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8화.
하늘에서 햇볕이 따갑게 내리쬐고, 더운 바람이 불어온다.
하지만 이 무더운 날씨도 내 앞에서 뛰어노는 두 명과는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인가 보다.
어딜 보아도 뜨거운 여름이 열기를 내뿜으며 기승을 부리는데 덥지도 않을까.
나는 커다란 나무 아래 기대어 앉아 다 읽은 책을 내려놓았다.
꽤 오랫동안 책을 읽었던 것 같은데 둘은 아직도 술래잡기를 열심히 하고 있었다.
당연하지만 언제나 라그나르가 이겼고, 시몬은 지쳐 쓰러지기 전까지 도전하고는 했다.
“신전이 우리 놀이터가 되어 버렸네.”
악셀리우스 덕에 놀 공간이 생겼고, 모두가 곱게 봐주니 다행이기는 하지만.
나는 쭉 뻗은 다리를 내려다보다가 조물조물 안마를 시작했다.
아직은 보통 사람들보다 걷는 것도 느리지만 언젠가는 저 아이들과 같이 뛰어다닐 수 있겠지.
"얼른 그런 날이 오면 좋겠다.”
조물조물하는 작은 손이 점점 커져서 어른이 되고 나면 가능할 것이다.
나는 언젠가 다가올 미래를 떠올리며 슬며시 웃었다.
그러고 보니 우리 한 달에 한두번씩은 만나는 것 같은데.
“진짜 황태자 맞나.”
처음 본 위엄 있는 모습은 머릿속에서 지워진 지 오래다.
너무 서슴없이 우리를 편히 대하는 게 아닌가 싶다가도, 또 귀엽기도 하고.
무엇보다 황태자라면 차기 황제니까.
배워야 할 것도 많고, 해야 할 것도 많을 것 같은데 여기서 뛰어 놀 시간이 있을까.
나중에 기회가 생기면 한번 물어봐야지 생각하는데 바로 옆에서 답이 들려왔다.
"황성 안은 재미없어. 다들 공부만 하라고 하고, 내 비위를 맞춰주기 바쁘거든.”
"…들었어요?”
언제 놀이가 끝났는지 시몬이 익숙하게 왼쪽에 앉았다.
"응. 괜찮아.”
"괜찮아 할 것 같았어요.”
시몬이 고작 이런 말을 들었다고 친구에게 화낼 사람이 아니란 것 정도는 안다.
적어도 지금껏 함께 시간을 보낸 내가 아는 시몬은 그랬다.
“앞에서는 알랑방귀를 뀌면서 뒤에서는 내 눈 색을 가지고 욕해.
그런 놈들은 나도 친구로 두고 싶지도 않고.”
“눈 색이 뭐 어때서."
중얼거리는 말에 시몬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라그나르도 똑같이 말하더라.
그래서 너희가 더 좋은가 봐."
“앞에서도 뒤에서도 겁이 없어서요?"
내 장난에 시몬이 풉하고 웃었다.
“네가 장난도 칠 줄 아네."
어쩐지 조금 민망하다.
내가 그렇게 장난을 안 쳤나?
민망함에 괜히 모자를 아래로 내리니 그가 장난스러운 웃음을 터트리며 다시 올려 주었다.
“기뻐서 그래. 나만 친구로 여기는 게 아닌 것 같아서."
시몬이 흘러내린 내 머리카락을 뒤로 넘겨 주며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우리 친구 맞지?"
“맞죠.”
“그럼 나한테도 편히 말 놔 주면 안 돼?”
“으음….”
감히 황태자에게 말을 놓아도 되는 걸까?
내가 망설이는 모습을 보이자 시몬이 씁쓸하게 웃었다.
“네가 편해질 때 말 놔 줘. 그거면 돼.”
어떻게 말을 해야 할까 대답을 고민하는데 어느새 라그나르가 도착해 내 오른쪽에 털썩 주저앉았다.
덕분에 다행히도 어색한 분위기가 날아갔다.
"너 바쁘다는 것 거짓말이지?"
라그나르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매번 여기서, 만날 리가 없어.”
"내가 워낙 뛰어나서 그래.”
시몬도 어깨를 으쓱이면서 옷에 묻은 먼지를 털어 냈다.
"아무리 공부할 게 많아도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지."
자신감 넘치는 말이지만 라그나르는 듣는 척도 하지 않고 물을 마셨다.
시몬도 익숙하다는 듯 말을 마치고서 손수건으로 땀을 닦았다.
