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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딸로 태어났다-42화 (42/185)

제42화.

“제 첫 친구는 라라인걸요.”

라그나르가 버젓이 있는데 어떻게 첫 친구라 속이겠는가.

“라라? 아니 상단 후계자가 무슨 친구야! 친구 사귈 시간도 없이 바쁘게 공부할 게 뻔한데.”

“제가 왜 전하께 거짓말을 하겠어요.”

합당한 말인지 그가 입을 삐죽이며 불만스러움을 표현했다.

말투는 안 그런데 이런 반응은 그 연령대 아이 같고, 조금 귀여 워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두 번째 친구 자리는 비었어요.”

“…지금 나보고 두 번째 자리로 만족하라는 건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첫 번째든 두 번째든 친구는 소중한 존재니까 괜찮지 않을까요?"

시몬이 기막히다는 듯 쳐다가 결국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시몬이라고 불러도 좋아.”

허락의 말이 떨어져 나왔다.

아무래도 시몬은 정말로 나랑 친구가 하고 싶었나 보다.

"그대는 내가 인정하는 첫 번째 친구니 기뻐해도 좋아.”

“전 그대라는 호칭보다 이름이 좋아요, 시몬.”

기껏 친구가 되자며 자기소개를 해 놓고서 딱딱한 관계를 이어 가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황태자인 친구를 사귀어 두면 나중에 상단을 운영할 때도 편할 거야.'

언젠가 라그나르와도 만날 일이 생길 수도 있겠지?

“그래, 다프네.”

시몬은 기쁜 듯 볼을 붉히며 웃고 있었다.

나는 그 미소를 보며 원작의 내용을 떠올렸다.

'분명 원작에서는 라그나르와 시몬의 사이가 안 좋았지.'

시몬은 여자 주인공에게 애증의 마음을 갖고 있었고, 그 마음을 인정하지 못해서 여자 주인공을 괴롭혔으니까.

'둘 다 내 친구니까 사이가 변할 수 있지 않을까.'

아마 나 하기 나름이겠지만.

이야기가 또다시 변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비가 오는 날 새로운 좋은 추억이 쌓였으니, 또 변화할 미래를 보았다.

내 미래는 변화하고 있는 게 확실했다.

“비가 멈추지 않는군."

그 말에 힐끗 시계와 창문을 번갈아 보았다.

벌써 저녁 시간이 다 되어 가는데도 내리는 비는 멈출 기세가 보이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하녀장이 곧 돌아온다고 했는데.”

"아, 그녀라면 내가 잠시 자리를 비워 달라고 부탁했어.”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갑자기 문이 벌컥 열렸다.

큰 소리에 깜짝 놀라서 뒤를 보자 정색하고 있는 악셀리우스가 보였다.

그 뒤에는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 하녀장과 시몬의 기사도 보였다.

“시몬!”

"아, 대공. 오랜만일세."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시몬의 말투엔 저번과 다른 여유가 보였다.

“도대체 언제 온 거지? 왔으면 나를 찾아왔어야지.”

오히려 시몬의 반응에 악셀리우스가 당황한 듯했다.

당황한 악셀리우스가 말을 쏟아내자 시몬은 별것 아니라는 듯 선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다프네를 보러 왔지. 지난번 일을 사과도 하고, 또 앞으로 친구가 되기로 했거든.”

그 말에 악셀리우스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마찬가지로 뒤에 있는 다른 이들의 표정도 이상해져 버렸다.

“…네가? 친구를?"

“응.”

시몬은, 그를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영락 없이 선하고 착한 아이로 믿을 만큼 기쁨에 가득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나는 그가 지난번에 악셀리우스에게 버럭버럭 화를 냈던 것을 보았기에 그의 진면목을 안다.

악셀리우스는 분명히 믿지 않을 것이다.

“가, 가증스럽게 다프네를 어떻게 꼬셨지!”

예상했던 대로 악셀리우스가 믿지 못하겠다며 소리를 질렀다.

