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녀의 딸로 태어났다-37화 (37/185)

제37화.

“시간이 조금 걸리지만, 분명히 다 나을 수 있다고 해. 다행이지?”

“네.”

집으로 돌아가는 마차 안.

신전으로 향했을 때와 다른 의미로 정적에 가득 찼다.

갑작스러운 황태자의 등장으로 희망에 차 있던 기분이 바닥을 치듯 떨어졌다.

“미안해, 다프네. 역시 혼자 두는 게 아니었는데.”

“…대공님 잘못은 없잖아요.”

잘못이 있다면 고작 그 정도도 못 견디는 내 잘못이겠지.

그래도 다리를 고칠 수 있다는 것에 다행으로 여겨야했다.

“으음.”

“정말 괜찮아요.”

악셀리우스가 심각한 표정으로 계속해서 나를 바라보니 오히려 그 시선이 불편해질 정도였다.

재차 괜찮다고 말해도 악셀리우스의 표정은 좀처럼 펴지지 않았다.

“그런 말 듣게 해서 죄송해요.

저도 대공님의 딸로 오해받는 것은 처음이라서….”

오히려 모욕을 당했다며 내게 화를 내도 모자란데 오히려 악셀리 우스는 나보다 더 미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점차 눈가가 붉어지는 게 어쩐지 울 것 같아 쓴웃음을 지으며 그저 마차 바닥만 보고 있자니 한참을 끙끙거리던 그가 입을 열었다.

“그냥 편하게 아저씨라고 불러도 돼.”

"어떻게 대공님께 그래요.”

“…이럴까 봐 이야기 안 한 건데.”

다시금 들려오는 앓는 소리에 나는 모른 척했다.

“사실은 시몬은 내 하나뿐인 조카란다. 권력을 쥐고 태어나서 어화둥둥 받들어져 살다 보니 성격이 조금 특이하지.”

성격이 더럽다는 말을 참 고급스럽게도 바꿔서 이야기한다.

그의 이야기가 나온 김에 알고 있는 내용임에도 궁금한 척 물어보았다.

“황태자 전하는 왜 그렇게 제게 화를 낸 거예요?"

"음, 사실은 말이지…."

악셀리우스의 얼굴에 난감함이 떠올랐다.

이야기해도 좋을지 고민하는 것 같아서 나는 재촉하지 않겠다는 듯 다시 고개를 숙였다.

“숨기는 이야기도 아니니 그런 표정 짓지 말렴. 네가 궁금할 만했으니 기죽지 않아도 돼.”

“네.”

고개를 들으니 그제야 그의 표정이 미미하게 피어올랐다.

"건국 초부터 황실은 신께 사랑 받는 혈족이라는 증표로 대대로 황금색 눈을 가지고 태어났단다.

그것은 현 폐하도 마찬가지고, 나도 그렇지."

“…황족이셨어요?"

“피만 그럴 뿐이야. 황위 계승권을 포기한다고 하니 폐하께서 억지로 대공이란 지위를 줬지만."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다시 설명을 이어 갔다.

"아무래도 황족에게 타고난 특징이다 보니 그 피를 물려받는 이들은 황금색 눈을 지니고 태어나게 돼.”

황족들만 갖는 색이라는 건가?

“황족은 보통 정략결혼으로 대를 이어 왔기 때문에 고위 귀족들에게도 가끔 보인단다."

".......”

그러고 보니 내 친아버지인 공작의 눈도 황금색으로 반짝반짝 빛이 났었던 게 떠올랐다.

“그리고 시몬은 그 색을 갖고 태어나지 못했고.”

“…은색이었어요.”

“맞아. 유일한 황자지만 아무래도 금색을 타고나지 못해서 곱지 않은 시선도 더러 있더구나.”

그래서 악셀리우스를 그렇게 경계한 거였을까?

지금껏 변방에 있다가 갑자기 돌아왔으니 자신의 자리를 뺏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두려워서?

“대공님이 두 번째 황위 후계자니까요?”

“…내가 황위에 오를 리는 절대 없을 거야. 다음 황제는 무조건 시몬이 될 테니까. 내가 그리 만들 거고.”

단호한 말이었다.

씁쓸한 미소를 지었지만, 그가 진실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렇구나.”

“다프네의 아버지가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아주 가끔 평민들 사이에서도 금색 눈이 나오기도 하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렴.”

"......"

난 괜히 더 보닛을 아래로 눌렀다.

시야가 가려질 만큼 보닛을 내리 는데 갑자기 마차가 멈춰 섰다.

