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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딸로 태어났다-47화 (47/185)

제47화.

신전에서의 일정이 끝나고 떠나려고 할 때, 시몬이 라그나르를 불러 세웠다.

"야. 너.”

"...어?"

라그나르가 검지로 자신을 가리키며 되묻자 시몬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너 까만색 안경 쓴 놈.

이름이 뭐야?”

"너한테 알려 줄 이름 없어."

“친구 이름도 모를 수는 없잖아.”

시몬의 말에 라그나르가 머리 위로 물음표를 떠올렸다.

"우리가 언제부터 친구가 됐어?"

“같이 뛰어놀고, 책 읽고, 대화하고, 낮잠도 같이 잤는데 친구가 아니라고?”

시몬의 말에 라그나르의 얼굴이 이상해졌다.

"내가 누구인 줄 알면서도 배짱있게 대하는 그 태도. 건방지지만 마음에 든다.”

"네가 누군데?”

“내가 누구인 줄 몰라?”

"알아야 해?”

이번에는 시몬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그는 이런 반응은 예상치 못했다는 듯 멍한 표정을 짓더니 휙 소리가 날 정도로 빠르게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봤다.

“정말로 모르는 거야?"

"오늘 처음 봤으니까 모르지.”

직접 밝히지도 않았으면서.

그 확인 사살에 시몬은 잠시 몸을 휘청이다가 이내 정신을 다잡았다.

"좋아. 그럼 이제부터 알도록 해.

이 제국의 유일무이, 권력의 중심, 차기 황제의 자리에 오를 황태자가 바로 이 몸이란 것을 말이야.”

시몬이 손을 내밀었고, 라그나르는 그 손을 빤히 내려보다가 잡고 흔들었다.

"내 이름은 라그나르야. 라라는 다프네가 지어 준 거니까 그걸로 부르지 마.”

“어차피 그렇게 부를 생각 없었다. 내 이름은 시몬."

시몬이 피식하고 웃었다.

“역시. 넌 고집이 세 보여서 태도가 변하지 않을 것 같았어.”

"너 재수 없다는 소리 좀 듣지?"

“재수가 좀 없으면 어때.”

시몬의 당당한 목소리에 라그나 르가 '으' 소리를 내뱉으며 손을 떼어 냈다.

누가 보았다면 황족에게 모욕을 줬다고 당장 감옥에 끌려갈 만한 짓이었으나.

시몬은 친구에게 관대해지기로 했나 보다.

“편지 할게. 답장해.”

“알겠어.”

쟤네 이상해.

옥신각신한 지 하루도 안 지났는데 어느새 절친이라도 된 듯 훈훈한 미소를 지으며 바라본다니.

아니나 다를까 악셀리우스도 코밑을 훑으며 뿌듯한 표정을 짓고 있다.

눈가가 붉어져 있는 것이 감수성이 풍부한 악셀리우스는 두 사람의 모습에 감동이라도 받은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니 아저씨는 시몬이 온다는 것을 미리 알면서도….'

엄마랑 함께 시간도 보내고, 내 치료도 하고, 시몬이랑 라그나르랑 친구가 되도록 하고.

'이 모든 게 다 계획인 건가.…?'

역시 대공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닌가 보다.

그래도 라그나르도 시몬도 표정이 좋아 보이니 다행인 거겠지.

“다프네도, 편지 보낼게!"

그 말과 함께 시몬은 마차를 타고 먼저 떠났다.

나는 떠나는 마차를 한참이고 보던 라그나르에게 물었다.

“라라. 시몬은 어떤 애 같아?"

“재수 없는데 재밌는 놈 같아."

미리 말 못 해서 혹시 서운할까 했는데.

다행히도 그의 입가에는 웃음이 지어져 있었다.

* * *

그날 이후로 라그나르의 일상에 새로운 일 하나가 추가되었다.

“라라. 아직도 편지 써?"

"으응. 잠깐만.”

라그나르의 책상 옆에 여려 권의 책이 이리저리 펼쳐져 있었다.

“시몬이 또 편지에 문제를 적어 놨구나.”

“응. 편지마저도 주인 닮았어.”

재수 없다는 뜻이다.

나는 라그나르 옆에 앉아서 시몬이 보낸 편지를 구경하며 처음 편지가 도착한 날을 떠올렸다.

신전에서 헤어진 바로 다음 날.

우리 앞으로 각각 편지가 하나씩 도착했다.

발신자는 시몬이고 자주 못 만나니 편지로라도 안부를 주고받자는 기본적인 인사말들이 적혀 있었다.

그리고 내 편지와 다르게 라그나 르의 편지에만 추신으로 문제가 쓰여 있었다.

