이 있어서….”

"애들도 있는데 쓸데없는 소리 그만해.”

엄마의 시선이 살벌해졌다.

당장이라도 입을 틀어막을 기세여서인지 악셀리우스가 금방 입을 다물었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모든 상황을 종합해 보니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얼핏 감이 왔다.

'엄마를 좋아하는 사람이구나.'

그러고 보니 엄마는 결혼하지 않았었지.

'왜 하지 않았을까?'

레녹스의 아버지나 리카르다의 아버지는 마음에 안 들어서 그랬다 치고, 앞에 있는 악셀리우스는?

나를 자기의 딸로 생각할 정도면 분명히 연인이었던 것 같은데 결혼은 하지 않았고….

새삼 떠오른 기억에 엄마를 바라보니 그녀의 시선도 곧 내게 닿았다.

나를 바라보는 눈빛에는 미안함이 담겨 있어서 오히려 어리둥절한 기분이 들었다.

"아가, 많이 놀랐지?"

“…놀랐다기보다는….”

놀랐다기보다는 무슨 말이 어울릴까?

위협적이지만

무섭지는 않았고….

나는 한참을 곰곰이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아저씨가 너무 슬퍼 보였어요.”

그래, 맞아.

세상이 무너진 듯 애타게 우는 모습이 정말로 가슴이 아플 정도였다.

'내가 그동안 숨겨서 키워진 자기 딸인 줄 알고서 놀란 거였지만….'

이유야 어찌 됐든 저 큰 몸을 주체하지 못한 채 엉엉 우는 모습은 인상 깊었다.

“그래서 위로해 주고 싶었어요."

덧붙여진 말에 악셀리우스의 시선이 내게 닿았다.

너무 울어서 그런지 눈가가 붉은 꽃이 물든 것처럼 붉은빛을 띠고 있었다.

“…이름이 다프네니?"

악셀리우스가 애틋한 눈빛을 한 채 나를 바라보았다.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니 그가 씁쓸한 미소를 훔치며 내 앞으로 다가왔다.

그리고서는 내 눈높이에 맞추어 무릎을 꿇고 앉더니 눈을 마주쳤다.

“예쁘네.”

“얼굴이요?"

“얼굴도 예쁘지만, 마음도 예쁜걸?"

으음, 뭐라고 답을 해 줘야 하는 걸까?

나는 눈을 깜빡깜빡이며 악셀리 우스의 눈을 바라보았다.

하늘에 높이 떠오른 햇빛을 녹여 넣은 듯 찬란하게 빛나는 금색은 너무나도 익숙한 색이었다.

거울 속에서 바라보던 내 눈과 비슷한 색을 보니 기분이 묘해졌다.

그리고 그것은 악셀리우스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아이 아빠가 누구인지는 말안 해 줄 거지?”

악셀리우스는 진지한 표정으로 내 눈을 살피더니 조심스럽게 물었다.

“당연하지.”

단호하게 돌아온 대답에 그는 그럴 줄 알았다며 한숨을 삼켰다.

“금안이라니….”

착잡한 듯한 악셀리우스의 목소리에 내가 물었다.

"내 눈이 왜요?"

내 질문에 악셀리우스는 나를 배려하듯 밝게 웃었다.

"너무 예뻐서 그랬어. 누가 이런 예쁜 색을 준 것인가 싶어서!"

애써 밝게 올린 목소리가 믿음직하지는 않았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는 우리의 모습을 보고 머리를 짚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걱정해 줘서 고마워. 아저씨가 오해해서 다프네를 놀라게 해 버렸네.”

사나운 눈매와 어울리지 않는 다정한 목소리가 나를 달래 주기 시작했다.

"아저씨가 다프네를 놀라게 했으니 사과하고 싶은데.”

“괜찮아요. 아저씨가 누구인지, 알았거든요.”

"내가 누구인지 알아? 클로에가 얘기해 줬었어?"

악셀리우스의 생각의 흐름은 어떻게 시작해도 엄마로 흘러가는 걸까?

어째 기대를 부숴 버리는 것 같지만….

"아니요.”

"아, 그럼 누구한테…."

악셀리우스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뒤로 고개를 돌렸다.

