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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딸로 태어났다-39화 (39/185)

제39화.

즐거운 하루하루가 이어져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유독 봄은 빠르게 지나갔다.

봄이 끝나 가고 초여름이 찾아와 옷도 가벼워졌을 때 오래간만에 신전에 찾아갈 날이 되었다.

"조심해서 다녀오렴."

신전에 가는 날은 엄마가 이른 출근도 마다하고 언제나 나를 배웅해 주었다.

나는 엄마와의 포옹을 떠올리며 오늘은 조금 더 나은 결과가 나오기를 감히 신께 기도했다.

처음처럼 외부인이 들어오지 못하게 막을 순 없었지만, 최대한 조용히 신전에 방문했다.

성녀의 신성력까지 받으면서 감히 내가 이런 대우를 받아도 되는 것일까, 꿈이 아닐까 착각이 들고는 했다.

“다프네가 아픔을 씩씩하게 이겨내 줘서인지 많이 나아졌네요."

성녀의 말은 신에 의해 낮은 곳으로 떨어진 자존심을 올려 준다.

“자, 손을 잡고서 천천히 일어나 볼래요?”

장갑을 낀 그녀의 손에 내 손을 올리고 다리에 힘을 주고서 천천히 일어났다.

처음에는 발을 미세하게 떠는 것이 고작이었는데 몇 개월 치료를 받았다고 벌써 자리에 설 수 있게 되었다.

“조금씩 앞으로….”

다리에 힘을 주어서 발을 앞으로 움직였다.

의도한 것도 아닌데 천천히 움직이는 발은 바닥에서 떼어지더니 위로 올라가다, 다시 아래로 떨어졌다.

1분가량이 흘러서야 반걸음이 내 디뎌진 것이 보였다.

다시 힘을 주어 바로 반대 발을 움직였다.

그렇게 한 걸음을 걸었다.

"오, 신이시여.”

악셀리우스의 감탄에는 기쁨이 가득했다.

악셀리우스의 말처럼 나도 속으로 신을 찾으며 이 순간의 감정을 참기가 힘들었다.

“거, 걸었어요!"

비록 누군가의 도움으로 섰고, 고작 한 걸음 내디뎠을 뿐이지만.

거의 반년 만에 스스로 일어난 느낌은 너무 새로워서 다시 태어난 기분이 들 정도였다.

“이렇게 기쁜 날을 그냥 보낼 수는 없죠. 조금씩 나아 가니 오늘은 성수에 발을 담가 보도록 해요.”

성수를 고작 발을 담그는 용도로 사용해도 되는 걸까?

내 표정이 흐려지자 성녀가 싱긋 웃었다.

"어머, 어린애는 이런 표정 짓는 것 아니란다.”

내가 무슨 표정을 지었지?

영문 모르겠다는 듯 눈을 깜빡이자 그녀가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내가 다시 휠체어에 앉도록 도와주었다.

“성수는 지하에 있단다. 거기까지 가는 길은 멀지 않으니 금방일거야. 훨씬 도움이 될 테고."

성녀의 말에 오히려 악셀리우스가 더 신나서 발걸음을 가볍게 놀린 것은 비밀 아닌 비밀이었다.

지하에 있는 분수대에서 퍼 올린 성수에 발을 담그고 나서야 오늘의 치료도 끝이 났다.

치료가 끝나자 악셀리우스는 직접 물기 어린 발을 닦아 주었다.

'대공이 평민 여자애의 발을 닦아 주다니.’

귀족들에 대해서 잘 모르지만 아마도 보는 사람들은 기겁하지 않을까?

그도 그럴 것이 저 멀리 보이는 기사가 눈이 마주치자마자 재빨리 고개를 돌리는걸.

하지만 그런 것들은 신경도 안쓰이는지 악셀리우스는 신이 난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오늘을 기념으로 집에서 파티라도 열까?”

그 집은 아마도 우리 집을 이야기하는 거겠지.

‘아저씨는 집에 들어가기는 하는 걸까.'

요즈음 매일 놀러 오는 것 같은데.

집에서 가장 큰 어른이어서 아무도 뭐라고 안 하는 걸까?

평상시에는 눈치 빠르게 내 표정을 읽더니 오늘은 내 의문 어린 얼굴에도 케이크에 초까지 붙이고 다 같이 축하하자며 신이 나 보였다.

