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6화.
"아니야!”
날 둘러싸는 두려움에서 벗어나 고자 일부러 더 큰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분명히 소리를 질렀음에도 주위에서 나를 욕하는 환청이 들리는 것 같아 귀를 틀어막으려고 했다.
하지만 소년은 그러한 틈을 주지 않았다.
“아니라고? 아니라면 네 눈에 박힌 금색은 어떻게 설명할 거지?"
"몰라, 나는….”
소년의 뒤로 보이면 안 될 환상들이 보였다.
보육원의 모든 아이가 나를 손가락질하면서 욕하는 모습이 겹쳐졌다.
무섭지만 멀쩡한 척해야 얕보이지 않으니까 곳곳이 버티면 더한 말로 돌아온다.
보고 싶지 않은 것들에, 듣고 싶지 않은 것들이 나를 감싸온다.
"어째서 내게 없는 금색이 대공의 딸인 네게 있는지 물었어!"
그런 내 모습이 답답했는지 소년이 다시 버럭 언성을 높였다.
위압적인 그 모습에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귀를 틀어막은 채 소리를 질렀다.
“난 싫어. 이따위 금색 싫다고!
가져갈 수 있으면 차라리 가져가버리라고!"
얼마나 크게 소리를 질렀는지도 모르겠다.
귀를 막아서 그런지 앞에서 하는 말들이 웅얼거리는 목소리로 들려 왔다.
듣고 싶지 않았다.
어떠한 말이든 작고, 크고를 떠나서 그 말들이 나를 날카롭게 괴롭힌다.
날 죽이려는 듯 달려드는 매서운 말은 내 가슴을 찢어 회복하지 못할 정도로 난도질을 하기에 두려웠다.
그렇게 날 감싸고 있던 희망이 금세 캄캄하기 짝이 없는 어둠으로 바뀌려는 그 순간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프네!!"
"......!"
다급한 목소리에 고개를 들어 올리자 악셀리우스가 놀란 표정으로 내게 달려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이제 고작 두 번 만난 사람이었지만 적어도 이 앞에 있는 소년에게서 나를 지켜 줄 수 있을 것 같아 팔을 뻗었다.
"아저씨!"
“이런!”
악셀리우스는 빠르게 내 앞으로 오더니 나를 번쩍 안아 올렸다.
위로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는지 나를 달래며 등을 쓰다듬는 손길에 올라오는 두려움을 잠재우며 그의 어깨에 머리를 묻었다.
눈에 닿는 악셀리우스의 옷이 조금 축축해지는 것 같았지만 그런 것이 신경 써질 정도로 멀쩡한 상태가 아니었다.
“많이 놀랐네. 괜찮아, 울지 말고, 응?”
등을 도닥이는 손에 진정이 될만도 한데 오랫동안 평화에 젖어 있던 탓일까.
조금씩 새어 나오는 눈물과 함께 두려움이 퐁퐁 흘러넘쳤다.
"아저씨?"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 불만이 가득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하.”
“오래간만이야, 체이너드 대공.”
"갑자기 이곳에는 무슨 일로 찾아오신 겁니까? 오늘은 외부인은 입장이 불가한 날인데.”
두 사람이 대화를 이어가기 시작했다.
'…대공이 악셀리우스를 말하는 거였구나.'
다른 사람들이 체이너드 경이라고 부르는 것은 들어봤지만, 대공일 줄 상상도 못 했다.
그저 귀족이거나 준귀족 정도 일줄 알았는데.
악셀리우스의 말에 기가 찬 웃음소리와 함께 짜증이 배인 목소리가 들렸다.
“이 나라에서 내가 가지 못할 곳이 있나? 아니면 저들이 그대의 명령을 어겨서 화가 나기라도 한 건가?”
“…그렇지 않습니다.”
악셀리우스가 나를 품에 안은 채 고개를 가볍게 숙였다.
‘전하라면… 설마…..'
두려움이 조금씩 줄어드니 이성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나는 고개를 조금 돌려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열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소년이 씨근덕거리며 악셀리우스를 노려보고 있었다.
눈빛에는 굉장히 불쾌하다는 감정이 가득 담겨 있어 눈이 마주치자마자 고개를 돌렸다.
'기억났다.'
잊고 있던 원작의 인물이 떠올랐다.
'여자 주인공의 약혼자이자 클레멘스 제국의 황태자.'
그가 누구인지 눈치채지 못했다니, 그동안 너무 행복에 젖어 있었던 걸까?
그가 황태자임을 깨닫고 나니 왜 이렇게 화를 내는지 얼핏 짐작이 갔다.
'눈 색에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었지.'
그래서 원작에서는 여자 주인공을 미워하며 귀찮게 괴롭혔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게 비뚤어진 첫사랑으로 자라 결국 남자 주인공에게 한 대 맞았던 것도 기억이 났다.
'여자 주인공은 분명 공작의 눈을 물려받아서 금안을 지니고 있었고….’
황태자는 황족의 상징인 금안을 갖고 태어나지 못해서 그로 인한 콤플렉스가 상당했다.
