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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딸로 태어났다-46화 (46/185)

제46화.

그 후로도 라그나르와 시몬이 화해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싫다는 애들을 묶어 놓을 생각도 없고, 나는 서로 노려보는 꼬맹이들을 뒤로한 채 성수에 발을 담그며 마저 치료를 받았다.

다행히 내 눈치를 보는 건지 두 사람은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렇게 조용한 신전의 평화가 돌아오는 듯싶었는데.

“다프네는 나랑 갈 거야.”

“아니, 다프네는 나랑 놀 건데.”

치료가 끝나자마자 두 사람이 내 팔을 잡아당기며 고집을 부리기 시작했다.

“신전이 처음이라면서? 조용히, 혼자서 구경이나 하는 게 어때.

오래간만에 만난 귀중한 시간 방해하지 말고.”

시몬이 내 왼팔을 확 잡아당기자 몸이 왼쪽으로 휙 끌려갔다.

"너한테만 귀중한 시간인 줄 알아? 나도 다프네랑 같이 구경하려고 기다렸고, 다프네도 같이 구경하자고 했어."

지지 않겠다는 듯 라그나르도 내 오른팔을 잡아당기자 이번에는 오른쪽으로 확 끌려갔다.

"내가 먼저야.”

"아니, 내가 먼저야."

이 빌어먹을 꼬맹이들.

이리저리 몸이 흔들리니 머리가 빙글빙글 돌며 어지러움이 밀려왔다.

도움, 도움이 필요해.

“아저씨. 나 머리도 아프고, 팔도 아파요.”

꼬맹이들이 티격태격 싸우는 게 뭐가 재미있는지 지켜만 보는 게 얄밉긴 해도 지금 내게 필요한 건 악셀리우스의 도움이다.

“아무래도 양쪽에서 자꾸 잡아당겨서 다프네가 아픈가 보다."

악셀리우스가 둘을 제치고서 나를 번쩍 안아 들었다.

“다프네가 휴식이 필요할 것 같으니까 잠시 자리를 좀 옮길까?

우리 싸우는 꼬맹이들은 내버려 두고 말이야.”

“그런 게 어디 있어!”

“같이 가, 대공!”

악셀리우스가 나를 안은 채 성큼 성큼 걸어가기 시작하자 꼬마 둘은 애타는 표정으로 쫄래쫄래 뒤따라오기 시작했다.

이제야 상황이 얼추 정리되는 듯 싶어지자 진작 도움을 주지 않은 악셀리우스가 얄미워 괜히 투덜거렸다.

"아저씨는 바보야.”

“이런. 그래도 적당한 때 도움을 주지 않았어?”

"싸우는 걸 보고만 있고, 웃기만 하고.”

그런 내 반응도 재밌는지 그의 입가에서는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괜히 뾰로통한 기분으로 도착한 곳은 나도 처음 보는 장소였다.

“처음 와 보지? 여기는 신전에서 관리하는 도서관이야. 여기면 애들이 시끄럽게 떠들지는 못할 텐데. 아저씨 용서해 주면 안 될까?”

"이……으음.”

“응, 다프네?”

악셀리우스가 애타는 표정으로 물어도 괜히 흥하고 고개를 돌려 버렸다.

"바보는 취소해 줄게요.”

“정말로?”

"이제 내려 주세요.”

꼬맹이들이 힘껏 달려오는 게 보여 재촉하자 그가 조심스럽게 바닥으로 내려 주었다.

둘은 마치 대결이라도 하는 듯지지 않으려고 힘차게 뛰어오고 있었다.

다행히 지나가는 신관이나 손님들이 없어서 망정이지.

저러다가 넘어지면 크게 다치겠다 싶어서 목소리를 높였다.

“넘어지겠어. 조심히 와.”

그러한 내 걱정에도 두 사람은 오히려 더 힘껏 달렸다.

“질 줄 알아?”

"나도 절대 안 져!”

경쟁하는 게 맞나 보다.

남자아이들은 원래 저런가.

시몬에게는 애석한 일이지만 결국 승자는 라그나르였다.

그도 그럴 것이 라그나르는….

'암살자로서 훈련을 받았으니 질리가 없지.’

라그나르가 뿌듯한 표정을 지으며 어깨를 당당히 편 채 다가왔고, 시몬은 졌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 표정으로 헐떡이는 숨을 내쉬며 다가왔다.

"내가 이겼다. 그러니까 나랑 놀자, 다프네.”

"허억, 헉. 젠장.”

시몬은 여간 분한 것이 아닌지 거친 숨을 내쉬며 붉으락푸르락달아오르고 있었다.

숨이 벅차서 저런 걸까, 화가 나서 그런 걸까.

나는 아까처럼 두 사람의 손을 잡았다.

