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0화.
“목욕은 괜찮으셨나요, 아가씨?"
"네. 괜찮았어요.”
나이가 지긋한 할머니가 지극정성으로 나를 돌보다니 굉장히 기분이 이상했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넓은 욕조라든가, 따뜻한 물은 기분이 좋았기에 솔직하게 답했다.
그 미소에 더욱 흐뭇한 미소가 돌아왔다.
“이렇게 예쁜 아가씨가 대공 저에 방문하다니 오래 사니 별일이다 있네요.”
웃음기 섞인 목소리에는 기쁨이 서려 있었기에 괜히 입고 있는 옷을 만지작거렸다.
'예쁘다.'
이곳에 없으리라 여겼던 아이용 실내복이 나에게 꼭 맞는다는 사실이 조금 놀라웠다.
부드러운 옷감이 살을 스르륵 스치는 감촉은 어쩐지 시원해서 기분이 좋기까지 했다.
"잘 어울리시네요. 대공 저하께서 아가씨에게 선물 드리고 싶다며 구매하는 것을 말리지 않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 정도예요.”
“…아저씨, 아니 대공님이 저를 주려고 산 거예요?"
내 말에 하녀장은 그렇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입가에 지어진 미소를 보아하니 조금 전의 내 실수도 가볍게 넘긴 모양이다.
“자신을 아저씨라고 부르면서 따르는 귀여운 딸 같은 아이가 생겼다고 하셨을 때는 무슨 소리인가 했었는데….”
걱정하는 특유의 낮은 목소리에 문득 드는 생각을 물었다.
“제가 대공님이랑 많이 닮았어요? 친딸로 보일 만큼?"
“친딸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미리 듣지 않았다면 믿지 않았겠지만요.”
나는 괜히 거울을 바라보며 머리를 꼬았다.
눈동자 색을 빼면 얼굴은 그렇게 안 닮은 것 같은데.
그러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어쩐지 기쁜 마음이 들어서 배시시 웃었다.
‘차라리 아저씨의 딸이었으면 그런 일은 겪지 않았겠지.'
불과 몇 달 전이기 때문일까.
이렇게 비가 온다거나 어두운 날이면 새록새록 안 좋은 기억이 떠올라 피곤이 밀려오곤 했다.
사랑과 다정함을 겪어 보니 이게 얼마나 소중한지를 알아서 그럴까.
그런 사랑을 줘야 할 친아버지가 매정하게 내친 것이 더욱 서럽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식사 전에 따뜻한 차를 가져다드릴게요. 선호하시는 차가 있으실까요?”
"아무거나 좋아요."
하녀장은 금방 다녀오겠다며 방을 나섰다.
나는 소파에 앉은 채 괜히 다친 다리에 힘을 주며 꼼지락거렸다.
이거라도 하지 않으면 떠올리기 싫은 안 좋은 기억들이 나를 감쌀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똑똑-
그렇게 혼자 시간을 보내는데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간 지 얼마 안 됐는데?'
하녀장이 벌써 돌아온 것인가 싶어서 빠르게 들어오라 말했다.
하지만 내 예상과 다르게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하녀장이 아니었다.
“황태자 전하?"
낯설지 않은 청은발, 그리고 은색의 눈을 가진 유일한 황족.
그리고 나를, 아니 정확히는 내 눈을 싫어하는 황족.
다리가 이래서 제대로 인사도 못해 어찌해야 하나 난감해 하니 그가 괜찮다며 내게로 다가왔다.
“됐어. 몸이 아픈 것을 알고 있는데 무리하지 말도록."
“......."
“그렇다고 인사도 안 하나?"
작은 타박에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어떻게 인사를 해야 하는지 아직 배우지 못해서….”
“대공은 그것도 안 가르치고 뭐한 것인지."
“다음에 배워 올게요. 아, 다음에도 보는 일이 있으려나…."
중얼거린 말에 황태자가 빠직 소리가 날 정도로 미간을 구기더니 불만 가득한 얼굴을 했다.