햇볕이 쨍쨍하지만, 나무 그늘 아래 바람은 꽤 시원해서 한여름의 더위를 날려 보내기에는 좋았다.
"라그나로, 넌 왜 매일 그 안경을 쓰고 다녀?”
“눈이 안 좋아서.”
"그러니까 왜 검은 알 안경을 쓰고 다니냐고.”
가끔 이어지는 이런 맥락 없는 대화도 재미가 있을 정도로 기분이 좋았다.
“눈이 안 좋아서 그렇다니까?"
“됐어. 말하기 싫으면 싫다고 하면 되지."
"왜 사실대로 말했는데 안 믿어."
분명 조금 전까지 사이좋지 않았나?
갑자기 날 가운데 두고서 으르렁거리며 또 싸우기 시작했다.
가끔 보면 내가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는지, 사이 안 좋은 강아지들과 함께 있는 건지 모르겠다니까.
“어휴.”
원작과 다르게 라이벌이 아니라 소꿉친구가 되었다니 기쁘기는 하지만, 역시 라그나르가 외적으로 감춰야 할 비밀이 있다 보니 가끔 이렇게 투닥거리고는 했다.
평소라면 시몬이 가볍게 넘어갔을 테지만 작정을 했는지 오늘은 삐진 걸 풀지도 않고 고개를 획돌린 채였다.
여기서 내가 끼어들면 좋겠지만 나서지 않는 게 좋겠지.
라그나르의 눈은 특별하게 생겼기 때문에 처음 보는 사람들은 무서워할 수도 있으니까.
'아니면 싫어할 수도 있고.'
라그나르가 보여 주면 진작에 끝날 이야기였겠지만 보여 주지 않으려는 이유는 따로 있을 거다.
시몬도 라그나르의 소중한 친구가 되었으니까.
"아."
차마 어쩌지도 못하고 가운데서 눈치만 보는데 갑자기 불어오는 바람에 엉성하게 매여 있는 모자가 날아가 버렸다.
이 상황에서 두 사람에게 부탁하기도 조금 그렇고,
'아예 못 움직이는 것도 아니니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모자가 날아간 쪽으로 천천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조금 멀리 날아가기는 했지만 이제 이 정도는 충분히 걸어 다닐 만해서 다행이야.
조금 그늘진 수풀 앞에 떨어진 모자를 주워 드는데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
내 위에 나무가 있던가?
'아닌데, 분명 내 키만 한 수풀들밖에 없었는데.’
그렇다면 나무가 아니라면 이 커다란 그림자는 뭐지?
“신발…?”
수풀 사이로 검은색 신발이 보였고, 고개를 드는 그 순간 낯선 사람이 내 입을 틀어막았다.
"읍! 으읍!”
있는 힘껏 발버둥을 쳐 봤지만 투박한 손은 요지부동이었다.
심지어 틀어막은 손수건에 무언가가 묻어 있기라도 했는지 서서히 눈이 감기고 있었다.
“다프네!”
나무 쪽에서 시몬의 외침이 들렸지만, 답을 해 줄 수가 없었다.
흐려진 의식은 나를 어둠 속으로 삼키고 말았다.
* * *
복면을 쓴 의문의 사내들은 낡은 짐마차에 시몬을 던져 넣었다.
황족을 대한다기에는 무례하고 거침없는 태도지만, 시몬은 그런 것에 신경 쓸 수 없었다.
시몬은 자신의 옆에 기절한 다프네와 라그나르를 보며 울컥하여 버럭 소리쳤다.
"네놈들은 누구냐!"
"누군지 전하께서 알 필요가 있겠습니까. 어차피 곧 뒈지실 텐데.”
상스러운 비속어에 시몬의 미간이 와그작 찌푸려졌다.
"누구는 재산도 털리고, 아내랑 이혼하고 자식들도 못 보고 살게 생겼다는데. 아니 어떤 누구는 이렇게 친구들이랑 하하 호호 뛰어 놀고 말이야. 재수 없지, 응?”
사내의 영문 모를 소리에 시몬이 화를 내려던 찰나.
그는 다프네와 라그나르에게 했던 것처럼 시몬을 거칠게 밀어 넣었다.
사내의 난폭한 행동에 시몬이 이를 악물었다.
적어도 자신을 납치한 자들한테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여 줄 수는 없었다.
“널 일부러 깨워 놓은 줄 알아?
최악의 상황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는 걸 느끼게 해 주려고 깨워 놓은 거야.”
