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녀의 딸로 태어났다-35화 (35/185)

제35화.

하지만 기쁨을 만끽하려면 눈물을 흘릴 수는 없었다.

나는 대롱대롱 달린 눈물 따위는 무시하며 벅찬 마음으로 물었다.

“그럼 저 다리 나을 수 있어요?"

"물론이죠. 시간이 조금 걸리긴 하겠지만, 이 작은 다리가 걷고 또 뛰는 것도 가능할 거랍니다.”

믿기지 않는 현실에 나는 혹시 이게 거짓말이지 않을까 볼을 꼬집어 봤다.

"아야.”

“어머나.”

볼에서 따끔하고 통증이 느껴졌다.

성녀가 작게 미소를 짓더니 내 손을 부드럽게 쥐어 떼어 냈다.

그리고서는 눈가에 고여 있는 눈물을 조심스럽게 닦아 주었다.

“꿈이 아니랍니다. 신의 자비가다프네에게 닿을 수 있어서 다행이에요.”

"고, 고맙습니다.”

지금껏 없던 그 자비가 이제야 내게 닿게 된 걸까.

기쁜 감정이 벅차올라서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도 모르겠어.

그때 위에서 안도의 한숨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어 올리니 악셀리우스가 다행이라며 방긋 웃고 있었다.

“걱정해 줘서 고마워요."

"아니야. 차도가 보인다니 다행이다.”

훈훈한 분위기가 지속하는 그때 성녀가 잡은 내 손을 천천히 놔주었다.

“체이너드 경. 잠시 따로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아, 그러죠.”

악셀리우스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내 앞으로 와 무릎을 꿇고 앉아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는 안심시켜 주려는 듯 최대한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다프네. 여기는 아무나 들어올 수 없는 곳이니까 걱정하지 말고 조금만 기다려 줄래?"

아마도 내 경과에 관해서 이야기를 하려는 거겠지?

혼자 있는 것이 조금 떨리기는 했지만, 그래도 아무나 쉽게 못들어오는 곳이라니 안심이 되었다.

적어도 혼자일 때 새로운 사람을 만날 필요는 없다는 소리니까.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장하다며 내 손에 무언가 쥐여 줬다.

“사탕?”

“레몬 맛 사탕이야. 이거 다 먹기 전에 돌아올게.”

"알겠어요.”

적어도 초콜릿보다는 낫겠지.

바스락거리는 포장지 안의 예쁜 레몬색 사탕을 입안에 넣었다.

“맛있어요.”

그에 다행이라는 듯 악셀리우스가 웃으며 무릎을 펴고 일어났다.

“금방 다녀올게.”

우리가 들어온 문 말고 다른 문이 있었는지 두 사람은 그쪽으로 향했다.

나는 둘이 멀어지는 것을 바라보다가 탁하고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나자마자 고개를 돌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으음.’

천장까지 제대로 보고 싶은데 보닛 때문에 불편해서 이리저리 뒤척이다가 뚱한 표정으로 고민을 했다.

'아무도 안 들어오니까 보닛 정도는 벗어도 되지 않을까?'

조금 눈치를 살피다가 천천히 목 아래 감긴 리본을 풀었다.

조용한 공간에 사르륵 풀리는 소리만 울렸고, 다시금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한 뒤 보닛을 벗었다.

“이제 잘 보인다."

고개를 들어 올리자 투명한 유리 돔 너머의 맑은 하늘이 보였다.

'고칠 수 있다. 다리 고칠 수 있대!’

신이 나를 마냥 버린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나니 통쾌한 감정이 밀려왔다.

'내 미래가 바뀐 게 아닐까.'

날 아껴 주는 가족도, 소중히 여겨 주는 라그나르도 옆에 있으니까.

죽음과 교환한 다리도 이제 나을 수 있다고 하니까.

그저 이 세상에 버려진 것이 아니라는 깨달음이 이렇게 행복을 가져다줄 수 있는지.

이 사실을 알면 가족들이 얼마나 좋아할까, 다들 기뻐해 주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방을 둘러보는데 밖이 소란스러웠다.

“뭐지?”

여기는 아무나 못 들어오는 곳이라고 했는데?

설마 누가 오지는 않겠지 싶어 한참을 문을 바라보는데 굳게 닫혀 있는 문이 벌컥 열렸다.