그 반응이 이해가 되어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대공인 줄 알아? 난 평범하게 친구 하자고 했어.”

“뭐라고?"

성격이 비슷해 보이는 둘은 곧 왁왁하며 싸우기 시작했다.

나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눈 색이 다르다고 속상해하더니.'

눈 색만 다를 뿐, 싸우는 모습은 평범한 가족처럼 보였다.

사이좋은 모습이라 생각하는데 하녀장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내 옷 위에 숄을 걸쳐 주었다.

“죄송합니다, 아가씨. 금방 돌아왔어야 했는데.”

"괜찮아요. 전하가 막으셨잖아요.”

“이런 실내복으로 전하를 맞이하게 한 것도 죄송합니다.”

실내복이는 실외복이든 내가 보기에는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이는데.

'분명히 차이가 있겠지. 옷을 보는 안목도, 귀족의 예절에 대해서도 배워야 알 수 있겠지만.'

나는 치맛자락을 내려다보다가 괜찮다며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하녀장은 연신 죄송하다.

며 사과를 하고 챙겨 온 다과를 놓아 주었다.

“따뜻한 레몬차를 준비했답니다.

저녁 식사가 코앞이니 간식은 조금만 드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저녁 식사도 여기서….”

아무리 그래도 식사까지 하면 너무 늦어질 텐데.

"아, 맞아. 다프네, 클로에에게 연락이 왔어. 비가 너무 많이 내려서 위험하니 너를 하룻밤만 보살펴 달라고 부탁하더구나.”

“…결국, 여기서 자고 가는구나."

멈추지 않는 비를 보면서 어느 정도 예상하기는 했지만.

'가족들이 없는데 잘 수 있을까?'

저렇게 무섭게 쏟아지는 비가 무섭지 않을 수 있을까?

아직 자려면 멀었는데도 걱정되어 몸이 부르르 떨려 왔다.

“이런. 너무 걱정하지 마. 아저씨집도 사람이 사는 집이라서 생각보다 괜찮아.”

“…하지만 엄마도 없는데 제가 잘 수 있을까요?"

이렇게 비도 오고, 캄캄하고, 무서운 날에?

이런 날에는 엄마가 자장가를 불러 주고 잠들 때까지 옆에 있어주고는 했는데, 내 침울한 모습이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자 악셀리우스가 당황하며 나를 안아 들었다.

“혹시 악몽을 꿀까 봐 무섭다면 아저씨가 악몽을 쫓아내 줄게.”

“어떻게요?”

“자장가를 불러 줄까? 아니면 잠들 때까지 이렇게 안아 줄까?”

엄마가 해 주는 방법을 그대로 말해 놀라 버렸다.

진짜냐며 눈을 크게 뜨자 그가 웃음을 터트리며 내 자세를 편하게 고쳐 주었다.

'어떻게 이렇게 엄마랑 비슷할까.'

아이도 키워 본 적 없으면서.

내 미묘한 시선에 악셀리우스가 어색한 웃음을 터트렸다.

“시몬이 어렸을 때 자장가를 많이 불러 주고는 했거든.”

“언제 그랬다는 거지? 내 기억에는 없는데.”

그 말에 시몬이 아니라고 툴툴거렸다.

“딱 다프네 나이 정도에도 자장가 불러 달라고 했으니 퍽이나 기억이 안 나겠지.”

"내가 어렸을 때 변방으로 나갔는데 무슨 소리야!

악셀리우스가 일부러 놀리는 어조로 얄밉게 말을 하니 시몬이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고귀하고 오만한 황태자의 모습을 보여 주더니 이곳이 편해졌는지 귀여운 조카의 모습으로 돌아가 있었다.

옥신각신 다투는 둘을 보다가 혹시나 한 마음에 물었다.

"내가 몇 살이게요?"

“다섯 살?”

"아냐. 여섯 살.”

악셀리우스의 말에 시몬이 코웃음을 쳤다.