“있을 수도 있지.”
“글쎄요. 그런데 오늘은 어쩐 일이세요?"
"......."
황태자가 방문했다면 악셀리우스와 대공가의 고용인들이 모를 리가 없을 텐데.
내 물음에 그가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혹시 제가 무례해서 화나셨어요?”
그의 반응에 오히려 당황한 것은 나였다.
황족, 그것도 나를 싫어하는 황태자라는 자가 이렇게 불쾌함을 드러내는데 눈치를 보지 않고 배길 사람이 있을까.
'혹시 인사를 못 해서 화가 난 걸까? 하지만 괜찮다고 했는데.'
이 침묵이 너무나도 무거웠다.
그리고 무서웠다.
"아니. 괜찮다고 했잖아.”
“그런데 미간에 이렇게 주름이 생긴 걸요.”
앞에 앉은 황태자를 따라 하듯 표정을 찌푸리자 그가 입술을 꾹깨물었다.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데 그렇게 보여서 할 말이 없나 보다.
“…화 안 났어. 정말이야.”
"네에.”
일부러 말끝을 흘리며 모른 척살펴보니 어느새 이마에 진 주름이 펴져 있었다.
거짓말은 아닌가 보다.
“그런데 정말 왜 오셨어요?”
“…비 피하러 온 거야.”
“어디서요?"
“…신전에서.”
그 말이 무슨 소리인가 한 5초 정도 생각해 보았다.
'신전에 황태자가 있다는 말은 없었는데.'
혹시나 한 마음에 물었다.
“우리 뒤를 따라오셨어요?"
“말 걸려고 했는데 못 끼어들었을 뿐이야!”
“깜짝이야.”
내 말이 정확했는지 갑자기 높아지는 언성에 놀라 가슴에 손을 얹었다.
“…왜 혼자 놀라고 그래?"
“갑자기 소리 지르면 무섭잖아요.”
“무서워하라고 그런 것 아냐.”
“전 무서웠어요.”
그 말에 황태자가 끙 하고 앓는 소리를 내더니 한숨을 푹 내쉬곤 머리를 쓸어 올렸다.
"그래, 그럴 수도 있겠네. 주의하도록 하지.”
사과할 생각은 없나 보군.
하긴, 권력의 정점에서 두려울 것 하나 없이 살아왔으니 그럴 만도 하겠네.
“그래서 정말로 왜 오신 건지 안알려줄 건가요?”
낯선 곳이어서 그런지, 아니면 피곤해서 인지 몰라도 그러면 안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예민한 반응이 튀어나왔다.
'하지만 계속 말을 미루니까 짜증이 나잖아.'
어린애니까 이 정도는 봐주겠지.
화를 안 낸다고도 약속했고,
“그때 그….”
“그때?"
그때라니?
지난번에 만났을 때를 이야기하는 걸까? 굳이, 왜?
불쾌한 기억에 저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에 황태자가 깜짝 놀라며 물었다.
"너, 넌 왜 금색 눈이 싫지?"
“그거 물어보려고 여기까지 쫓아 오셨구나.”
"......"
딱히 부정이 돌아오지 않았다.
쫓아온 것 맞구나.
그의 콤플렉스에 대해 처음 보다 더 자세히 알게 되어서 그런지 그 때만큼 화가 나거나 무서운 느낌은 줄었다.
역시 어린애라서 화를 조절 못했구나 정도?
물론 한 번 더 무례하게 군다면 그의 원래 성품이 그렇다고 여기겠지만,
‘…어린애들이라도 얼마나 악독해질 수 있는지 누구보다 잘 아니까.'
거기에 권력이 더해졌다면 무슨 말이 필요할까.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 귀찮은 황태자의 궁금증을 해결해 주고 빨리 돌려보내야겠다.
"별것 없어요. 내가 금색보다 보라색을 좋아해서 그래요."
