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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딸로 태어났다-34화 (34/185)

제34화.

악셀리우스가 우리 집에 찾아온지 일주일이 지났다.

그리고 오늘, 나를 데리러 하얀색 성기사 제복을 입고서 마차까지 직접 끌고 왔다.

나는 며칠 전 엄마와의 대화를 떠올리며 첫 만남 때와 비교되는 모습에 놀라움을 삼켰다.

"악셀은 신전에 소속된 성기사란다. 저래 봬도 기사단장을 맡은 믿음직한 자고, 내 소중한 친우지.”

마법과 약물로 내 다리를 고치는데 실패했다.

그래서 마지막 수단으로 신전의 힘을 빌리고자 한다고 말했다.

엄마는 신전에서 자신이 가장 믿을 만한 성기사이면서 신전측으로부터 역시 무한한 신뢰를 받는 악셀리우스라면 도움을 받을 수 있다고 했다.

모습은 첫인상과는 판이해서 나는 제복을 갖춰 입은 악셀리우스의 놀란 눈을 숨기기가 조금 힘들었다.

'표정 관리, 표정 관리.'

놀란 눈을 애써 잠재우며 가까이 다가온 그와 가볍게 인사를 나누었다.

“준비는 다 됐니?"

“네.”

날씨가 아무리 봄을 앞두고 있다지만 여전히 겨울이니 옷을 든든하게 챙겨 입었다.

아기자기한 케이프와 귀여운 원피스, 그리고 편한 신발까지 신고서 휠체어에 올라탔다가 잊은 것이 떠올라 재빨리 찾았다.

"아, 목도리와 장갑도 하고 갈래요.”

이제 목도리랑 장갑을 착용하기에는 너무나도 따뜻한 날씨지만 이왕이면 할 수 있을 때까지 하고 다니고 싶었다.

그것도 그럴 것이 라그나르가 나를 생각해서 직접 만들어 준 선물인걸.

“날씨가 많이 따뜻해져서 더울 텐데….”

레녹스가 옷을 챙겨주다가 힐끗 시선을 뒤로 던졌다.

그 뒤에는 라그나르가 내 외출준비를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그 시선에 레녹스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작게 미소를 지었다.

“장갑은 끼고, 더우니까 목도리는 이렇게 펴서 담요 대신 덮자."

목도리를 펼쳐 무릎 위를 가볍게 덮으니 드디어 외출 준비가 끝이 났다.

“라라도 같이 가면 좋을 텐데."

"난 괜찮아."

라그나르는 사람들이 많은 것을 싫어하니까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나도 마찬가지라 심장이 큰 소리를 내며 뛰었다.

'누가 날 알아보면 어떻게 하지.'

솔직히 다리 때문이 아니었으면 무서워서 이 집을 나갈 생각을 하지 못했을 텐데.

'그래도 다리는 다 낫고 싶은걸.'

나 때문에 가족들이, 라그나르가 고생해야 하는 것이 싫었다.

울며 겨자 먹기로 나가는 것 때문인지 발걸음이 더더욱 떨어지지 않았다.

내 불안을 읽은 걸까?

라그나르가 걱정 가득한 표정으로 다가와 내 손을 꼭 잡아 주었다.

포실포실한 장갑 너머 익숙한 차가움이 느껴졌다.

“내가 같이 못 가도 목도리랑 장갑이 나 대신 있으니까!”

자신이 옆에 있다고 생각해 달라는 말인 것 같았다.

나는 손을 마주 잡은 채 꼼지락 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걱정하지 마. 신전은 그렇게 무서운 곳이 아니란다.”

신을 모시는 고귀하고 웅장한 곳이라 두려워한다고 생각하나?

악셀리우스의 말에 뒤에 있는 엄마의 표정에 쓴 웃음이 피어올랐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그런 표정을 집어던지고서 빙긋 웃으며 가까이 다가왔다.

“날씨가 풀렸으니 보닛을 써도 괜찮겠지.”

머리 위에 처음 보는 모자가 쓰였다.

케이프와 같은 색의 보닛이 내 머리에 깊게 얹어졌고, 환한 시야가 평소보다 가려졌다.

“이거라면 얼굴이 가려질 거니까. 걱정하지 말고 다녀오렴.”

살짝 아래로 내려온 보닛에 의해 시야가 불편하기는 했지만, 오히려 더 안심되어서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는 함께 가지 못하지만…

다음에 같이 갈 수 있으면 가자꾸나.”

