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녀의 딸로 태어났다-41화 (41/185)

제41화.

예상치 못했다는 듯 놀란 표정이 이내 짙은 혐오감을 담아 내었다.

작은 욕설도 함께였다.

"어른들의 일에 휩쓸리게 하고 싶지 않은데.”

악셀리우스는 신전에서의 일 이후로 만나지 못한 제 조카를 생각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안 그래도 주어지는 부담감이 클텐데, 어릴 적부터 눈에 콤플렉스를 갖고 있어서 그런지 그간 더 예민해 진 것 같았다.

"다 큰 어른이란 놈들이 권력에 미쳐서 어린애를 데리고 이리저리 갖고 놀려는 꼴도 더는 못 봐주겠군.”

"간단히 경고라도 하시는 게 어떠십니까.”

악셀리우스는 멈추지도 않고 별것 아니라는 듯이 답했다.

“수도로 돌아오자마자 보란 듯이 활동하면 더욱더 압박을 넣을 놈들이야. 약은 새끼들."

“대공 저하.”

"내 집인데 말투 정도야 뭐 어떤가. 보는 눈도 없는데.”

아기자기한 옷과 신발 사이로 무언가가 반짝였다.

"아. 이걸 잊고 있었군."

첫 선물이라면 갖고 싶은 것을 주는 게 좋겠지.

물론 남은 것은 돌아가는 마차에 함께 실어 갈 것이지만.

그렇게 줄 선물을 골랐을 때 아가테가 갑자기 뜬금없는 질문을 꺼냈다.

“그런데 정말로 아가씨가 저하의 자식이 아닌 것이 확실합니까?”

즐겁게 움직이던 손이 저절로 멈추었다.

“클로에가 그렇다면 그런 거야.

자세히 보면 그렇게 닮지도 않았어.”

"모르고 보면 똑 닮았던걸요."

"아가테. 클로에는 거짓말을 할 사람이 아니야. 내 아이였다면 숨길 여자도 아니고.”

그 말에 아가테가 동의한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히려 책임을 피하지 말라며 멱살 잡으실 분이죠.”

“그렇지.”

멈췄던 손이 다시금 움직였다.

“하지만 짧은 시간이나마 함께 지내 보니 참 예쁘고 귀여운 아이더군. 진짜로 내 딸처럼 여겨질만큼 말이지.”

“… 괜찮으십니까?"

“그럼, 괜찮지. 오히려 즐거워.

이게 육아인가 싶기도 하고.”

귀여운 꼬마들 보는 재미가 있다.

며 그의 입가에 자연스러운 미소가 지어졌다.

“그러니 하루만이라도 부족한 것 없이 대하도록.”

“여부가 있을까요.”

“좋아, 그럼 이제 선물을 주러가 볼까.”

시간이 된다면 대공 저를 구경시켜 주는 것도 좋을 것이다.

평상복으로 갈아입은 악셀리우스는 즐거운 발걸음으로 방을 나섰다.

그의 손에는 바닥에 널린 큰 상자와 비교되는 작은 상자가 쥐여져 있었다.

***

“대대로 황족은 금색을 물려받았어. 아버지도, 할아버지도, 심지어 작은 아버지인 대공까지."

자리를 마련해 줘서인지 황태자의 입에서 쉴 새 없이 말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평상시 감정 조절을 하고 살아서일까.

분노를 터트림에도 표정은 담담하여 오히려 차갑게 느껴졌다.

“그런데 나만 없어. 모든 황족 중에서 나만 금색을 못 가졌대.

모두가 겉으로는 괜찮다고 하면서 뒤에서는 내 존재 자체를 의심해!”

차가운 분노 속에는 쉽게 표현할 수 없는 울분도 담겨 있었다.

"왜, 왜 내게는 없는 거지? 왜…

왜 없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아.”

남들의 시선이 신경 쓰여서일까.

조용한 울부짖음에는 나이에 맞지 않는 억울함이 담겨 있었다.

“뒤에서 떠드는 자들은 하나같이 모두 같은 이야기들을 해! 금색만이 황가의 상징이고, 이어 가야 한다고! 일부러 그것을 끊임없이 지적해!”

분명 서글프겠지.

억울하기도 할 거다.

태어나기를 그렇게 태어난 잘못 밖에 없으니까.

자신이 원해서 이렇게 태어난 게 아닌데도 불구하고, 그의 고민을 별것 아닌 투정 정도로 가볍게 생각했던 것이 역겨울 정도였다.