“…왜? 금색은 황실의 상징적인 색이고, 고귀함을 증명해 줄 텐데.”
“제가 그걸 증명 받아서 뭐해요?”
무슨 말도 안 되는 질문을 하는 걸까.
나는 짜게 식은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이해가 안 간다는 듯 고개를 기울이는 것을 보며 나오려는 한숨을 삼키며 말을 이어 갈 수밖에 없었다.
“전 황족이 아니니까 필요 없다는 뜻이었어요.”
“…그런 것치고는 전에 이상할 정도로 싫어하는 모습을 보여 줬잖아.”
하아.
이번에는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이 이야기가 나오면 어쩔 수 없이 떠올리기 싫은 사람이 떠오른다.
“싫어하는 사람이 가진 색이어서 싫어요.”
“싫어하는 사람이라니. 고작 그런 이유로….”
별것 아닌 듯 넘기려는 말에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난 싫어요."
“.…난 오히려 좋아하는 사람들이 가진 색이 금색인데.”
우울한 목소리가 저절로 흘러나왔다.
갑자기 하소연하려는 생각인 걸까?
아직 내 악몽도 완벽하게 떨쳐 내지 못했는데 무슨 고민 상담을 해 줄까.
그렇게 생각을 했지만 침울한 표정의 황태자를 보니 그런 말을 꺼내기가 힘들었다.
“고민 들어 드릴까요?"
“뭐?”
“엄마가 그랬어요. 나쁜 마음을 속에 쌓아 두면 병이 된다고.”
상황 파악이라도 하는지 황태자가 그저 눈을 깜빡였다.
이제야 첫인상과 다르게 그 나이 대 소년으로 보였다.
“병이 생기면 아프니까요. 들어줄게요.”
감히 황태자에게 하기에는 건방진 말이 분명했다.
하지만 흔들리는 저 눈빛을 보니 그는 내게 화를 내지 않을 것 같았다.
"네가 뭐라고….”
하지만 그런 말도 잠시, 고민에 휩싸인 표정은 금세 허물어졌다.
그리고 황태자의 입이 열렸다.
* * *
“대공 저하. 베네디토 상단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뭐라고 왔지?”
악셀리우스의 말에 집사 아가테가 바로 소식을 전했다.
“비가 밤새 내릴 것 같으니 하룻밤만 신세를 질 수 있게 해 달라고 부탁하셨습니다.”
“클로에가 그렇게 말한다면 비는 밤새 오겠군.”
악셀리우스는 곤란하다는 듯 말했다.
“그런 것 치고는 표정이 좋아 보이시는데요.”
"이런. 그렇게 보이나?"
말은 아닌 척했지만 악셀리우스는 입가에 미소를 지으면서 앞에 놓인 물건들을 뒤적였다.
방에는 예쁘게 포장된 선물 상자들이 한가득 있었다.
“이 옷은 어떤가? 다프네와 어울릴 것 같지 않아?"
“무엇이든 잘 어울리실 외모셨는 걸요.”
아가테의 말에 악셀리우스가 마치 자신이 칭찬받은 듯 웃었다.
“그렇지? 이것들을 어떻게 주나 했는데 이렇게 기회가 생겨 버렸네.”
“다행히도 비가 오니 주변에 사람도 없고 말이죠.”
“귀찮은 녀석들이 달라붙지 않으니 자연스럽게 초대할 수도 있고 오래간만에 날씨에 고마워하게 됐어.”
악셀리우스가 입가에 비틀린 웃음을 지었다.
다프네가 본다면 그렇게 다정한 사람이 저런 미소도 지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 만큼 위협적인 느낌이 드는 미소였다.
“시몬에게 쓸데없는 소리를 넣는 귀족들이 누군지 찾았나?"
악셀리우스의 말에 아가테가 차분한 목소리로 답했다.
"아마도 귀족파 쪽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헤로니스 공작이 의심되기는 합니다."
아가테의 말에 악셀리우스가 조금 놀란 듯한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헤로니스 공작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