“둘 다 틀렸는데. 난 여덟 살이에요.”

"뭐?"

“말도 안 돼!”

왜 말이 안 되지?

아니나 다를까.

뒤에 있는 기사와 하녀장, 그리고 뒤따라온 듯 어느새 나타난 집사도 둘과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는 부루퉁한 표정으로 고개를 휙 돌렸다.

이래 봬도 몇 달 동안 간식도 잘챙겨 먹고, 편식도 하지 않고 밥도 잘 먹었는데.

'… 뭔가 억울해.'

이제 한 살도 더 먹었는데.

“그… 지금은 성장기여서 금방 쑥쑥 자랄 거야.”

악셀리우스의 어색한 위로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

“어휴.”

어쩔 수 없이 한숨이 튀어나왔다.

사실 나도 잘 알고 있다.

몇 년 동안 제대로 못 먹고 자랐는데 고작 몇 개월 편히 살았다고 몸이 쑥쑥 자라나지는 않을 거라는 걸.

'그래도 다섯 살은 심하잖아!'

아무리 봐도 내 눈으로는 일곱살 정도로는 보였단 말이야.

뚱한 기분이 풀리지 않자 보다 못한 하녀장이 다가왔다.

“아가씨는 어딜 보아도 여덟 살의 훌륭한 숙녀분이신데 다들 무심하시기도 하셔라. 그렇죠?”

“…여덟 살로 보여요?"

“그럼요.”

하녀가 빙긋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혹시 그거 아세요? 주방장의 음식은 맛있고, 영양도 좋답니다. 주인님께서 어린 시절부터 그분이 만들어 주시는 음식을 먹고 자라셨죠.”

지금의 악셀리우스를 만들어 준 음식이라는 걸까?

하녀장의 말을 듣고 악셀리우스를 보니 그가 눈이 마주치자마자 그 어느 때보다도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 시몬보다도 작았던 내가 이렇게 자랄 만큼 훌륭한 솜씨를 갖고 있단다.”

악셀리우스가 팔다리를 휘저으며 필사적으로 설명하자 뒤에 있는 집사도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악셀리우스는 체격이 대단한 사람이었다.

올려다보면 목이 꺾여 뒤로 넘어갈 정도로 키가 켰다.

지위 역시 나는 쳐다보지 못할 정도로 높은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나를 위해서 저렇게 필사적으로 변명하고, 기분을 풀어 주려고 하니 어쩐지 기분이 이상하다.

"배고파요.”

그러니까 삐진 척은 그만해야지.

조금 속상하기는 하지만 내가 작은 것은 사실이니까.

내 말에 뭐가 좋은지 악셀리우스가 다시 활짝 미소를 피워 냈다.

"그래? 그럼 우리 얼른 저녁 먹고 푹 쉴까?”

그러고는 미소만큼 팔을 활짝 벌려 다가왔다.

한 계절이 끝나가는 동안 자주 붙어 다녀서 그럴까.

나도 익숙하게 팔을 벌려 와락껴안았다.

'처음에는 불편했는데..’

누군가의 품에 안기는 것이 이제는 익숙해져서 편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렇게 나를 위해서 하나하나 배려해 주고, 변화하는 모습이 좋아.

'아저씨가 진짜 아빠라면 더 행복했을까?'

역시 나는 욕심쟁이인가보다.

친아빠처럼 다정하게 대해 주는데도 거기에 만족하지 못하고 더한 것을 원하니까.

지금이야 싱글벙글 웃어 주지만, 자라고 나면 주제가 넘는다고 나를 싫어하게 될 수도 있으니까.

나는 이 애정을 잃고 싶지 않은 마음에 그를 꼭 끌어안았다.

악셀리우스는 아무것도 모르고 웃으며 등을 도닥여 주었다.

'그러니까 그런 말은 안 할래.'

실수하지 말아야지.

버림받지 말아야지.

이 다짐을 잊지 말아야지.

그렇다면 나를 계속 따스하게 바라봐 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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