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4화.
"아저씨가 선물로 줬어.”
"고맙습니다.'라고 말했어?"
"......."
그러고 보니 기뻐서 감사의 말도 제대로 못 전했네.
“그만큼 기쁜 선물이었나 보구나.”
확실히 감사의 인사도 잊어버릴만큼 기뻐하기는 했었지.
다정한 목소리에 그랬던 것 같다며 고개를 끄덕이자 엄마와 악셀리우스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고마워, 악셀.”
"고맙기는, 네가 부탁 안 했어도 돌봐 줬을 거야."
둘은 어느새 둘만의 대화에 빠져 있었다.
“답례로 나도 네 부탁을 들어줄게.”
“우리 사이에 무슨.”
“왜 이래? 나 상인이야. 오고 가는 건 확실히 하는 사람이라고."
대화는 딱딱한데 둘을 감싼 분위기는 부드럽고 달콤해 차마 끼어 들기 조금 그랬다.
레녹스도 그 분위기를 느꼈는지 어색하게 멈춰 서 버렸고,
“그러면 다음에 같이 외출하지 않을래?"
악셀리우스가 데이트 신청을 했다.
엄마는 고민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스케줄이 괜찮으면."
그 말뜻은 안 괜찮으면 안 만나겠다는 뜻 아닌가?
저 불확실한 답에도 좋은지 악셀리우스는 기쁘게 웃었다.
너무 달달해서 녹아 버릴 것 같은 눈빛으로 엄마를 바라보고 있어서 끼어들기 미안하기는 했지만….
"아저씨.”
"응? 왜 그래, 다프네?"
“선물 감사합니다.”
내가 고개를 숙여 인사하자 엄마도 뒤늦게 머리에 달린 핀을 발견했다.
"너 언제 저런 걸….”
“아, 그냥 다프네에게 잘 어울릴 것 같아서.”
달달한 분위기가 한 번에 깨져 버렸다.
왜인지 모르겠으나 엄마의 목소리가 화가 난 듯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왜 그래, 클로에?"
“핀은 아직 나도 선물해 준 적없는데.”
“…응?"
엄마의 말을 이해 못 했는지 악셀리우스가 영문 모를 표정을 지었다.
퍽 억울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엄마로서 느낄 기쁨을 뺏어 가?"
"아, 아니.”
악셀리우스가 그게 아니라며 손사래를 쳤지만, 엄마는 고개를 획돌렸다.
분위기가 이상하게 흘러가는 듯해서 나는 레녹스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레녹스, 우리 집으로 들어가자.”
“그러는 게 좋겠네."
레녹스는 공감한다는 듯 뒷걸음 질을 치더니 재빠르게 그 자리를 벗어났다.
뒤에서 악셀리우스의 억울한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지만 우리는 무시하기로 했다.
집으로 들어오니 술래잡기라도 하는지 여전히 리카르다와 라그나르는 힘차게 뛰어다니고 있었다.
“거기 서라니까!"
“서란다고 서는 놈이 어디 있어!”
“라라!"
둘을 말리기 위해 이름을 부르자 뛰면서도 내 부름을 들었는지 라그나르가 재빠르게 내 쪽으로 뛰어왔다.
나는 레녹스에게 내려 달라고 한 뒤 몸을 살짝 틀어서 머리핀을 보여 주며 말했다.
"아저씨가 머리핀 선물해 줬는데 어때? 잘 어울려?"
반짝반짝한 나비 핀을 보여 주며 고개를 살짝 움직이자 부드럽게 정리된 머리카락도 살랑하고 귓가를 간지럽혔다.
“응?”
돌아오는 답이 없어 다시 물어보자 라그나르가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더니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너무 예뻐! 세상에서 다 프네가 제일 예뻐! 너무 예뻐서 누가 다프네를 데려가고 싶어 하면 어떻게 하지?"
과한 칭찬 같았지만 기분이 좋아 바로 앞에 있는 라그나르를 꼭 끌어안았다.