'첫 문제는 수학 문제였지.'

기본적인 수학 문제였지만 라그나르는 아직 수학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알 리가 없었고.

라그나르는 바로 그날 레녹스에게 수학을 가르쳐 달라고 졸라서 문제를 풀어 답장을 보냈었다.

그러자 다음에 돌아온 문제는 역사 문제였고, 라그나르는 지기 싫다며 계속해서 문제의 답을 찾아 적어 답장을 보내고는 했다.

그리고 이 편지는 현재 진행 중이다.

'그냥 가볍게 무시하고 넘어가도 충분할 텐데.'

애들의 자존심 싸움이 이런 걸까.

오히려 학구열을 불태우는 라그나르 덕에 나도 더 많은 공부를 하게 될 수 있어서 좋기야 했지만.

끙끙거리며 책을 뒤지는 라그나 르의 옆에 앉아서 나도 책을 펼쳤다.

오늘도 평화로운 하루가 흘러가고 있었다.

* * *

고풍스러운 집무실.

한 사내가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의 앞에 놓인 서류들을 확인하고 있었다.

“님.”

“공작님."

사내가 자신을 부르는 호칭에 고개를 들었다.

그의 부관이 웃으면서 인사를 하자 그는 가볍게 고개를 까닥이고는 시선은 다시 서류로 향했다.

“말씀해 주신 것처럼, 요새 황태자 전하의 외출이 잦다는 소식을 확인했습니다.”

“그래? 주로 어디를 나다녔지."

“외출하는 마차는 거의 신전으로 향했다고 합니다.”

신전이라는 단어가 나오자 공작이 못 들을 소리를 들었다는 듯 혀를 찼다.

“대공을 그리 멀리하라고 말했는데도 듣지를 않는군.”

"아직 어려서 그런가 봅니다."

“그래. 어려서 아무것도 모르는 거지.”

공작은 어린 황태자를 떠올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안 그래도 사나운 눈썹이 올라가자 더욱 살벌한 표정이 만들어졌다.

“황태자가 죽으면 차기 황제는 어쩔 수 없이 대공이 될 텐데, 아무리 어려도 생각이 너무 짧아."

공작이 한숨을 내쉬며 자신의 책상 위에 올려진 액자를 들여다보았다.

콘란드 헤로니스 자신과 사랑스러운 아내 유니스 헤로니스.

그리고 눈에 넣어도 안 아플 딸마리아 헤로니스와 아들 카스토르헤로니스까지.

누가 보아도 행복해 보이는 가족의 모습이었다.

콘란드는 그림 속 자신의 딸을 쓰다듬으며 말을 이어 갔다.

“황족의 상징인 금안도 갖고 태어나지 못한 주제에. 내 딸의 남자가 되려면 스스로를 갈고 닦기에도 모자랄 시간에 놀러나 다닌다니.”

아무리 듣는 이가 없다고 하지만 황족 모욕죄로 잡혀갈 만한 발언이었다.

하지만 콘란드도 그의 부관 오벤도 그런 것은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듯 다음 대화를 이어 나갔다.

“황좌에 오를 놈이니 내 딸의 남편 자리를 주려는 것인데.”

콘란드가 한숨을 내쉬며 대화를 이어 가려는데 갑자기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빠. 안에 계세요~?"

사랑스러운 목소리에 콘란드의미간이 펴졌다.

곧 인자하고 다정한 아버지로 변한 그가 자신의 딸 마리아를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일하시는데 방해하는 건 아니죠?”

문을 조금 열고서 빼꼼 안을 들여다보는 딸의 모습에 콘란드가 아니라며 웃었다.

"방해는 무슨. 어서 들어오거라."

“히히.”

다정한 말에 마리아가 활짝 웃고서 도도도 뛰어 들어왔다.

“그래서 우리 아가씨가 무슨 일로 아빠를 찾아왔을까.”

“오늘은 아빠한테 줄 선물이 있어요!”

마리아가 뒤에 숨겨 놓은 무언가를 짜잔 하며 꺼내 들었다.

들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꽃으로 만든 화관이었다.

어린아이의 솜씨로 만든 엉성한 화관은 선물이라고 하기에는 볼품이 없었지만.

“아빠 주려고 들판에서 꽃을 꺾어서 화관을 만들어 봤어요!"

“오, 이런. 이리 아름다운 화관을 선물받다니 난 정말 행복한 아빠인걸.”

콘란드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허리를 숙였다.

딸이 씌워 주는 화관을 받아 든 그의 표정은 굉장히 부드러웠다.