'남 얘기가 같지가 않아서 그럴까.’

우리는 잘못이 없는데 어째서 주변에서 떠드는 자들 때문에 이렇게 괴로워해야 하는 걸까.

'황태자도 나도 아직 어린데.'

우리의 잘못도 아닌데 지고 가야 할 무게가 너무 무거웠다.

주변이 조금 나아졌다고 건방을 떠니 신이 자각할 수 있는 일을 만들어 준 걸지도 몰랐다.

'속이 울렁거려.’

황태자는 어느새 울먹이고 있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속에만 깊이 담아 두었던 말을 꺼내는 것이 이렇게 어려운 일이다.

"난, 난.."

바보 같아.

내 상처도 제대로 치료 못 했으면서 뭐가 잘났다고 남의 상처를 보듬어 주려고 했을까.

“…왜 꼭 금색이어야 하는데요?"

그래서 그런지 입에서 튀어나온 말은 불경하기 짝이 없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신경 쓰지 못한 채 뚫린 입은 계속해서 감히 그 누구도 허락하지 않은 말을 꺼내었다.

"금색 눈을 갖고 있지 않다고 해서 전하가 황태자가 아니게 되나요?”

“아니."

“그럼 부모님께서 자식으로 인정을 안 해 주셨나요?"

“아니야! 아바마마와 어마마마는 나를 사랑해 주시고, 아껴 주셔!"

그렇다면 뭐가 문제라는 걸까.

나는 짓이겨져 나오는 비웃음을 참지 못했다.

“부모님께서도 인정해 주시고, 황태자로서 지위도 변함이 없는데 뭐가 문제가 돼요?"

“…뭐?”

“저는 이해가 되지 않아요.”

그에 황태자가 더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차피 전하가 황태자라는 것은 변함없는데 왜 주위 사람들 말에 그렇게 휩쓸려야 해요? 왜 괴롭고 아파해야 해요?"

"…당연히 금색을 갖고 태어나지 못했으니까.”

“그렇게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게 아니잖아요.”

황태자의 입에서 작은 탄식이 튀어나왔다.

“이건 전하의 잘못이 아니잖아요.”

탄식 뒤로 한참 나오는 말이 없었다.

못된 아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내 입에서 튀어나오는 말은 거침이 없었다.

“뭐, 부모님이 인정해 주지 않고 황태자의 지위가 흔들린다고 해도 달라질 건 없어요.”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야."

“인정 못 받고 흔들리면 어때요?

그런 상황이어도 전하는 아무런 잘못도 없는데.”

그래, 이건 내게도 하는 말과 같다.

무섭지만, 남들의 시선이 두렵지만.

난 잘못이 없는걸.

황태자를 위한 위로라고 생각했는데 웃기게도 자신에게 던지는 말처럼 느껴져 쓴웃음이 지어졌다.

“잘못도 없는 사람을 욕하고 괴롭히는 게 더 나쁜 사람 아니에요?"

잠잠하던 황태자의 목소리가 떨려왔다.

“…넌 내가 금색 눈이 아니어도상관없어?”

“상관없어요.”

“왜?”

애가 타는 그 표정은 아마도 내 대답에 따라 달라지겠지.

“금색 눈이든, 은색 눈이든 전하는 전하시잖아요. 어차피 최고의 자리에 오르실 텐데 그게 무슨 상관이에요?”

일만 잘하고, 백성들 아껴 주면 그만이지.

뒷말은 분위기상 생략했다.

곧 그의 눈에서 전조도 없이 갑자기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지금껏 누구도 내 눈이 괜찮다고 말해 주지 않았어. 사실은 아버지도 어머니도 내 눈 색을 아쉬워하시고, 또 미안해하시고."

그의 눈에서 흘러내린 한 줄기 흘린 눈물방울은 아래로 떨어졌다.

"난 이런 말을 듣고 싶었어. 금색이 아니어도 괜찮다는 말."

꽉 쥐여진 그의 주먹 위로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졌다.

“나도 참. 너처럼 어린애한테 위로를 받다니."

고작해야 나보다 두 살 정도 많아 보이는데.

'나도 위로를 해 줄 처지는 아닌데.’

비가 와서 밖이 더욱 깜깜해져서 그럴까.

온 세상이 내게 회색빛과도 같았을 때가 떠올랐다.