"나는 지금부터 도서관에서 책을 읽을 거야.”

잡은 손에 힘을 주고서 도서관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직 걷기 힘드니까 두 사람이 나를 도와주면 좋겠는데."

신전이 큰 만큼 도서관도 크고, 저 정도 거리라면 혼자서 움직이기는 힘드니까.

“라그나로, 도서관은 조용히 있어야 하는 곳이니까. 이제부터 쉿할 거지?"

"응? 응.”

"시몬. 쉿 할 거죠?"

“당연하지. 그게 예의니까.”

라그나르는 시몬을 보면서 아쉬운 표정을 지었지만 그래도 나랑 함께한다는 사실에 만족하기로 했는지 내 손을 꼬옥 잡았다.

시몬도 마찬가지로 내 손을 꼭 잡고서 내 걸음걸이에 맞춰 도움을 주었다.

"야, 색안경. 천천히 걸어.”

“난 천천히 걷고 있어. 너나 천천히 걸어.”

가끔 이렇게 속삭이며 싸우기는 했지만, 다행히 도서관이라는 것을 자각하기는 한 모양인지 금방 잠잠해졌다.

오른쪽에는 라그나르가 왼쪽에는 시몬이 앉았고, 우리는 사서에게 추천받은 어린이들이 볼 만한 책을 펴고서는 조용히 독서의 시간을 가지기 시작했다.

책 고르는 것까지 경쟁하던 두 사람도 어느새 책에 빠졌는지 조용해졌다.

'잠깐 어울렸는데 왜 이렇게 피곤하지.’

단순히 걸어서가 아니라 두 사람 때문인 것 같은데.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고서는 손에 쥔 얇은 책을 펼쳤다.

하얀색 나비가 그려진 책이었는데 어쩐지 저절로 손길이 가서 골랐다.

'그러고 보니 내가 언제부터 나비를 좋아하게 되었더라.'

아, 숲속에서 나비의 도움을 받고 나서였구나.

'사라져 버려 다시 만날 수는 없지만 잘살고 있을 거야.'

입가에 슬그머니 미소가 지어졌다.

나는 머리에 달고 있는 나비 핀을 만지작거리다가 책을 펼쳤다.

본디 신께서는 이 세상의 모든 생명을 사랑하여 그들에게 운명을 부여하였으니.

모든 생물에게 탄생이라는 축복을, 그리고 죽음이라는 선물을 내리신다.

책의 첫 페이지에 쓰여 있는 문장이었다.

…… 어린이들이 볼 만한 내용이라더니.

따뜻한 그림체와 큰 글씨가 쓰여 있으면 모두 어린이를 위한 건가?

다음 장으로 넘겼다.

죽음을 막연히 두려워하지 말아라.

저자가 도대체 누구인지 모르겠지만 죽음을 겪어 본 적이 없는 사람이 분명했다.

무표정한 표정으로 다시 책장을 다시 넘겼다.

다가오는 죽음을 피하지 말아라.

넘겼다.

죽음은 언제나 너희의 곁에서 기회를 엿보고 있으니.

또 넘겼다.

죽음으로써 신을 만날 수 있으리라.

그 문구에 저절로 손이 멈췄다.

'…헛소리야.'

죽음으로써 신을 만난다면 어찌하여 그렇게 큰 고통으로 우리를 데려가려고 하겠는가.

사랑한다면서 어떻게..

신경질적으로 책장을 넘겼다.

하지만 이어지는 내용은 없었다.

어떻게 보관되었는지는 몰라도 마지막 한 장은 찢어진 흔적만 남아 있었다.

불쾌함에 탁 소리가 나게 책을 덮었다.

신전에 있는 책이어서 그럴까.

심오하기 짝이 없는 내용이다.

'나는 신관은 될 수 없겠어.'

신을 이해도 못 하는데 어떻게 신을 따를 수 있겠어.

더는 책을 읽기 싫어서 나갈까 했는데 고개를 돌리자마자 보인 것은 조금 의외의 모습이었다.

'둘 다 자네.'

서로 지지 않겠다는 듯 패기롭게 두꺼운 책을 들고 오더니 고개를 꾸벅꾸벅이며 졸고 있는 두 사람의 모습에 픽 웃음이 나왔다.

'나도 조금만 잘까?'

두 사람의 고개를 내 어깨 쪽으로 기대게 하고 나도 벽에 기대어서 눈을 감았다.

엄마랑 악셀리우스가 온다면 깨워 주겠지.

아주 잠시의 낮잠 정도라면 괜찮을 거다.

* * *

“성녀께서 뭐라 하셨어?"

악셀리우스의 물음에 클로에가 무표정으로 답했다.

"네가 했던 말들 그대로 했지."

“이제 좀 안심이 돼?"