내 시선의 끝에 닿는 것은 어색하게 시선을 피하고 있는 레녹스였고, 내 시선을 따라서 악셀리우스도 레녹스를 바라보았다.

“시계를 통해서 올 수 있는 사람 중에 울보 아저씨도 있다고 했어요. 저를 보자마자 우는 걸 보고 울보 아저씨라는 걸 알았어요.”

내 대답에 악셀리우스가 딱해 보일 정도로 멍청한 표정이 된 채 굳었다.

레녹스가 허둥지둥 말했다.

“다프네, 아무래도 울보 아저씨가… 아니 아저씨가 어머니랑 중요한 이야기를 할 것 같으니 잠시 나가 있을까?”

설상가상 레녹스가 한 번 더 그의 별명을 말해서 쩌저적 굳어 버린 듯했다.

어째 그 모습이 여러 의미로 안타깝게 보여서 그러자며 고개를 끄덕였다.

* *

모두 나가고, 방 안에는 클로에와 악셀리우스만 남았다.

클로에는 팔짱을 끼고서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 악셀리우스의 옆으로 다가갔다.

악셀리우스는 고개를 감싼 채 한참이고 생각에 잠겨 있다가 느껴지는 익숙한 향기에 고개를 들었다.

향수를 뿌리는 것도 아닌데 어째서 클로에에게는 항상 좋은 향기가 나는지.

악셀리우스는 슬픈 미소를 지었다.

20대의 어린 시절 한눈에 반한 뒤 지금껏 쫓아다녔었다.

친구를 잃고 싶지 않다는 대답으로 거절당하던 순간들이 아직도 선명했지만 그럼에도 후회하지 않았다.

'부끄럽지만 오해할 법도 했지.'

악셀리우스는 자신이 변방으로 떠나기 전 슬퍼하는 클로에를 위로해 주던 그날 밤을 떠올리며 헛기침을 했다.

드디어 서로의 마음이 맞닿은 그날을 어찌 잊으리라.

딱 하룻밤이었지만 그날 때문에 다프네가 자신의 딸인 줄 착각해 버렸다.

"예쁘더라.”

“예쁜 아이지.”

악셀리우스는 눈을 질끈 감고서 처음 이곳에 들어왔을 때를 떠올렸다.

조금 놀라게 해 주고 싶어서 평소랑 다르게 방문을 했을 뿐이다.

하지만 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조그만 아이 두 명에 자신이 더 놀랄 수밖에 없었다.

휠체어에 앉아 있는 아이는 건드리면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처럼 정말로 조그맣고 약해 보였다.

가장 먼저 시선이 간 것은 하얀색 머리였다.

처음에는 자신이 아는 사람 중 하얀 머리를 가진 사람은 클로에 밖에 없으니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었다.

'급한 일이 있다고 도움을 요청했는데….'

그리고 머릿속에 설마라는 생각이 지나가기 시작했다.

'맙소사. 설마 그날 밤에.…?'

아이가 당황이 가득한 눈빛으로 자신을 보는 그 순간 그 자리에서 무너지듯 감정이 터져 나올 수밖에 없었다.

찬란하게 빛나는 금색 눈은 자신을 빼어 닮아 있었으니까.

햇빛을 담은 듯 찬란하게 반짝이는 금색 눈동자는 아무에게나 허락되는 색이 아니었다.

황족의 상징적인 색, 그리고 피에 흐르는 고귀한 혈족을 나타내주는 색.

가끔 평민들에게서도 보인다고는 하지만 대단히 희귀할 정도였다.

그만큼 아주 귀한 색이다.

클로에를 닮은 흰색 머리카락에 악셀리우스 자신을 닮은 금색 눈동자.

근 5~6년 정도 만나지를 못했는데 혹시 그사이에…? 라는 생각이 지나갔고, 결국 울컥 올라오는 감정을 참아 낼 수가 없었다.

그리고 창피하게도 아이 앞에서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음을 터트렸다.

시야가 눈물로 인해 흐려지기 전에 보였던 아이의 모습이 너무 안타까워서 그랬을지도 모른다.

'클로에가 얼마나 힘들었을까.'

안 그래도 상단주의 자리에 여자가 올라왔다고 그동안 힘들게 치여 살았는데.

아이가 생겨서 고생했을 것을 생각하니 속상했다.