벌써 도착했을 리는 없는데 이게 무슨 일이지 하고 상황을 살펴보려는데 내 앞에 커다란 손이 내밀어졌다.

내 손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커다란 손이 보였다.

"아까 보니까 거리에 장이 섰더구나. 들어가기 전에 조금 놀러가 보지 않을래?”

“.......”

이 손을 보니 나와 닿기를 거부하던 공작이 떠올랐다.

소매 아래로 빠져나온 그 커다란 손은 잡아 보지도 못한 채, 그의 표정만 보아도 매몰차게 버려진 기분이었었다.

'그때는 정말 무서웠는데.'

하지만 똑같은 커다란 손인데도 악셀리우스의 손은 무섭지 않았다.

악셀리우스가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잡아 달라는 것 같아서 슬그머니 손을 올리자 그가 부드럽게 손을 쥐었다.

그리고 기쁘다는 듯 활짝 웃으며 나를 천천히 품에 안았다.

“휠체어를 끌고 가기에는 눈에 많이 띄니까 안고 다녀도 될까?"

“이번만이에요.”

“응, 고마워.”

새침하게 나온 내 목소리에 그의 입에서 즐거운 웃음이 튀어나왔다.

마차에서 내리니 화려한 마차를 구경하는 사람 반, 거리의 장을 구경하는 사람이 반이었다.

악셀리우스는 사람들의 시선을 뒤로한 채 가볍게 그들 사이로 섞여 들었다.

혹시나 나를 떨어트리지 않도록 품에 더욱 꽉 안아 드는 것은 덤이었다.

"언젠가 자식이 생긴다면 이렇게 거리에 함께 놀러 나오고 싶었는데 다프네 덕분에 내 소원이 이루어졌구나.”

“…대, 아니 아저씨는 왜 결혼안 해요?”

대답이 예상되기는 했지만 모른 척 물어봤다.

“사랑하는 사람이 결혼에 뜻이 없는 것 같아서?”

장난스럽게 웃으며 하는 말에 그렇냐며 옷자락을 꽉 잡았다.

“그 사람이 하자고 한다면 언제 든 하겠지만 말이야."

이어져 나오는 진심에 이번에는 내가 웃었다.

'과연 엄마가 대공이랑 결혼하려고 들까.’

지금껏 하지 않았다면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것일 텐데.

안타까운 짝사랑을 이렇게 오랫동안 하는 것도 대단하다 느껴져 그의 어깨를 가볍게 도닥이니 그가 귀엽다며 얼굴을 비비적거렸다.

"다프네, 너무 귀엽다. 레녹스나 리카르다의 어릴 적 모습도 봤었지만, 다프네가 제일 예쁘고, 귀엽고.”

위로해 주는 거니 귀찮아도 참아야지.

나는 뚱한 표정으로 뺨을 한참 비비적거리다가 달콤한 향기에 이때다 싶어 고개를 휙 돌렸다.

한 상가 앞에 어린아이들이 바글바글 모여 있는 것이 보였다.

가판에서 사탕이나 초콜릿 같은 군것질거리들을 파는 듯했다.

“먹고 싶니?”

“나 말고요. 라라가 초콜릿을 좋아해요."

“그래? 그럼 라라에게 줄 초콜릿을 좀 사 갈까?"

라그나르가 집에서 혼자 심심했겠지.

돌아가는 길에 선물을 사다 주면 분명히 좋아할 거다.

나는 손에 낀 장갑을 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모여 있는 아이들을 제치고서 덩치 큰 사내가 나타나자 가게 주인은 놀란 듯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품에 안겨 있는 나를 보면서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뭐로 드릴까요?"

“여기 있는 초콜릿을 전부!"

“…? 많아요!”

악셀리우스의 말에 내가 놀라서 만류했다.

대공이어서 그런가? 아니면 변방에서 계속 기사로서 살아와서 그런가.

적당히라는 것이 없었다.

“하지만 두고두고 먹으면 되지 않을까?"

"이 아야 하니까 많이 먹으면 안된다 했어요!”

리카르다가 초콜릿을 줄 때마다 하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 말에 악셀리우스는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맛있는 걸 많이 못 먹으면 서럽잖아?”

“…나, 난 초콜릿 별로 안 좋아해요!”

“그럼 뭘 좋아해?"

"따, 딸기?"

당장 생각나는 게 그것뿐이어서, 말려야겠다는 생각에 내뱉었다.

“주인장. 그러면 딸기 사탕도 전부….”

