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8화.
집에 도착하자마자 엄마의 목소리가 우리를 반겨 주었다.
“오늘 거리에 손이 큰손님이 나타났다더니.”
엄마가 내 걱정에 일찍 퇴근하셨나 보다.
오히려 늦게 등장한 우리를 굉장히 어이없다는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악셀리우스를.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의 손에 가득히 들려 있는 짐들을!
“다프네가 좋아하는 걸 보니 멈추기가 어렵더라고.”
내 이름이 나오자 엄마의 시선이 내게로 향했다.
나는 라라에게 줄 선물을 품에 꼭 끌어안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나 때문에 잔소리를 듣게 할 수는 없으니까.
엄마는 못 말린다는 듯 웃었다.
엄마를 따라 악셀리우스의 얼굴에도 다정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신전에서의 표정과 엄마나 나에게 향하는 미소가 확실하게 달랐다.
'정말로 엄마를 좋아하는구나.'
엄마의 딸이라는 이유로 내게 이렇게 잘해 줄 만큼 좋아한다는 거겠지.
나는 휠체어를 움직여 문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라그나르에게로 향했다.
“라라, 혼자서 안 심심했어?”
"응! 레녹스랑 글자도 공부하고, 책도 읽어서 즐거웠어!"
“나랑 노는 것보다?"
“아니!”
빠르게 나오는 말에 나는 꺄르르웃으며 품에 안은 선물을 건네주었다.
자신의 머리만 한 상자를 받아든 그가 이게 무엇인지 몰라 고개를 갸웃했다.
호기심 가득한 눈빛에 나는 작게 소곤거렸다.
“선물이야. 초콜릿!"
“와! 와아!”
라그나르의 뺨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은은히 나는 초콜릿 냄새에 라그나르는 참지 않고 상자를 열어 보았다.
안에 차곡차곡 담긴 예쁜 초콜릿을 본 라그나르가 바로 초콜릿을 집어서 입에 넣었다.
"맛있어!”
얼마나 기뻤는지 라그나르는 초콜릿을 잔뜩 입에 넣고 우물거렸다.
“입가에 다 묻잖아.”
나는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어 라그나르의 입가에 묻은 초콜릿을 닦아 주었다.
“그리고 초콜릿 많이 먹으면 이 썩어. 아야 한다?”
“그래도 너무 맛있는 걸.”
라그나르가 초콜릿 상자를 소중하게 품에 끌어안았다.
“정말 고마워, 다프네. 나 너무 행복해.”
“정말로?”
"응.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요새 너무 행복해. 다 다프네가 있어서야.”
라그나르는 언제나 말을 예쁘게 했다.
나까지 힘이 날 정도로 고운 말에 나는 방긋 웃으며 팔을 벌렸다.
라그나르가 익숙하게 나를 품에 끌어안았다.
어쩌면 숲에 피어나는 알록달록한 꽃들은 우리의 따스한 분위기 때문에 피어나는 게 아닐까?
그리고 이어지는 내 다리에 관한 희망찬 소식에 모두가 기쁨의 미소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정말로 행복이 펼쳐지기 시작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비로소 봄이 왔다.
“안녕, 다프네! 라그나르! 잘 지냈니?”
약속한 2주가 채 지나지 않았는데 악셀리우스가 또 놀러 왔다.
“..…성기사는 한가한 직업이에요?"
“그럴 리가. 다프네랑 라그나르가 보고 싶어서 놀러 왔지.”
말은 이렇게 해도 우리는 악셀리 우스를 좋아했다.
악셀리우스는 내 정체에 대해 캐물으려고 하지 않아서 좋았고, 라그나르의 눈을 보며 꺼려하지 않았다.
나와 라그나르를 차별하지 않고 언제나 다정하게 대해 주었다.
그런 좋은 사람에게 어린아이인 우리가 마음을 여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우리가 먼저 손을 잡자며 내밀었을 때 악셀리우스는 왈칵 눈물을 터트리곤 했다.
눈물 뚝 하라고 열심히 달래 주고 나니 이내 멈추고는 창피해하며 잊어 달라고도 했었다.
그 후로 라그나르는 가끔 심술이 나면 악셀리우스를 울보 아저씨라고 놀리기도 한다.
그래도 우리는 악셀리우스를 좋아했다.
"보니까 요 앞 숲에 토끼가 돌아다니고 하던데, 찾아보러 갈까?"
무엇보다 악셀리우스가 있으면 집이나 정원 말고도 간간이 주변의 숲까지 놀러 나갈 수 있다.
이렇게 반가운 기회를 놓칠 수 없었기에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으쌰. 자, 라그나르도.”
악셀리우스가 하나도 안 힘들면서 괜히 소리를 내며 나를 품에 안았다.
오른손으로는 나를 들어 안고, 왼손으로는 라그나르의 손을 꼭 잡았다.