제과점에서 케이크도 사 가자고 말하며 신나게 나온 것까지는 좋았는데.

“이런. 비가 오네.”

분명 처음 들어올 때만 해도 햇볕이 가득한 따사로운 날씨였는 데, 변덕스러운 날씨는 하늘에서 천둥과 번개를 내뱉고 있었다.

그도 모자라 뭐가 그리 서러운지구름 또한 비를 힘차게 뿌리고 있었다.

"너무 많이 오는데."

신전에서 숲까지는 굉장히 멀었다.

무엇보다 이 정도 비면 땅이 질척해져서 마차가 움직이는 데 어려움이 있을 것이다.

마부가 앞을 보기 힘들 정도니 말을 다 했지.

악셀리우스는 잠시 고민하더니 허리를 숙여서 내 보닛을 잘 고정해 주었다.

"일단 수도에 있는 내 저택에 가자꾸나. 거기서 비를 좀 피하다가 가야겠어.”

“…대공 저에요?”

“그냥 평범한 집이야."

악셀리우스가 민망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말했지만, 그 잠깐 머릿속으로 많은 생각이 지나쳤을 거다.

'잘못하면 또 이상한 소문이 날 수도 있으니까.’

신전의 사람들은 모두 악셀리우스의 편이지만 귀족들은 그렇지 않을 것이다.

체이너드 대공을 못마땅히 여기는 사람이 당연히 있을 테니 더 조심해야겠지.

“클로에에게도 연락을 해 둘 테니 걱정하지 말고.”

"응, 알겠어요.”

“그러고 보니 다프네는 아저씨네 집 처음이네.”

굳이 갈 필요가 없이 악셀리우스가 매일 놀러 오니까?

하지만 그렇게 말했다간 저 마음씨 여린 울보 아저씨가 상처 입을 수도 있으니 그저 고개만 끄덕여주었다.

엄청난 비를 맞는 마부 아저씨를 위해서라도 우리는 최대한 빠르게 마차에 올라탔다.

악셀리우스가 나를 안고서 망토로 비를 가려 준 덕분에 나는 거의 젖지 않았다.

하지만 악셀리우스는 아니었다.

그 짧은 거리를 뛰었을 뿐인데 흠뻑 젖은 모습에 시선이 갈 수밖에 없을 정도였다.

내 시선이 닿자 그가 머쓱하게 웃으며 주섬주섬 품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비가 엄청나다. 그렇지?"

"아저씨, 다 젖었네요.”

“조금 젖었네. 괜찮아, 이 정도는 손수건으로 닦으면….”

나는 그런 그의 손을 꼭 잡았다.

“다프네?”

왜 그러냐는 물음에 나는 힘을 주어서 손수건을 꼭 붙잡았다.

"나 때문에 비 많이 맞았으니까.

내가 닦아 줘도 돼요?"

“.…그럼 물론이지."

악셀리우스가 손을 펴자 손수건이 내 손에 쥐여 졌다.

눈치도 좋고, 센스도 좋게 그가 고개를 숙여 주었다.

나는 그의 얼굴에 송골송골 맺혀 있는 빗방울을 조심스럽게 닦아주었다.

“고마워요. 아저씨 덕분에 비도안 맞아서 감기에 걸리지는 않을 것 같아요.”

부끄러움을 참고서 고마움을 표현했다.

겨울에 앓던 감기가 너무나 독했기에 가족들이 또 걱정할 일이 생기기 전에 예방이 되어서 다행이었다.

“비가 와서 다행인 걸? 다프네가 이렇게 직접 닦아 주기도 하고."

능글맞게 짓는 웃음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왜 엄마가 아저씨가 입 열면 한 대씩 때리는지 알 것 같아요."

“응?”

“농담이에요.”

역시 대공에게 하기에는 도 넘은 발언 같지?

나는 빨리 어린아이의 실수인 척말을 철회했다.

몇 번이고 젖은 손수건을 꾹꾹눌러 닦아 주자 대충 얼굴에 묻은 물기는 다 닦아 낼 수 있었다.

손을 내리자 그가 기다렸다는 듯 머리를 가볍게 털었다.

나는 손수건이 생각보다 낡은 것에 신기해하며 펴 보았다.

손수건 끝자락에 작은 꽃과 악셀리우스의 이름이 수놓인 게 보여 괜히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소중한 손수건인가 봐요."