처음에는 엄마도 함께 갈 생각이라고 했었다.

하지만 악셀리우스가 오해하는 것을 보고 생각을 바꿨다고 했다.

함께 신전을 갔다가는 남들도 비슷한 오해를 할 수 있기에 결국 외출은 나와 악셀리우스만 하기로 결정되었다.

“걱정하지 마. 내가 책임지고 잘데리고 다녀올 테니까.”

"부탁할게, 악셀.”

“응.”

악셀리우스의 표정에 든든한 미소가 지어졌다.

엄마는 불안한 마음을 잠시 접고서 준비된 마차 앞까지 배웅해 주었다.

“오늘은 신전이 손님을 받지 않는 날이니까 걱정하지 말고 조심해서 다녀오렴.”

마지막까지 내 불안을 덜어 주고 싶었는지 다정한 목소리로 전하는 말에 나는 작게 미소를 지었다.

엄마 뒤로 레녹스와 리카르다도 다정한 미소를 짓고 있었고, 라그나르도 조심해서 다녀오라며 손을 흔들며 배웅하고 있었다.

내 소중한 사람들이 용기를 줬으니까, 두렵지 않을 거야.

나는 그들이 건네준 용기를 품에 안고서 모두에게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그리고 잠시 후 마차는 숲을 떠났다.

'흔들림이 없네.’

가끔 보육원에 짐을 들여오는 마차들을 보면 엄청 덜컹거렸었는데.

의자도 푹신하고, 춥지도 덥지도 않게 온도도 좋았다.

무엇보다 마차에 붙어 있는 커다란 창이 제일 마음에 들었다.

투명한 창문 너머 보이는 나무와 풀 사이로 간간이 올라오는 어린 꽃들이 봄이 온 것을 보여 주고 있었다.

레녹스와 손을 잡고 걸었던 차가운 그 겨울날의 길은 없었다.

따스한 봄이 마치 나를 반겨 주는 것 같아서, 또 새로운 삶을 축하해 주는 것 같아서 다리가 나을 수 있다는 예감이 들었다.

활기찬 거리에 섞일 수는 없겠지만, 이 정도 변화만으로도 기뻐서 어쩐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런 감상도 잠시 어느새 마차는 신전 앞에 도착했다.

벌써 도착했다는 것이 아쉬웠다.

“이런. 창밖을 구경하는 게 즐거웠구나.”

“그냥….”

언제 내 표정을 봤는지, 악셀리 우스가 웃었다.

괜히 부끄러워져 그를 향해 팔을 뻗었다.

마차에서 내리기 위함이니 이건 부끄럽지 않았다.

악셀리우스는 눈을 빠르게 깜빡이더니 이내 방긋 웃으며 나를 안아 들었다.

지금껏 나를 안았던 그 누구보다가볍게 안아 들어서 조금 놀라기는 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그럼, 가 볼까?"

“잠깐만요.”

악셀리우스가 나를 안고 성큼성큼 걷기 시작하자, 나는 황급히 그의 어깨를 잡아당기며 그를 멈춰 세웠다.

"응? 왜 그러니, 다프네?"

“앞에 휠체어 있잖아요. 그거 탈거예요.”

휠체어가 있는데 왜 계속 안아서 들고 가려고 하냔 말이야.

굳이 이렇게 안기지 않아도 충분히 움직일 수 있기에 볼을 부풀리며 말했다.

내 뾰로통한 표정에 악셀리우스가 실수했다는 표정으로 어색하게 웃었다.

"미안해. 아저씨는 그냥 안아서 옮겨 달라는 줄 알고….”

“휠체어까지만요.”

“그렇네.”

조금 전까지는 기분 좋게 움직이더니 바로 앞에 있는 휠체어로 옮겨 주는 게 뭐 이리 굼뜬지.

'성기사라는 거 거짓말은 아니겠지? 설마 우리 쫓겨나는 것 아냐?'

이렇게 굼뜬 몸으로 어떻게?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 생각은 빠르게 접었다.

“오셨군요, 체이너드 경!"

신관복을 입은 이들과 악셀리우스와 같은 제복을 입은 이들이 모두 그에게 예의를 갖춰서 인사를 하였다.

신관의 입구부터 시작하여 들어가는 복도까지.

만나는 모든 이들이 경이로운 시선으로 그를 맞이했다.