그 힘든 시간 옆에 있어 주지 못했다는 사실에 사무치게 올라오는 감정을 감당하기 힘들었다.

아이에게도 미안한 마음이 커 흘러내리는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아빠가 없어서 힘들었겠지?

휠체어는 왜 타고 있는 걸까?

혹시 태생적으로 어디가 아픈 것은 아닐까?

'어째서 이렇게 예쁜 아이를 나는 그동안 모르고 있었던 거야.'

국경 근처에 발생한 던전들을 정리하느라 타지에서 오래 버텼던 생활이 지금은 원망이 되어 돌아왔다.

'그래도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하자. 이제부터라도 아이의 아버지로서 힘이 되어 줘야지.'

하지만 그것도 잠시 클로에가 달려오면서 상황이 반전되었다.

저렇게 우리를 빼닮았는데 우리의 아이가 아니라니.

그동안 클로에의 옆에 다른 사람이 있었다는 걸까?

이런 생각이 이어지다 보니 악셀리우스는 더욱 슬플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클로에와 다른 남자의 아이라고 해서 다프네라고 하는 저 아이를 미워할 수도 없었다.

너무 슬퍼 보여서 위로해 주고 싶었다는 말이 어떻게 저 어린아이의 입에서 쉽게 나오는 것일까.

'타고나길 아주 선량한 아이라든가, 감수성이 풍부한 아이라면 좋겠지만….’

아이가 낯선 타인의 감정을 이렇게 잘 읽어 낸다는 것은 좋은 현상이 아니었다.

오히려 힘든 상황을 보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 같아 마음이 좋지 않았다.

“더는 아이의 아빠나 자세한 사정은 묻지 않을게. 얘기하기 싫은 것 같네.”

"고마워.”

클로에의 차가운 말에 악셀리우스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작게 미소를 지었다.

어찌 보면 억울하고 또 이렇게 감정을 내비치는데 받아 주지 않는다고 원망할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기에는 악셀리우스는 자신의 감정을 올곧게 표현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또 자신의 감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곤란하게 만들고 싶지 않은 이였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 다프네가 많이 아파.”

"… 휠체어를 타고 있었지. 혹시 다리가?”

무릎에 덮인 담요 아래가 살짝 튀어나온 것을 떠올리며 말하니 클로에가 그렇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고로 다리를 다쳤는데 어떤 방법으로도 고쳐지지 않아."

“레녹스랑 리카르다가 매달렸는데도?"

악셀리우스는 스스로 뱉은 말에 놀랐다.

악셀리우스가 알기로는 이 클레멘스 제국에서, 아니 대륙에서 마법과 연금술에는 가장 뛰어난 둘이 아니던가.

결국, 둘이 직접 나섰는데도 소용이 없다면 그쪽 방면으로는 아예 효과를 볼 수 없다는 뜻이었다.

“얼마나 됐는데?"

“넉 달이 좀 안 됐어.”

생각보다 오랜 시간에 악셀리우스의 표정이 저절로 심각해졌다.

“다프네는 웬만하면 눈에 띄면 안 되는 아이야. 그래서 그동안 미루었지만….”

“신전의 치료밖에 방법이 남지 않았구나."

“그것마저 소용없다면 그 아이는 다리를 잃게 될 거야."

너무나도 끔찍하다며 클로에가 자신의 얼굴을 감쌌다.

자신 때문이라며 자책하는 모습에 악셀리우스는 안타까운 표정을 숨기며 그녀를 위로해 주었다.

저에게만 약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좋았지만 이런 모습을 보일 만큼 힘든 상황이 닥치길 바란 적은 없었다.

"너는 성기사니까. 신전에 접촉하기가 조금 더 쉽겠지. 그러니까….”

클로에의 말이 다 이어지기도 전에 악셀리우스가 그녀의 두 손을 꼭 감싸듯 잡았다.

그녀의 말이 끝나기를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슬픔과 후회로 덜덜 떨리는 목소리를 계속 듣고 싶지 않았다.

악셀리우스는 자신만 믿으라는 듯 신뢰를 담아 웃었다.

“걱정하지 마. 널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으니까.”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무엇이든 못할까.

그것이 가문을 버리는 일이라도 악셀리우스는 해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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