“괜찮아! 난 우리 집이 제일 좋으니까 안 따라갈 거야!"
"응!"
옆에서 우리의 대화를 들은 레녹스가 우리를 꼭 끌어안아 준 것은 셋 만의 비밀이었다.
* * *
봄이 끝나고 여름이 찾아왔다.
따갑게 내리쬐는 태양은 보기만 해도 뜨거웠으나, 리카르다의 마법이 닿은 곳은 서늘하여 외출하기 좋은 나날만 이어지고 있었다.
“옳지. 천천히 걸어 보렴.”
그리고 나는 그런 태양 아래에서 힘겹게 발을 떼고 있었다.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서 천천히, 또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 발이 땅에 닿을 때마다 마음속으로 기쁨이 차올랐다.
"다프네, 조금만 더 힘내!"
엄마와 라그나르의 응원 소리에 더욱 힘입어 다리를 움직였다.
'고지가 코앞!’
서서히 발의 힘이 풀리는 것을 느끼며 앞으로 풀썩 몸을 던지자 작은 타박이 돌아왔다.
“아가. 위험하니까 그냥 제자리에 앉기로 했잖니.”
“바닥보다 엄마 품이 더 좋은걸요.”
"너도 참.”
엄마가 나를 받아 들고서는 볼에쪽 하고 뽀뽀를 했다.
“장하다. 오늘도 수고 많았단다.”
신전을 다니기 시작한 뒤로 몇 달이 지났다.
치료 덕에 어느새 혼자서 설 수 있게 되었고, 잠시뿐이긴 했지만 도움 없이 걸을 수도 있게 되었다.
벌써 집 앞에 있는 나무까지 혼자 걸어 나올 수 있었으니 신이 날 수밖에 없었다.
"다프네, 물도 마셔."
"고마워, 라라.”
라그나르가 건네준 물병을 쥐고서 꼴깍꼴깍 마시는데 익숙한 마차 소리가 들렸다.
“클로에! 다프네! 라그나르!"
“악셀이 왔구나.”
우리는 시원한 나무 그늘 아래서 악셀리우스를 반겨 주었다.
“레녹스랑 리카르다는 어디 갔어?"
“여름이 돼서 바쁘지. 너야말로 연락도 없이 무슨 일이야?"
"아쉽네. 모처럼 신전으로 초대하려고 했는데."
악셀리우스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신전이라니?”
“곧 축제가 열려서 성녀가 바쁠예정이거든. 오늘밖에 시간이 안된다고 해서 왔어.”
“이런. 모처럼 함께 보낼 시간인데 아쉽구나.”
엄마가 투덜거리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외출 준비를 해 오겠다는 말에 악셀리우스가 황급히 엄마를 붙잡았다.
“지난번에 들어주기로 한 약속여기서 써도 될까?"
“뭐?”
“오늘은 정말로 신전에 외부인은 출입 금지거든. 같이 가자."
엄마는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라그나르를 혼자 두고 갈 수는 없어. 걱정돼서 어렵겠다. 미안.”
갑작스럽게 언급되는 자신의 이름에 라그나르가 화들짝 놀라며 외쳤다.
“저는 괜찮은데!"
“보호자도 없이 어린이를 혼자 둘 수는 없지.”
라그나르가 어쩔 줄 모를 정도로 단호한 반응이었다.
아쉬워하는 악셀리우스, 단호한 클로에, 눈치를 보는 라그나르.
그 셋을 번갈아 보면서 보다가 물었다.
“그냥 다 같이 가면 안 돼요?"
“?"
“하지만… 내가 가도 될까?”
라그나르가 평소보다 더 눈에 띄게 의기소침해졌다.
"나는 남들과 다르게 생겨서 다른 사람들이 싫어할 텐데.”
라그나르는 자신의 눈이 이상하니까 사람들이 도망칠지도 모른다며 시무룩했다.