봄날의 따뜻한 기온도 바람도, 그리고 새로운 사람의 등장도 우리의 평화로운 일상을 더해 주고 있었다.
"아, 토끼다.”
저벅저벅 하고 풀숲을 걷는 소리에 풀을 뜯어 먹던 토끼가 놀라서 도망갔다.
어쩐지 조금 아쉬워져 시무룩해 하니 라그나르가 금방이라도 뛰어갈 자세를 취했다.
"내가 가서 잡아 올까?"
“라그나로, 숲에서 혼자 뛰어가지 않기로 아저씨랑 약속했지?"
악셀리우스의 따끔한 말에 라그나르는 다시 원래의 자세로 돌아왔다.
“울보 아저씨는 치사해."
라그나르는 괜히 입술을 삐죽 내밀면서 일부러 흙을 튕기며 걸었다.
그 모습이 뭐가 좋은지 악셀리우스는 다정하게 웃어 보였다.
"오늘은 여기서 간식을 먹을까?"
작은 옹달샘 주위에 피어 있는 들꽃을 보니 어쩐지 봄 소풍을 나온 기분이 들어 우리 모두 찬성했다.
악셀리우스는 익숙하게 방석을 내려놓고 나를 그 위에 앉혀 주었다.
2주에 한 번씩 지속적으로 치료를 받기로 한 그날 이후, 벌써 여러 번 받은 치료로 인해 무릎을 천천히 굽힐 수 있을 정도로 좋아졌다.
어서 숲을 거닐고, 뛰어놀고 싶어질 정도였다.
'그래도 아직은 조심해야지.'
성녀님이 무리하면 큰일 난다고 했으니까.
"다프네, 춥지는 않아?"
"응, 안 추워.”
어느새 완전히 봄이 되어서 바람마저 따뜻하고, 그만큼 마음에도 여유가 생기고 있었다.
라그나르는 다행이라고 웃더니 새로 발견한 샘에 관심을 가지고서 그곳으로 달려갔다.
“넘어지지 않게 조심해야 한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넘어지는 일따위는 없었다.
'조금 부럽다.'
언젠가 나도 저렇게 달릴 수 있겠지?
그때 되면 라그나르랑 함께 뛰어 놀아야지.
정원을 뛰어다니고, 이렇게 숲으로 산책 나와서 함께 놀러 다니면 분명히 즐거울 거다.
굳이 무리해서 힘든 길을 걷지 않아도 이렇게 내 인생이 바뀌고 있으니 가득했던 경계가 스물스물풀리는 느낌이다.
“아저씨. 오늘도 그 이야기 해줘요.”
한참 물장난을 하던 라그나르가 다시 이리로 뛰어왔다.
라그나르가 내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흠, 어디까지 이야기했더라.”
“형에게 힘을 실어 주기 위해서 변방으로 파견을 갔던 여정이 끝났고, 오늘은 도착 후의 이야기 차례예요.”
접하지 못한 세계는 언제나 신기하고, 흥미롭기 마련이다.
특히 원작에선 접할 수 없었던 변방의 악셀리우스 이야기는 꽤나 새로웠다.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진 나는 팔을 이용해 악셀리우스의 바로 옆에 달라붙었다.
고개를 들고 반짝이는 눈으로 바라보자 그가 아이고 하는 추임새와 함께 나를 들어 올려 자신의 무릎 위로 올렸다.
“그래. 그 비바람이 몰아치는 폭풍우를 뚫고서 드디어 나는 변방에 도착할 수 있었단다.”
시작된 이야기는 마치 옛날이야기 같기도 했고 우리가 직접 겪는 모험 이야기 같기도 했다.
"도착하자마자 발견한 던전이 얼마나 큰지 지금껏 그런 것은 본적이 없어서! 천하의 나도 순간 겁을 먹었지.”
“던전?”
라그나르가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원작을 아는 나는 듣기만 해도 무시무시했지만, 라그나르에게는 미지의 장소일 법도 했다.
나도 원작을 읽어 보지 않았다면 라그나르와 같은 반응을 보였을 것이다.
알쏭달쏭해하는 라그나르를 위해 일부러 모르는 척 악셀리우스에게 질문을 했다.
내 물음에 악셀리우스가 설명을 생략해서 미안하다며 천천히 덧붙였다.
“무서운 자연재해지. 어느 날 갑자기 생겨나서 주변의 땅을 메마르게 하기도 하고, 가끔 그곳에서 튀어나오는 몬스터들이 사람들을 공격하기도 하거든."
"…몬스터?"
나랑 라그나르가 듣기만 해도 무섭다는 듯 서로 눈을 마주치자 조용히 있던 그가 갑자기 우리를 한번에 와락 끌어안았다.