악셀리우스도 무시하지 않고 빠짐없이 인사를 해 주기에 괜히 나도 가볍게 고개를 숙여서 인사를 했다.

어쩐지 나를 보면서 다들 움찔거린 것 같기는 하지만….

'성기사가 맞기는 한가 봐.'

조금 촐싹거리는 면이 진중함과는 거리가 멀지만, 사람마다 성격이 다르니까 그럴 수도 있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적어도 쫓겨나지는 않겠다.'

그렇게 한참을 복도를 거닐다 보니 생각보다 깊은 곳까지 들어왔다.

신전 자체가 처음이라 이 웅장한 분위기가 조금 무서웠는데, 이곳은 조금 다른 기운이 느껴졌다.

“신성한 느낌.….”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그 말을 들었는지 위에서 답이 들려왔다.

“그렇게 느껴지나 보구나. 맞아.

이곳은 신력이 가장 많이 닿는 곳 이거든.”

어느새 커다란 문 앞에 도착했다.

문 양옆에 서 있는 기사들은 시선을 아래로 내리더니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안녕하세요.”

"아, 안녕.”

가까이서 눈이 마주쳐 어쩔 수 없이 인사를 했다.

기사들은 당황한 표정을 지우지 못한 채 내게 인사를 해 주었다.

그러다가 내 뒤에 있는 악셀리우스가 있다는 것을 뒤늦게 눈치채고 허리를 꼿꼿이 세우며 경례했다.

“됐어. 그보다 안에 계시지?"

"예! 단장님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 안에 나를 치료해 줄 사람이 있다는 말이겠지?

신전을 구경하며 진정된 가슴이 다시 두근두근 뛰기 시작했다.

곧이어 문이 열렸고, 희망을 쏟아 내듯 환한 빛이 눈앞을 가렸다.

온통 새하얀 공간, 마치 먼지 하나 없을 것 같이 밝은 공간으로 천천히 몸을 집어넣었다.

인제 보니 천장이 있어야 할 곳이 투명한 돔 형태로 이루어져 있어 위쪽에서 쏟아져 내리는 햇빛이 하얀 대리석에 반사되고 있었다.

누군가 본다면 신성함 그 자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였다.

“체이너드 경.”

“오래간만이군요, 성녀님.”

멍하니 안을 구경하다 부드러운 미성에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신의 조각상 아래 한 여자가 앉아 있었다.

하늘색 머리 위에 하얀 베일이 씌워져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어제도 보셨으면서. 농담치고는 짓궂습니다.”

성녀의 대답에 분위기가 유연하게 변했다.

“특별히 부탁하고 싶다는 아이가 이 아이군요.”

“그렇습니다. 사고로 다리를 다쳤는데 마법이나 약물로 치료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고 하더군요."

"저런. 어린 아이가 얼마나 아팠을까.”

성녀가 내 다친 다리 쪽으로 손을 뻗자 그 위로 하얀빛이 뿜어져 나왔다.

따스한 무언가가 내 다리를 감싸는 느낌에 놀란 표정을 짓자 베일너머 보이는 그녀의 입가에 미소가 어린 것이 얼핏 보였다.

한참 동안 쏘아진 빛이 효과가 없는 것인가 긴장한 그 순간 그녀의 손에서 뿜어져 나오던 빛이 끊겼다.

“우선 이 정도로만 해 보고. 한번 다리를 움직여 보겠니?”

“네.”

지금껏 통증은 없었지만, 굳어버린 다리에 힘은 들어가지 않았었다.

나는 큰 기대를 하지 않고서 다친 발에 힘을 주었다.

공공거리며 힘을 주어도 다리가 움직이지 않아 역시 효과가 없는 것 같아 실망하려는 그 순간, 성녀가 손뼉을 짝 쳤다.

“발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네요.

신력이 많이 필요하기는 하지만 못 고칠 정도는 아니에요.”

그녀의 말에 나는 놀라 시선을 아래로 던졌다.

이제껏 미동도 않던 발이 떨리듯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축하해, 다프네. 이대로라면 다리를 고칠 수 있겠구나.”

악셀리우스의 입에서 기쁨이 가득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정말로…?'

믿기지 않았다.

다시금 올려진 발이 힘을 줄 때마다 조금씩, 아주 조금씩 떨리는 것을 몇 번이고 확인하고 나서야 믿을 수 있었다.

어쩐지 너무 기뻐서 눈물이 날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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