"라라랑 외출도 하고 싶은데.…."
나는 간간이 신전으로 치료를 받으러 갔지만, 라그나르는 아니었다.
가끔 외출하는 나를 부러운 눈빛으로 보는 것을 모를 리가 없는 걸.
언제나 신전에 갈 때마다 눈에 밟혔단 말이야.
이 기회에 다 같이 외출을 하면 좋을 것 같은데.
“혼자서 기다리면 외롭잖아. 같이 가면 안 될까?”
"나도 가고 싶지만….”
라그나르가 우물쭈물하며 망설였다.
역시. 확실히 가고 싶은 마음은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울망울망한 눈으로 간절히 엄마를 올려다보았다.
“엄마, 안 돼요?”
“안 될 이유 없지.”
라그나르가 눈치를 보느라 차마마저 뒷말을 못 꺼내는 듯했다.
엄마는 작게 한숨을 쉬면서 라그나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외부인은 없으니까 괜찮을 거야. 걱정되면 모자나 색안경이라도 쓰고 나갈까?"
아! 그러고 보니 레녹스가 라그나르에게 선물해 준 색안경이 있었지.
“색안경을 끼면 눈은 거의 다 가려져서 괜찮을 텐데. 오, 그렇다고 무리는 하지 말렴. 나가기 무섭다면 집에 있어도 괜찮으니까."
".......”
라그나르는 나를 한 번, 엄마를 한 번, 악셀리우스를 한 번 보더니 이내 집으로 고개를 돌렸다.
“라라, 같이 가면 안 돼? 나 라라랑 같이 가고 싶어.”
내 대답에 라그나르는 으으 하고 앓는 소리를 내면서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라그나르. 가고 싶으면 가도 돼.
네 눈 가지고 누군가 뭐라고 하면 내가 혼내 줄게.”
이 말에 힘을 얻었는지 라그나르가 단단히 결심을 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나도, 나도 같이 가고 싶어!"
라그나르가 힘차게 대답했다.
그 대답이면 충분하다는 듯 엄마가 라그나르를 달랑 안아 들었다.
“그럼 다프네는 잠시 악셀이랑 있도록 하고. 우리는 외출 준비물을 좀 챙겨 오도록 할게.”
"다녀올게!”
엄마의 거친 행동에도 뭐가 재밌는지 라그나르가 함박웃음을 지었다.
집으로 사라지는 둘을 보니 어쩐지 분위기가 굉장히 자연스럽다는 것이 느껴졌다.
“함께 갈 수 있어서 다행이다.
그렇지?”
“으음.”
나는 의미심장한 얼굴로 악셀리 우스를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 악셀리우스가 왜 그러냐며 물었고, 눈을 깜빡이며 답을 해 주었다.
"다 내 덕이에요.”
“응?”
“엄마가 데이트 거절 안 한 거."
내가 라그나르를 설득했기 때문이니까 틀린 말은 아니었다.
악셀리우스는 멍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다가 이내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게. 다프네 덕분에 이렇게 함께 외출도 하네. 이거, 이거. 우리를 가족으로 오해하면 어떻게 하지?"
"엄마가 딱 잘라서 아니라고 할것 같은데.”
놀리는 내 말투에 악셀리우스가 너무하다며 킥킥 웃었다.
"내가 더 노력해야겠네.”
장난 반, 진심 반이 담긴 말에 함께 웃고 있으니 곧 엄마와 라그나르가 나왔다.
사이좋게 손을 잡고 나오는 모습에 저절로 미소가 나왔다.
'만약 내가 없었더라도 저렇게 둘이 사이가 좋았을까?'
원작에서는 사이가 좋았다는 말은 없었던 것 같은데.
‘오히려 내가 있어서 더 좋아진 게 아닐까?’
이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조금 가벼워지고, 뿌듯한 마음이 찾아왔다.
이 마음이 기분 좋은 외출의 시작을 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