“그래, 몬스터! 사람을 해치는 아주 무섭고, 못된 괴물 말이지!"
“꺅!”
“으악!”
소리 없이 갑자기 끌어안아서 놀란 비명이 저절로 튀어나왔다.
우리가 놀란 것이 뭐가 그리 좋은지 악셀리우스는 크게 웃으며 우리를 꽉 끌어안았다.
어깨랑 가슴이 얼마나 넓은지 어린아이 둘을 충분히 품에 끌어안을 정도였다.
“몬스터들이 사람을 괴롭히면 안되겠지?"
"응!"
라그나르가 힘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의 눈에 비치는 악셀리우스는 아무래도 정의로운 용사처럼 보이는 듯했다.
“그래서 나와 다른 기사 아저씨들이 목숨을 걸고서 던전을 공략했단다. 던전 속 몬스터를 모두 죽이면 던전은 사라지거든.”
“…계속요? 고향에도 못 돌아오고요?”
“변방에서는 자주 발생하는 일이다 보니.”
그의 씁쓸한 목소리에 그 당시의 무거웠던 현실이 담겼다.
"던전엔 어떤 몬스터가 나오는데요?”
“…이런 이야기를 해 주는 게 좋은 건지 모르겠네."
악셀리우스가 조금 망설이다가 기억을 하나하나 되짚어 보기 시작했다.
“약한 몬스터들은 보통 입구와 가까운 곳에 있지. 안으로 깊이 들어가면 들어갈 수록 강한 몬스터가 나오기도 하고."
터가 ”
그 당시를 상상한 악셀리우스의 표정이 살벌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가끔은 던전 자체에서 함정을 파서 사람들을 잡아먹기도 하지.”
“헉.”
무서운 소리에 라그나르가 나를 더 꽉 끌어안았다.
라그나르의 떨리는 손을 본 나는 겁먹은 것을 풀어 주기 위해 마주안았다.
“무섭지 않았어요? 나라면 도망가고 싶었을 거야.”
“그래도 그 모든 것을 이겨 내고 던전이 사라지면 많은 이들이 행복할 수 있으니까."
악셀리우스가 별것 아니라는 듯 담담하게 말을 이어 갔다.
“신전의 기사로서, 그리고 제국의 많은 백성을 챙겨야 하는 황족의 의무라고 생각해."
단호하게 내뱉은 말에는 거짓말 하나 섞여 있지 않았다.
그리고 그 모습은 자랑스러워 보일 만큼 멋있는 말이었다.
“아저씨가 황제였으면 좋았을 텐데.”
“어허, 큰일 날 소리야. 지금의 황제 폐하께서 얼마나 성군이신데."
악셀리우스는 참으로 선량하고 올곧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악셀리우스를 보면 이런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만약 아저씨가 황제였다면 우리 엄마가 그렇게 죽지는 않을 수 있지 않았을까.’
아니, 이야기를 비틀 사람이 없다면 그런 일이 일어나지는 않았겠지.
엄마의 끝은 결국 잔인하고도 처절한 죽음이었을 거다.
첨탑에서 죽은 엄마는 이런 따뜻한 봄을 즐기지도 못했을 거고.
적어도 따뜻한 풀숲에 묻혔으면 좋았을 텐데.
‘…엄마의 시신을 찾고 싶다.'
소원권을 쓰고 싶지만 그럴 수 없었다.
‘괜히 베네디토 상단이 악녀랑 연관이 있다는 소문이 퍼지면 큰 일이니까.’
아마 나는 영원히 엄마를 다시 만날 수가 없을 것이다.
살아 있는 모습이든, 죽은 모습이든.
어느새 이야기가 전환되어 악셀리우스의 입에서 용맹한 영웅담이 끊임없이 풀어져 나오고 있었다.
라그나르의 눈은 더욱 반짝였고, 이러한 즐거운 분위기를 깨고 싶지 않아 나는 더욱더 악셀리우스와 라그나르를 끌어안았다.
내가 무서워한다고 생각하는지 두 사람도 나를 안아 주었고, 따뜻한 체온과 조금 서늘한 체온이 동시에 느껴졌다.
'엄마의 품에 안겨 봤으면 좋았을 텐데.’
봄 날씨는 너무나 따뜻하고 좋아서, 이러한 행복을 나 혼자 즐긴다는 것이 어째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나는 위로를 받고 싶어 고개를 더욱 파묻었다.
따뜻한데 공허한 마음이 드는 것은 그저 봄이어서 그런 거겠지.
그래, 분명히 그럴 것이다.
어쩐지 엄마가 보고 싶었다.
당장 달려가 품에 안겨서 어리광을 피우고 싶을 만큼.
'…엄마 보고 싶어.'
내가 친엄마를 떠올리며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것을 알면 과연 엄마는 나를 이전과 마찬가지로 안아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