문을 지키던 기사들이 미처 말리지 못하고 당황하여 어쩔 줄 몰라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그들 뒤로 처음 보는 제 복을 입은 사람이 서 있었고, 그사이로 작은 꼬마가 보였다.

작은 꼬마라고 해도 나보다 나이는 많아 보였지만.

이곳이 햇빛에 반짝여서 그러는 건지 모르겠지만 소년의 은색 머리카락에 얼핏 푸른빛이 반짝였다.

그리고 시선을 조금 더 아래로 내리자 불쾌함이 가득 담겨 있는 은색 눈동자가 보였다.

입고 있는 옷도 좋아 보였고, 귀티가 흘러 보통 집안 자제가 아닌 것 같았다.

'…어쩌지.'

나는 문이 열렸다는 사실에 놀라서 굳어 버렸다.

고개를 돌려야 하는데 그것도 하지 못할 만큼 놀랐으니 어쩌겠나.

그리고 저 상황은 누가 봐도 강제적으로 연 것이 분명했다.

늦었더라도 천천히 고개를 돌리고서 모른 척을 하려는데 소년이 거침없이 다가왔다.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면서 질문하는 것이 어지간히 성질이 급해 보였다.

"네가 대공과 함께 온 자인가?"

“…대공?"

갑자기 뜬금없이 꺼낸 말에 무슨 소리냐며 고개를 갸웃하는데 소년이 내 앞까지 다가왔다.

우리는 눈이 마주쳤고, 소년의 표정이 이내 창백하게 질렸다.

“…대공의 딸인가?"

“무슨 소리인지 .…."

영문 모를 소리에 당황하다가 얼른 보닛을 다시 쓰려고 드는데 그가 거침없이 내 손목을 잡았다.

“대공의 딸이냐고 물었어!”

"......!"

그가 갑자기 언성을 높여 깜짝놀라 눈을 질끈 감았다.

금방이라도 나를 때릴 듯 날카로운 반응에 잊고 있던 옛 기억들이 스멀스멀 피어오르려고 했다.

나를 미워하는 사람들, 나를 때리려는 사람들, 그리고 그런 사람들 사이에 내 또래들도 분명히 있었다.

* *

두 사람이 들어온 방은 신전에서 가장 보안이 확실해 어떤 말도 새어 나갈 걱정이 없는 곳이었다.

그에 안심하며 악셀리우스는 입가에 지은 미소를 지우고서 물었다.

“다프네의 상태가 심각합니까?"

“표정을 풀고 이야기하는 것이 어떨까요?”

성녀, 요한나는 언제나처럼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자리를 권했다.

어차피 베일에 가려져서 보이는 것이라고는 옅은 미소가 떠오른 입술뿐이지만.

악셀리우스는 그 권유에 고개를 저으며 문가로 시선을 던졌다.

“다프네가 혼자 있으니 얼른 이야기하고 나가죠.”

“정말이지.”

못 말리겠다는 말에도 악셀리우스는 꼼짝하지 않았다.

본론을 원하니 어서 이야기를 해줘야겠지.

요한나가 무거운 이야기를 입에 담았다.

“낫기는 할 겁니다."

“낫기는 한다니?”

마냥 긍정적인 소식은 아니기에 악셀리우스의 얼굴에 인내심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금방이라도 독촉할 것 같은 분위기에 요한나가 한숨을 내쉬었다.

“사람 말은 끝까지 들어야 한다는 것도 모르십니까. 진정하세요."

“요한나.”

악셀리우스의 미간에 주름이 졌다.

안 그래도 위협적인 얼굴에 저렇게 주름까지 지며 인상이 찌푸려지자 더욱 사나운 분위기를 풍겼다.

그녀는 신경 쓰지 않고 답했다.

“다프네라고 했죠. 그 아이의 몸은 다른 아이들과 달라요. 쉽게 설명하자면 신력을 굉장히 많이 잡아먹어요.”

“많이 잡아먹는다니?"

요한나는 그 작은 아이에게 붙어 넣은 신력을 떠올리며 작게 고개를 저었다.

“클레멘스 제국에서 나보다 신력이 많은 사람을 찾기는 힘들다는 것 알고 계시죠?"

".…잘 알고 있어.”

악셀리우스의 표정이 흐려졌다.

“그래서 당신에게 도움을 요청한 거고.”

“신전 모두가 당신에게 감사하고 있고, 그래서 나도 당신의 부탁을 받아들여 준 거니 그리 죄책감 가득한 표정은 짓지 말아요.”