자신이 갖지 못한 색을 여자 주인공이 갖고 있던 것이 그의 콤플렉스를 자극했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의 무식하고 위협적인 태도에는 여전히 화가 났다.
권력의 중심에서 자라나서 그런지 굉장히 오만하기 짝이 없는 저 모습을 콤플렉스 때문이라며 옹호해 줄 생각 따위 들지도 않았다.
나는 쳐다도 보기 싫어서 악셀리 우스의 어깨에서 고개를 떼지 않았다.
"내가 왜 이곳에 왔는지 궁금하겠지.”
“신전에 올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신께 기도를 올리려 .…."
"네가 외부인의 출입을 모두 막고 신전의 문을 닫았다는 소식이 들려와서 직접 온 것이다.”
어린아이라고 생각하지 못할 만큼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에 나를 도닥이는 악셀리우스의 손이 멈췄다.
“전하."
“네가 이곳에서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그런 꼴을 가만히 보고 있으라는 건가.”
“전하!”
이어지는 말에 참지 못하겠다는 듯 악셀리우스가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그에 지지 않겠다는 듯 황태자도 함께 목소리를 높였다.
"내가 죽으면 다음 황위 계승자는 네가 될 텐데! 갑자기 변경에서 돌아온 것도 이해가 되지 않는데 신전까지 걸어 잠가?"
황태자는 벅찬 숨을 집어삼키고서 큰 목소리로 외쳤다.
“이래도 내 오해라고 할 건가?”
“시몬!”
악셀리우스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감히 황태자의 이름을 입에 담았음에도 후환이 두렵지 않은 듯 오히려 굉장히 화가 난 표정이었다.
난 .
“시몬! 난 황위에 욕심이 없다고 형님께 분명하게 말씀드렸다! 도대체 무슨 소리를 들었기에 그렇게 날이 서 있는 것이냐!"
“…거짓말하지 마!"
“시몬! 난 네 작은 아버지다! 내가 어찌 형과 조카의 자리를 넘볼것이라 생각한 것이냐.”
시몬의 입이 쉽게 열리지 않았다.
지금껏 뚫린 입이라고 그렇게 내뱉어 댄 말들은 어디로 갔는지 금방이라도 입을 다무는 모습이 얄미워질 정도였다.
"네가 누구에게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난 고향이 그리워져서, 돌아올 때가 되어서 돌아온 것뿐이야.”
“…그럼 오늘 일은…?"
황태자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조금 전 그 당당한 목소리는 모두 사라진 지 오래인 듯했다.
사자처럼 소리를 지르던 목소리가 줄어들자 이제야 어린아이다운 목소리가 들렸다.
자신의 잘못을 느꼈는지 기가 죽은 목소리였다.
“이 아이의 치료가 필요해서 신전에 부탁했을 뿐이고."
뒤통수에 따끔한 시선이 닿았지만, 고개를 들지 않았다.
마주치기도 싫은 걸.
황태자가 말을 잇지 못하자 악셀리우스가 마저 매듭지어져 있는 오해를 풀어 주었다.
“그리고 제 딸도 아니고요.”
악셀리우스가 다시 존칭을 쓰자 황태자가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그렇게 닮았는데!"
“정말로 아닙니다.”
오히려 억울하다는 목소리에 황태자의 기세가 꺾였다.
그리고 그 말에 오히려 악셀리우스 뒤에 서 있던 성녀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성녀님께서도 오해를 거두어 주세요. 제 딸아이가 아니라 친우의 딸입니다.”
“…그랬군요."
친우라는 말에 단번에 누구인지 짐작한 듯 표정이 어두워졌다.
'유명한가 봐.’
성녀도 알 정도면 악셀리우스가 엄마를 짝사랑하고, 그러면서도 친구의 관계에 있다는 것을 모두가 아는 듯했다.
그러면서도 긴가민가한 표정을 짓는 것이 안 믿는 것 같기도 해보였지만.
치료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도 피곤해져서 나는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악셀리우스에게 말했다.
"아저씨. 집에 가고 싶어요.”
“미안, 많이 놀랐지? 여기 시몬은 내 조카인데 ..."
“집.”
굳이 저 녀석 앞에서 자세한 설명을 듣고 싶지 않아서 다시 강조했다.
악셀리우스는 끙 하고 앓는 소리를 냈지만 어쩔 수 없다는 듯 나를 다시 고쳐 안았다.
“죄송합니다, 전하. 몸이 좋지 않은 아이라 무리를 하면 안 돼서요. 먼저 물러가겠습니다.”
“…그러도록 해.”
어느새 처음의 말투로 돌아온 두 사람의 인사는 생각보다 담백하게 끝이 났다.
아마도 악셀리우스는 나 때문에 마음이 조급해져서 그런 것일 테고, 황태자는 여러 생각에 잠겨서 그런 듯했다.
악셀리우스는 한 손으로는 휠체 어를 끌고 그대로 나를 안고서 방을 빠져나갔다.