누군가 본다면 그 헤로니스 공작이라고 믿기지 않을 만큼 말이다.

“마리아. 아빠 일 방해하면 안된다고 했지.”

열린 문 사이로 들리는 목소리에 마리아가 기쁜 표정으로 달려 나갔다.

유니스 헤로니스가 엄한 표정으로 들어왔다가 딸의 미소에 어쩔 수 없다는 듯 딸아이를 품에 안아들었다.

“일하는데 방해해서 미안해요.”

“괜찮아. 다른 사람도 아니고 당신이랑 마리아인데.”

콘란드가 부드러운 손길로 마리 아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마리아는 그 손길에 좋다며 꺄르르 웃었고, 차갑게 날 서 있던 분위기가 부드럽게 풀어졌다.

"안녕하십니까, 공작 부인.”

“오벤 경도 오래간만이네요. 잘지냈나요?”

“그럼요. 공작 부인 덕에 아주 잘 지내고 있답니다. 마님의 훌륭한 내조 덕에 공작가가 더욱 빛이 나고 있으니까요.”

누군가 들으면 눈살이 찌푸려질만한 아부였지만 틀린 말 하나 없었기에 모두가 가볍게 웃음을 터트렸다.

짧은 대화지만 안부 인사를 나누기는 충분했다.

“오늘도 고생이 많아요. 조금 이 따 봐요.”

"그래. 나중에 보자고."

콘란드가 유니스의 볼에 가볍게 입을 맞추자 유니스도 소녀처럼 볼을 발갛게 물들이며 그의 반대쪽 뺨에 입을 맞춰 주었다.

서로 사랑하고 있는 화기애애한 가족의 모습이었다.

그렇게 유니스와 마리아가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두 사람이 나가자 빙긋 웃고 있던 공작의 표정이 사라졌다.

“저렇게 예쁜 마리아를 불완전한 멍청한 놈한테 보내야 한다니."

콘란드의 한숨 소리에 오벤이 아부를 떨기 시작했다.

“그렇죠. 사랑스러운 마리아 아가씨께서 너무 아깝지 않은지….”

“아깝지. 제대로 증명조차 받지 못한 황태자 놈이 다른 황권 계승자랑 놀러 다니는 꼴이나 보이니 답답하기 짝이 없군."

“조치를 취할까요?”

오벤의 말에 콘란드가 한쪽 눈썹을 치켜들었다.

좋은 생각이 있냐는 듯한 표정에 오벤은 씨익 웃었다.

“공작님께서 해 주신 조언을 따르지 않으면 험한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건 어떨까요.”

“어떻게?"

공작의 물음에 이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 오벤의 입이 술술 열렸다.

“요새 패트릭 자작가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고 합니다.”

“패트릭 자작? 아. 노예 매매로 황제에게 밉보인 놈 말인가.”

“예. 재산이 반 토막 이상 나서 부인과는 이혼하고, 홀아비 신세가 되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이를 갈고 있다고 합니다.”

오벤의 말에 콘란드가 그를 따라 씨익 미소를 지었다.

무섭게 빛나는 콘란드의 삼백안은 그가 무슨 말을 꺼낼지 알겠다는 듯 살벌하게 빛나고 있었다.

“신전에서 납치극을 벌일 수 있게 정보를 흘려 판을 깔아 주는 겁니다. 그리고 황태자가 납치당하면 틈을 타 저희가 나서서 구하는 거죠.”

"흐음. 그리고?”

으면 더 좋겠지만 불가능하다면

"대공의 잘못으로 몰아갈 수 있그럴싸한 소문을 조금 흘리면 되겠지요. 충분히 알아먹을 겁니다."

황태자와 대공의 사이를 이간질하되, 직접 나서지는 않으며 범인도 따로 있다.

“무엇보다 공작가의 기사들이 구해 준다면 대공보다 공작님을 더 따르게 될 겁니다.”

감히 그 누가 생명의 은인을 무시하겠느냐는 뉘앙스였다.

자세한 설명을 듣자 콘란드의 입가에 더더욱 만족의 미소가 짙게 떠올랐다.

“그래. 말 안 듣는 놈이나 거슬리는 놈이나 한 번에 처리하도록해"

“그럼 제 선에서 알아서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콘란드가 고개를 까닥하자 오벤은 방을 빠져나갔다.

감히 황족을 건드리는 범죄를 저지르는 것이지만 그들이 하는 일은 고작 정보를 조금 흘려주는 것.

직접 납치를 한 것도 아니고 오히려 구해 주는 쪽이 될 테니 거리낄 것은 없었다.

공작가에서 추진하는 일은 언제나 성공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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