요한나는 주변에 있는 찻잔과 과일을 담아 두는 커다란 바구니를 가져왔다.

"보통 사람의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서 이 만큼의 신력이 필요하다면 다프네의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서는 이만한 신력이 필요해요.”

작은 찻잔과 커다란 바구니를 번갈아 보던 악셀리우스의 얼굴 위로 착잡한 감정이 서렸다.

요한나는 그의 표정을 애써 모른 척하며 설명을 이어갔다.

“그것뿐만이 아니에요. 상처에 신력이 많이 필요하지만, 그 신력이 몸에 쌓이는 체질이라 계속 부어 줄 수도 없어요."

“…그럼 어떻게 해야 하지?”

“신력이 모두 흡수되어 사라질 때까지 기간을 두고서 치료를 받아야겠지요. 한 2주 정도?"

악셀리우스가 “과연… 그랬군."

이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요한나가 꺼낸 말의 의미를 이해한 듯했다.

“꽤 오랜 시간이 걸릴 거예요.

보통 사람은 일주일이면 나을 상처를 다프네는 1년 넘게 치료받아야 할 정도지만 낫기는 할 겁니다.”

“다행이라 해야 할지."

“가끔 저런 친구들이 있다고 들은 적이 있으니 그리 걱정하지 마세요.”

요한나는 신력의 소모로 인해 버거움을 느꼈지만 애써 미소를 지었다.

악셀리우스 체이너드, 현 황제의 동생이며 형제간의 사이가 좋기로 그렇게 유명했던 자이다.

황족의 피를 갖고 있으면서도 황위에 욕심을 내지 않고 직접 성기사의 길을 선택한 자.

'현 황제가 대공의 자리를 억지로 쥐여 주지 않았더라면 그 자리도 받지 않았겠지. 옆 제국과 다르게 사이좋은 형제라 다행이지.'

체이너드 경, 아니 체이너드 대공이 있기에 이 신전은 더욱더 자랑스럽게 빛이 날 수 있는 곳이 되었다.

그럼에도 솔직히 특정한 날을 지정해 외부인의 출입을 금지해 달라든가, 성녀에게 지속해서 진료를 받게 해 달라는 일을 부탁하다니 기가 찼었다.

하지만 도착한 아이를 보고서 바로 알 수 있었다.

'아마도 딸이겠지.’

악셀리우스의 사랑은 수도에 유명했다.

젊은 시절 베네디토 상단주에게 한눈에 반해 지금까지 사랑을 고백하고 있으니 모를 리가.

낭만적인 사랑이 이어지지 않아 아쉬워하는 이들도 참 많았다.

그리고 그런 베네디토 상단주와 악셀리우스를 반반 섞어 놓은 듯한 아이가 갑자기 나타난 것을 보면 확실했다.

하얀색 머리카락과 보닛 아래에서 보이는 선명한 금색 눈동자가 더욱 확신을 주었다.

'지금껏 딸도 보지 못하고 변경에서 던전을 공략하는 데 힘을 썼는데. 돌아오고 나니 심하게 다친 딸을 마주했을 때 기분이란… 끔찍했겠지.'

요한나는 말하지 않아도 충분히 짐작이 갈만하다며 홀로 이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프네의 치료는 전적으로 제가 맡겠습니다.”

“…오랜 시간이 걸린다 했는데 그래도 되겠습니까?"

“체이너드 경의 부탁인데 이 신전에서 감히 그 누가 거절하겠습니까.”

요한나의 입가에 지어진 신뢰의미소에 악셀리우스는 힘겹게 미소를 지었다.

이야기가 끝이 났다고 생각하며 요한나는 문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니 베네디토 상단주에게도 그대로 전해 주시죠.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다프네가 악셀리우스와 클로에의 딸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는 말과다름없는 말이었다.

그 말에 악셀리우스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잠시 미간을 찌푸린 그가 “혹시….” 하고 입을 열려던 순간 갑자기 말을 멈췄다.

“밖에 누가 온 것 같군요.”

소음은 새어 나가지 않지만 성전을 가득 채운 요한나의 성력으로 인해 외부의 소리는 느낄 수 있었다.

“…다프네!”

밖의 소란스러움을 감지한 요한 나의 말에 악셀리우스가 눈에 보이지도 않을 만큼 빠른 속도로 튀어 나가는 것은 금방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