슬쩍 고개를 들었을 때 내게 닿았던 눈빛은 조금 서글퍼 보여서 조금 전까지 내게 화를 냈던 이인가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문이 닫혔다.
시몬 로헬리오 클레멘스.
클레멘스 제국의 유일한 적자이자 황태자인 그는 어린 나이에도 훌륭한 모습으로 많은 이들의 감탄을 자아 낸 소년이었다.
타고난 두뇌도 우수했고, 몸에 밴 고귀함은 두말할 것도 없을 정도로 완벽했다.
에서 태어난 아이여서 그런지 아 더군다나 황제와 황후의 사랑 속아낌없는 애정을 받아 자라 인품 또한 훌륭한 아이였다.
그런 그에게 유일한 콤플렉스가 하나 있었다.
"오늘 예비 약혼자를 만나기로 했는데 어딜 갔었던 거니."
황후의 말에 시몬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평상시 철저하게 표정을 관리하며 침착함을 유지하는 아이다 보니 황후의 표정에 의문이 서렸다.
“무슨 일 있었니?"
“…별것 아니에요.”
목소리에는 기운이 없었지만, 이미 충분히 늦은지라 상대를 더 기다리게 할 수 없어 황후는 발걸음을 빨리 옮겼다.
“원래는 황태자비 경선을 치러서 그에 걸맞은 아이를 비로 받아들여야 하지만….”
걸으면서 말하는 것은 예의 없다고 타박하더니 오늘은 여유가 없어서인지 그녀의 입에서 말이 술술 터져 나왔다.
그리고 그 말은 시몬이 가장 듣기 싫은 소리 중 하나였다.
“네가 황가를 상징하는 금색을 타고나지 못했으니 네 비라도 가지고 있어야 하니까 어쩔 수 없지. 공녀의 눈은 예쁜 금색이라고 하더구나.”
“.…그런가요.”
이미 수십 번은 들었던 말.
시몬은 나오려는 한숨을 꾹 참으면서 그저 영혼 없는 대답을 꺼냈다.
그러나 황후는 눈치도 채지 못했는지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지금껏 황실의 자손이 금안이 아닌 경우는 없었지. 이 어미의 색을 닮지 않았다면 좋았을 텐데.
언제나 네게 미안하구나.”
"괜찮습니다.”
사실은 전혀 괜찮지 않았다.
하지만 어머니를 걱정시키고 싶지 않은 자식의 마음으로 빠르게 나온 대답에 오히려 황후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겨우 여덟 살이기는 하지만 헤로니스 공작가의 여식이니 예법을 배우면 금방 익힐 거다.
반쪽 피가 마음에 안 들기는 하지.
만 어쩔 수 없지.”
쯧, 하고 작게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이 말도 지금껏 지겹게 들어온 말이었다.
대를 이을 후계를 위한 일이라고, 모두가 받아들여야 한다고 입을 모아 전하는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내 의지는 하나도 없다니.'
자신은 곧 미래의 황제고, 제국의 최고의 자리에 앉을 사람이다.
그런 자신에게 선택권조차 주어지지 않는 것은 언제나 자존감을 깎고는 했다.
'참아야겠지.'
이건 자신이 금색 눈을 갖고 태어나지 못해서 벌어진 일이니까.
'그래, 참아야 해.'
* * *
시몬은 급히 도착했음을 핑계 삼아 시종에게 고하지도 않은 채 직접 노크부터 했다.
이 안에는 지금껏 귀에 피가 날 정도로 지겹게 들은 자신의 약혼자가 될 아이가 있을 것이다.
자신이 갖지 못한 것을 왜 남으로 채워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존경하고 사랑하는 부모님이 그래야 한다면 그런 거겠지.
이것이 황실에서 태어난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이라면 이 길을 따라 걸어가야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허락의 말이 들려왔고, 시몬은 문을 열었다.
늦었다는 사과와 함께 반갑다는 말을 꺼내자 밝은 목소리가 들려 왔다.
"반갑습니다, 황태자 전하! 마리아 헤로니스라고 합니다! 만나 뵙게 되어서 기뻐요!”
상처나 두려움, 불행 그 어느 것도 겪어 본 적 없을 정도로 티 없는 맑은 미소.
모든 것이 그녀가 지금껏 좋은 곳에서 행복하게 자라났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었다.
“그래, 나도 반가워. 헤로니스 공녀.”
그의 인사에 깜찍한 소녀의 눈가가 귀엽게 접혔다.
웃는 눈매 사이로 보이는 색은 그토록 시몬이 갖고 싶어 했던 금색이었다.
분명히 원하던 금색이니 반갑게 맞이해야 할 텐데.
'어째서 낮에 본 아이의 눈 색이 더 아름다운 것 같지.'
기억 속의 찬란한 금빛을 떠올리니 헤로니스 공녀의 눈은 탁한 금색처럼 보였다.
'그 아이는 누굴까.'
금색이 싫다고 가여울 정도로 울던 아이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아 앞에 있는 헤로니스 공녀와의 시간에 집중할 수 없었다.
시몬은 한참의 시간이 흘러도 그 이유를 알아차릴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