"다행히도.”

클로에의 표정은 차가웠지만,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은 따스해 악셀리우스는 설핏 미소를 지었다.

“이번에 신전에 꽤 큰 기부금을 냈다면서.”

다프네의 일로 더욱 큰 후원금을 밀어 넣었다는 소리였다.

"매년 있는 일이니까 의미 부여 하지 마.”

악셀리우스는 정말 너답다며 웃다가 곧 진지한 목소리로 물었다.

“정말로 다프네에게 후계자 자리를 줄 거야? 레녹스랑 리카르다도 있잖아.”

“그 아이가 버티기 힘들 거라고 생각하나 보구나.”

악셀리우스의 심각한 표정에 클로에는 웃음이 나오지 않을 수가 없었다.

확실히 남이 보기에는 걱정이 될 수도 있었다.

그렇게 작은 여자아이에게 너무 큰 부담을 안겨 준다고 생각하는 걸까.

조용한 복도를 걸으며 클로에는 악셀리우스를 따라 하듯 설핏 미소를 지었다.

“네가 보기에 다프네는 어떤 아이 같은데?"

"예쁘고, 귀엽고, 사랑스럽고, 또 착하고… 역시 내가 다프네 아빠가 되어야….”

“헛소리.”

자동으로 튀어나오는 주접에 가까운 말에 클로에가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애초에 친아빠를 밝힐 생각이 없다면 내가 되는 게 낫지 않을까? 차라리…."

“요새 들어 한가하니? 정말로 헛소리가 늘었어.”

클로에는 기가 찬다는 듯 웃었다.

걱정이 가득한 저 눈빛이 고맙기도 하고, 진심이란 것을 알아서 지을 수 있는 웃음이었다.

클로에는 말을 돌려서 다시금 물었다.

“그리고 또 있어?"

"마음이 여려. 처음 보는 사람들을 경계하지만, 다정하게 대해 주면 쉽게 마음을 열잖아.”

“덕분에 친해질 수 있었으면서 평가는 냉정하구나.”

그 말에 악셀리우스는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다프네처럼 작고 여린 아이가 험난한 일을 하게 될 걸 생각하니 걱정이 돼.”

악셀리우스가 미간을 찌푸리며 불안감을 드러내자 클로에는 피식 웃을 수밖에 없었다.

젊은 시절 제가 얼마나 고생을 하면서 상단을 이끌어 왔는지 알기 때문에 저런 말을 할 수 있는 거겠지.

"너도 겨우 버틴 곳인데. 그 아이가 버틸 수 있을까?"

"버틸 수 있을 거야.”

“하지만….”

대화를 하다 보니 어느새 도서관에 도착하는 것은 금방이었다.

문을 열기 전 대화를 마무리할까 싶어 클로에가 마저 말을 이었다.

“다프네가 직접 말했어. 자기가 상단주가 되고 싶다고.”

“엄마의 모습이 멋있어 보이는 어린아이의 치기일 수도 있잖아."

“그럴 수도 있겠지."

악셀리우스는 모른다.

다프네는 친엄마의 죽음으로 상실감을 배웠고, 죽음을 피해 스스로의 운명을 찾기 위해 모두의 악의로부터 도망친 아이다.

그리고 자신이 살기 위한 길을 직접 만들어 낸 아이이다.

"혹시 처음 신학을 공부했을 때 배운 책 기억나?"

"나비가 그려진 책 말이야? 기억나지. 필독서잖아."

"그 책의 마지막 페이지에 적힌 말은 기억나고?”

악셀리우스가 기억을 더듬어 대답했다.

클로에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 문구.”

악셀리우스가 궁금한 표정으로 클로에를 바라보았지만, 그녀는 답하지 않고 도서관의 문을 열었다.

문을 열고 들어간 한쪽 구석에는 벽에 기대어서 잠든 세 아이가 보였다.

클로에는 제 딸아이를 보면서 사랑스럽다는 듯 웃었다.

죽음을 이겨 내려고 하는 아이가 고작 상단주의 자리를 못 버텨 낼까.

'이제야 진정한 자신을 찾아 가고 있으니까. 힘이 되어 줘야겠지.

이 어린아이가 죽음에 꺾이게끔 내버려 두지 않도록.

"다프네. 엄마 왔단다.”

이 자리에서 해 줄 수 있는 것을 하다 보면 언젠가 볼 수 있을 것이다.

상단주로서 빛나는 다프네를, 그리고 빛나는 자신의 딸을.

클로에는 악셀리우스가 말한 책의 마지막 구절을 떠올리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정해진 죽음을 피한다면, 진정한 너를 만날 수 있으리라.

신은 운명을 개척해 나가는 인간을 사랑하니까.

분명히 그날은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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