“너무 많아요!”

“하하하. 적당히 한 상자씩 부탁하네.”

악셀리우스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이제야 이 아저씨가 날 놀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씩씩거리며 노려보자 그가 장난스럽게 윙크를 했다.

“엄마가 잘 가르쳐 주셨네. 꼬마아가씨, 너무 많이 먹으면 몸에 안 좋으니까 가끔 먹는 거예요?"

악셀리우스 때문인지 몰라도 상점의 주인도 웃으면서 내 손에 막대 사탕 하나를 쥐여 주었다.

“이건 우리 꼬마 아가씨가 엄마말 잘 들어서 주는 선물. 아유, 이렇게 귀여운 딸 있어서 행복하겠어요.”

너스레웃음을 지으며 하는 말에 악셀리우스는 뭐가 좋다고 헤픈웃음을 보였다.

“우와."

“좋겠다아.”

놀림받았다는 것에 부끄러움 반, 칭찬을 받은 것에 기쁨 반의 감정에 젖어 있는데 아래에서 부러움이 가득한 소리가 들려왔다.

살짝 시선을 내려다보니 상점 앞에 모여 있던 아이들이 부럽다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기분은 좋다.'

정말로 악셀리우스가 내 아빠가 된 기분이 들어서 묘하게 기분이 좋았다.

‘날 사랑해 주는 아빠가 있었다.

면 이런 느낌일까.'

엄마랑 레녹스, 그리고 리카르다에게 사랑과 애정을 받을 때처럼 가슴이 간질간질 해졌다.

나는 괜히 선물 받은 막대 사탕을 품에 꼭 끌어안았다.

그렇게 우리는 북적거리는 사람들을 헤치며 즐겁게 주변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간식거리를 사고 나니 이제 다른 것들도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가끔 식탁 위에 올라오던 과일들도 보였고, 매운 냄새를 풍기는 음식들도 있었다.

옷도, 장난감도, 먹을거리도 없는 것이 없을 정도로 거리의 상가는 굉장히 컸다.

활발한 거리를 보며 나는 나오는 감탄을 숨길 수가 없었다.

“이 상가 대부분은 클로에의 관리하에 있는 곳이야."

“엄마요?”

“그럼! 정말 멋있는 사람이지 않니?”

진심이 가득한 말에 나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막연히 짐작만 하고 있던 클로에의 위치를 확인하니 더욱 감탄스러웠다!

활기찬 거리가 그제야 더욱 눈에 잘 들어왔다.

“어머, 아빠랑 딸이 사이가 좋네요! 싸게 줄 테니 사과 좀 사가세요!”

“외국에서 들여온 이 과일도 맛있답니다!”

“이 계절에는 딸기죠!”

상인들이 물건을 팔려고 앞다투어 홍보하기 시작했다.

내 시선이 딸기로 향하는 것을 빠르게 눈치챈 악셀리우스가 딸기도 한 상자를 거침없이 구매했다.

보기 드문 큰손이어서 그런지 상가의 사람들의 눈이 반짝이는 것이 보였다.

결국, 어느새 악셀리우스의 손에 구매한 물건들이 잔뜩 생겨났다

“그럼 이번에는 뭘 사러 가볼까?

다프네는 인형 좋아하니?"

“엄마가 많이 사 줬는데….”

이미 너무 많은 것 같다고 말하려는데 악셀리우스가 너무 즐거워 보여 차마 말리지를 못했다.

결국, 귀여운 인형들도 잔뜩 샀다.

더 쇼핑하다가는 해가 질 것 같아서 나는 그를 말렸다.

다행히도 금방 포기해 주더라.

“즐거웠니? 다프네의 나쁜 기억이 얼른 사라지고, 좋은 기억으로 덮였으면 좋겠다.”

“충분했어요.”

즐겁다는 말이었다.

악셀리우스는 힘이 들 만한데도 미소도 잃지 않고, 나를 계속 안아 주었다.

악셀리우스가 나를 위해 애써 준 덕분에 이미 나쁜 기억은 마음속깊이 사라진 지 오래였다.

슬슬 집으로 돌아가려는데 거리의 구석에 있는 한 마차가 갑자기 눈에 띄었다.

'…예쁘네.”

액세서리들로 반짝반짝하는 마차였다.

'저것까지 사달라고 해도 괜찮을까?’

사 달라고 하고 싶었지만, 오늘은 충분히 소비했으니까.

접자

하지만 아쉬움을 접으려 해도 자꾸만 그쪽으로 시선이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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