악녀로 비참한 죽음을 맞이한 엄마, 악녀의 딸인 내게는 주어질 수 없는 행복이 당연했던 그 시절.

모두가 날 미워하는 게 당연하다.

고 여겼던 그때.

불과 몇 개월 전이었다.

그게 옳지 않고 사랑받으면 행복 하단 것을 이제야 조금씩 느껴가고 있는데.

안 좋은 기억이 떠오르는 날은 언제나 두려움이 가득할 수밖에 없다.

황태자는 위로를 받은 듯 들어왔을 때보다 편안한 웃음을 짓고 있었지만, 이번에는 오히려 내가 침울해졌다.

아직도 악몽과 같은 그날들은 생생하다.

아마도 평생이 가도 잊히기 어렵겠지.

그래도 죽지 않았음에 감사하면서 가족들과 라그나르와 함께 행복하게 살아갈 거다.

'그런데 왜 이렇게 불안할까.'

이야기가 비틀어졌으니까 이제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은데.

미래는 행복할 텐데 불행한 과거로 인해서 언제까지 이렇게 무서워하며 살아야 할까.

“그렇게 말해 줘서 고맙다고 말하고 싶군. 그리고….”

"그리고?”

“처음 만난 날 그대에게 저지른 무례를 사과하지.”

곧이어 흠흠 하고 어색한 헛기침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그 사과에 멍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나를 막대한 이들 중 그 누구도 내게 사과를 한 적은 없었는데.’

보육원의 아이들은 당연하게도 미안해하는 구석이 없었으니까.

권력의 정점에 앉은 황태자에게 사과를 들을 줄은 몰랐다.

'처음 받는 사과네.'

과거를 잊고 갈 수는 없겠지.

하지만 과거를 좋은 기억으로 바꿔 나갈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쁜 기억을 좋은 기억으로 하나하나씩 덮어 나가다 보면….'

당연한 사과임에도 어쩐지 너무 큰 위로가 되었다.

"안 받아 줄 건가.…?"

황태자면서 왜 내 눈치를 보는지.

불안한 표정으로 내 눈치를 살피는 황태자를 보니 침울한 감정이 떠나가고 어느새 입가로 작은 미소가 떠올랐다.

“사과받을지 몰랐어요."

“아버지께서 가르쳐 주신 말이야. 잘못한 것을 인정하는 게 제일 중요한 덕목이라고 말이야.”

“훌륭한 가르침이네요."

악셀리우스의 형이 되는 사람이 황제 폐하라고 했지.

성군이라는 말이 거짓말은 아닌 듯했다.

“흠흠, 인제 와서 말하기는 늦었지만 내 소개를 하지. 내 이름은 시몬 로벨리오 클레멘스, 이 제국의 황태자지.”

짐짓 근엄한 투로 말하는 게 귀엽게 느껴졌다.

나는 어떻게 소개를 해야 할지 잠깐 고민하다가 어차피 숨겨질 일도 아니니 편히 말했다.

“제 이름은 다프네 베네디토. 베네디토 상단의 후계자예요."

“..… 베네디토의 후계자라면, 상단 주의 딸인가?”

“네.”

시몬의 표정에 의심이 떠올랐다.

저 표정을 보니 무슨 생각을 하는 줄 알 것 같다.

“전 대공 저하의 딸이 아니에요.”

"…그래. 그렇다고 했으니까.”

찜찜하지만 그냥 넘어가겠다는 말투였다.

진짠데.

솔직하게 말할 수 없으니 어떻게 보면 악셀리우스만 억울한 상황이 될지도 모르겠네.

'필사적으로 아니라고 하고 다녀야겠다.'

그런 생각을 마치고서는 왜 하녀장이 돌아오지 않을까 생각하는데 시몬이 다시 흠흠 하고 헛기침을 했다.

무언가 할 말이 있는 것 같아 쳐다보자 그가 주먹을 쥔 채 입가를 가리며 계속해서 헛기침했다.

"하고 싶으신 말 있으면 해 주세요.”

“별건 아니고.”

"아니고?”

흐려지는 뒷말을 따라 하자 그가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다프네, 그대에게 나를 첫 친구로 맞이할 기회를 주고자 해.”

친구가 되어 달라는 소리인가?

무슨 말을 저렇게 돌려서 한담.

“죄송해요. 그럴 수는 없어요.”

당연히 허락할 것이라 생각했는지 시몬이 놀란 목소리로 외쳤다.

"뭐? 왜!”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