"이러고도 무사할 거라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패트릭 자작?”
"......."
사내가 입을 꾹 다물었다.
당황에 물들어 떨리는 두 눈동자를 보며 시몬은 지금껏 보여 주었던 편한 모습이 아닌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제국법으로 금지하는 노예 매매로 인해 벌을 받은 놈이 뭘 자랑이라고 그리 지껄이고, 이딴 짓을 벌이는 거지?"
"어, 어떻게 알았지?"
자기소개를 그렇게 열심히 하더니 모르기를 바란 게 더 어이가 없지 않은가.
시몬은 클레멘스 제국에서 황제가 될 사람.
적어도 수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황제뿐만이 아니라 황태자인 시몬에게도 보고가 올라갔다.
노예 매매라는 큰 사건을 황태자인 그가 모를 리가 없었다.
패트릭 자작은 자신에게 돌아오는 경멸 어린 시선에 참지 못하고 빽 소리를 질렀다.
“시끄러워! 그깟 노예 좀 거래했다고!”
패트릭 자작의 변명에 시몬은 동의하지 않았다.
“고작! 고작! 노예 새끼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고! 제국을 위해 힘써 온 나를 내치다니!"
자작도 동의를 받을 생각은 없었는지 몇 번이고 발로 시몬을 걷어찼다.
하지만 아무리 힘차게 걷어차도 작은 신음조차 돌아오지 않는 것에 이를 갈았다.
"금색도 타고나지 못한 반쪽짜리 황족 주제에.”
“.......”
“그 빌어먹을 반쪽짜리 인생을 반드시 내가 끝내 주마."
자작은 씩씩거리며 시몬의 입을 틀어막았다.
알싸한 냄새가 풍기자 시몬이 화들짝 놀라며 발버둥을 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밧줄에 꽁꽁 묶여 있는 몸은 바르작거리는 정도밖에 할 수 없었다.
곧이어 의식이 흐려진 듯 시몬의 눈이 서서히 감겼다.
"너 때문에 친구들까지 납치당하고 험한 꼴 보는 거니까. 빌어먹을 아버지를 원망하면서 다가올 죽음이나 기다리라고!"
자작은 비웃음을 던진 채 마차 문을 닫고 나갔다.
곧이어 마차가 움직이는지 거칠게 덜컹거리기 시작했고, 소음에 가려져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겠다 싶을 때 시몬이 눈을 떴다.
'독살을 대비하여 언제나 독을 미량씩 섭취하던 것이 이렇게 빛을 보는구나.'
시몬은 침착하게 이 상황을 타파할 방법을 궁리하기 시작했다.
'자작이 내가 신전에 드나드는 것을 어떻게 알아낸 거지.'
최대한 비밀리에 부치며 외출을 하고는 했었으니 정보를 흘린 사람이 있을 것이다.
납치한 인원은 다섯 명 정도였지만, 지금 향하는 곳에 누군가가 더 있을 수도 있다.
무엇보다 목적지를 모르니 답답할 수밖에 없었다.
'차라리 혼자였다면….'
시몬은 잠들어 있는 다프네와 라그나르를 보며 눈을 질끈 감았다.
'젠장맞을. 나 때문에!'
평생 누군가에게 미안하거나 죄책감이란 감정이 안 들 줄 알았는데 둘에게 너무나도 미안했다.
정식으로 검술을 훈련받는 자신과 다르게 다프네와 라그나르에게는 위험한 상황이니까.
혼자서, 최대한 혼자의 힘으로 이곳을 다 함께 안전하게 빠져나가야 했다.
아무도 안 보는 사이에 적어도 밧줄이라도 풀어야 했다.
자신 때문에 일어난 일은 자신이 책임지리라.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시몬의 마음 한구석에서는 두려움이 피어올랐다.
황성에서 답답히 살다가 겨우 숨구멍이 트인 느낌이었는데, 신전에 나들이를 나와 이렇게 험한 일을 당하게 된다니.
'…설마 대공이 그런 것은 아니겠지.'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어린 마음에 피어오르는 불안감이 좋지 않은 쪽으로 생각을 이끌었다.
혼자서 이 무서운 상황을 이겨내 친우들도 구해 내야 한다는 사명감.
어깨를 무겁게 내리는 그 압박감에 숨도 못 쉴 것 같은 그 순간.
“시몬.”
“우리 깨어 있어.”
거짓말처럼 친우들의 목소리가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