"그래? 그렇게 보여?"

“네. 아저씨는 대공이잖아요. 높은 귀족 아저씨인데 일부러 오래된 물건을 들고 다니면 소중하기 때문이 아닐까 했어요."

내 말에 그가 흐뭇한 표정으로 웃으며 말했다.

“날씨가 따뜻해도 다프네가 라그나르가 준 목도리랑 장갑을 끼고 다녔던 것처럼?"

“네.”

그 말에 뭐가 그리도 좋은지 악셀리우스가 웃었다.

평상시랑은 조금 다른 웃음이었다.

눈가를 붉히며 어쩔 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그리고 또 행복하다는 듯 부드럽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주 예전에 클로에가 선물해 준 거야. 내 보물 1호니까 다른 사람에게는 비밀로 해야 한다?"

“엄마가 준 선물… 아저씨는 정말 우리 엄마 좋아하는구나.”

“세상에서 제일.”

그렇게 말하는 악셀리우스의 눈가에는 행복한 웃음이 가득했다.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저렇게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은 게 사랑인 걸까.

끝이 보이지 않고, 결실이 보이지 않는 사랑에 이렇게 감정을 부을 수 있는 게 어른인 걸까?

어쩐지 지켜보는 나까지 행복해지는 기분은 착각이 아니지 않을까.

**

도착한 대공 저는 내 상상보다 매우 컸다.

진짜 컸다.

엄청 커서 눈에 다 담기도 어려울 정도였다.

나는 휘둥그렇게 뜬 눈을 이리저리 굴리기 바빴다.

만약 정문 앞에서 내렸다면 커다란 정원을 구경했을 텐데.

아니 오히려 비가 와서 주변에 사람이 없으니 다행으로 생각해야 할까?

곧이어 저택의 문이 열렸고, 엄청난 인사 소리가 들려왔다.

“오셨습니까, 대공 저하."

대공 저에서 일하고 있는 하인과 하녀들이 모두 나온 듯 로비에 모여 허리를 굽혀서 인사하는 모습은 솔직히 충격이었다.

악셀리우스가 손을 흔들며 그들을 물렸다.

그 손짓 한 번에 모두가 원래의 자리로 돌아갔고, 미리 말이 전해졌는지 나이가 지긋한 하인과 하녀만 남았다.

“오늘은 특별한 손님이 있어서 말이야. 다프네, 우리 집의 집사와 하녀장이란다.”

“안녕하세요.”

소개를 받아서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서 인사를 했다.

낯선 사람들을 만나는 것은 오래 간만이라 괜히 더 악셀리우스의 품에 파고들자 그가 기분 좋게 나를 받쳐 들었다.

“상단에는 연락했겠지?"

"예. 비가 그칠 때까지 부탁한다.

고 전해 달라 하셨습니다."

“보아하니 쉽게 그칠 비가 아닌데.”

악셀리우스의 말처럼 비는 그칠 기색 없이 끊임없이 퍼붓고 있었다.

과연 오늘 안에 그치긴 할까 걱정이 되었다.

저녁이 다가오는지 하늘이 어둠에 물들기 시작했다.

'혹시 여기서 자고 가게 되는 건 아니겠지?'

갑작스럽게 흘러가는 상황에 내가 긴장되어 몸을 덜덜 떨었다.

악셀리우스가 그걸 어떻게 받아 들였는지 화들짝 놀라며 바로 명령을 내리기 시작했다.

“우선 다프네가 감기에 걸리지 않도록 목욕물을 좀 부탁하지. 집사는 편히 입을 수 있는 실내복을 준비해 주고,”

집사 할아버지는 빠르게 대답을 하고서 사라졌다.

대공 저에 내가 입을 만한 옷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어떻게든 구해 오겠다는 의지가 느껴지는 단호한 걸음이었다.

하녀장 할머니는 내게로 팔을 뻗었다.

“불편함 없이 모시겠습니다.”

"아, 욕실까지는 내가 데리고 가지.”

그녀는 말대꾸 한마디 없이 바로 팔을 내렸다.

이곳에는 감히 대공의 말을 무시할 사람이 없었다.

엄마의 한마디에 이리저리 휘둘리는 울보가 아닌 이런 위엄 있는 모습이라니.

어쩐지 울보 아저씨가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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