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9화.
마차는 생각보다 빨리 멈춰 섰다.
우리는 대화를 중단하고서 입을 꾹 다물고 눈도 꼭 감았다.
곧이어 사내들이 우리를 어디론가 옮기기 시작했다.
아래로 내려가는 것 같았다.
텁텁한 먼지 냄새와 삐걱거리는 오래된 나무의 소리.
"잘 지키고 있어. 밤까지는 살려 놔야 해.”
“문밖에만 감시해도 될까요?”
“어린애들이잖아. 황태자라면 몰라도 다른 애들은 깨자마자 울겠지.”
자작은 어린아이들을 밀폐된 방에 가두고, 그 앞에 호위를 세워 두고서 자리를 떠났다.
조용해진 분위기 속에서 시몬이 입을 열었다.
"어, 어떻게 깨어 있는 거야?"
시몬이 눈을 크게 뜨고서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약이 잘 안 드는 체질이라서요. 금방 깼어요.”
“이 정도로 잠들진 않아."
시몬은 무어라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 정말 미안해."
"뭐?"
“뭐가 미안해요.”
시몬의 눈에 죄책감이 가득 차 있었다.
마치 자신이 이 상황의 가해자인 것처럼 자책 어린 표정이었다.
"나 때문에 너희도 함께 납치를 당하고….”
“그렇게 따지자면 우리 책임도 있네.”
“우리 때문에 놀러 온 거고, 그러다가 납치당한 거니까요."
시몬이 아니라고 소리를 지르려다 간신히 입을 닫았다.
"아니야. 그래도 내가 아니었으면 이런 일을 겪지도 않았을 거야.”
“답지 않게 자꾸 왜 이렇게 기죽어 있어요.”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어. 걱정하지 마.”
하지만 고작 이 정도 위로에 시몬의 눈에 희망이 차오르지는 않았다.
시몬의 입장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겠지.
폐건물로 갑자기 납치를 당한 것도 모자라서 목숨의 위협을 받고 있으니까.
하지만 그것도 여기까지였다.
투둑, 툭.
“이게 무슨 소리지?"
무언가 끊기는 소리에 시몬이 경계가 가득한 표정으로 주변을 살폈다.
그리고 그가 발견한 것은 밧줄을 모두 끊어 버린 채 멀쩡하게 서 있는 라그나르였다.
"......."
“라그나르가 밧줄을 잘 풀어요.”
예전에도 꽁꽁 묶인 밧줄을 푼적이 있었지.
그렇기에 당연히 이번에도 풀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시몬이 턱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말했다.
"내 품속에 호신용 단검이 있는데...”
도움이 되기 위해서 꺼낸 말이었지만 라그나르는 듣지 않고 몸을 움직였다.
그러고는 우선 내 밧줄을 풀어준 뒤 묵묵히 시몬의 밧줄까지 풀어 주었다.
시몬의 단검이 나오는 일은 없었다.
그는 자유로워진 손발을 움직이 이다가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였다.
"여기는 어디지?"
“한참 계단을 타고 내려왔어. 분명 지하일 거야.”
시몬은 우리의 대화에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갈피를 못 잡는 듯했다.
하지만 자세하게 설명해 줄 여유가 없었다.
“빠져나가는 게 우선이잖아. 나가서 이야기해.”
뚫어져라 쳐다보는 시선에 라그나르가 어쩔 수 없이 말을 꺼냈다.
시몬도 그게 좋다고 생각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우선은….”
급박한 상황 때문일까.
평소 순수하고, 귀여운 라그나르의 모습은 사라졌다.
라그나르는 발꿈치를 들어 천천히 방을 둘러보았다.
"바닥에는 아무것도 없네."
“천장에 구멍이 뚫려 있어. 저기는 어떨까?”
내 말에 라그나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라그나르가 가볍게 점프해 천장에 삐져나온 구조물에 매달렸고, 순식간에 구멍 안으로 들어갔다.
“무슨….”
그 가벼운 몸짓에 시몬은 입을 크게 벌리고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다행히도 조금 전까지 두려움에 잠겨 있던 감정은 놀라움이 잡아먹어 준 듯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떨리고 있는 손이 보여서.
나는 그 손을 덥석 잡았다.
“우리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어.”
“…어?"
“그러니까 너무 무서워하지 마.
나가서 너를 괴롭히는 못된 사람도 잡아서 감옥에 넣어 버리자.”
손에서 느껴지는 따뜻한 온기 때문일까.
아니면 내 말 때문일까.
시몬은 눈을 도로록 굴리다가 이 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도 입가에 흐릿한 미소가 맺혀 있었다.
눈빛에도 작은 희망이 피어올라 있었다.
“응. 함께 빠져나가자."
“할 수 있어.”
밖에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속삭이는 목소리지만 의사가 전해 지기에는 충분했다.
그리고 잠시 후 구멍 사이로 라그나르의 얼굴이 빼꼼하고 튀어나왔다.
“여기에 통로가 있는 것 같아.”
"거기까지 올라가는 게 문제겠군.”
“뭐가 문제야.”
라그나르가 가볍게 뛰어내려 소리 없이 바닥에 착지했다.
그리고 나를 업고서 다시 가볍게 올라가 천장 위에 있는 좁은 통로에 나를 내려 주고, 다시 아래로 뛰어 내려갔다.
몇 개월 동안 쉬었으니 몸이 굳을 만도 했을 텐데 역시 암살자 시절 어디 안 가는구나.
“자, 업혀.”
라그나르가 등을 내밀자 시몬이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방법이 이것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는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시몬까지 모두 올라오는데 성공했다.
"기어서 가야 할 것 같은데."
두 사람의 시선이 내게 닿았다.
이럴 때 다리가 말썽인 내가 제일 문제가 되겠지.
"버텨 볼게.”
"괜찮겠어?”
시몬의 걱정스러운 물음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죽는 것보다 다리가 조금 더 아픈 게 나아.”
"…그래.”
"안 죽어. 절대로 안 죽게 할 거니까.”
시몬은 시무룩하게 대답하고, 라그나르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평소랑 반대되는 반응이었다.
“보통은 이런 곳은 하수구 통로랑 연결되던데.”
확신 없는 바람이었다.
“도대체 이런 걸 어떻게 아는 거야.”
시몬의 중얼거림에도 라그나르는 답을 하지 않았다.
시몬도 딱히 답을 기대한 것은 아닌지 더 이상 캐묻는 것은 없었다.
나 또한 라그나르가 정말 다양한 곳에서 고생했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나랑 시몬은 아무것도 모르니 그저 그의 뒤를 따라 열심히 기어갔다.
아쉽게도 통로의 끝은 하수구가 아니었다.
"하수구는 아니네. 한 층 정도 올라온 것 같아.”
겨우겨우 좁은 통로를 빠져나와 본 곳은 무언가가 잔뜩 쌓여 있는 방이었다.
“철창이랑 수갑….”
그리고 간간이 보이는 날카로운 고문 도구들까지.
바닥에 스며든 거뭇거뭇한 것은 아마도 피인 것 같았다.
차마 눈 뜨고 보지 못할 만큼 역겨운 공간이었다.
“…숨 쉬는 공기도 아까운 놈 같으니라고.”
그러고 보니 마차에서 노예 매매에 관한 이야기를 했었던 것 같은데.
아마도 노예들을 고문하는 데 사용했던 도구들인가 보다.
시몬이 나지막하게 욕설을 중얼거렸다.
라그나르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방 안을 둘러보고 있었는데 평온해 보이는 반응 아래 꽉 쥐고 있는 주먹이 바들바들 떨리고 있는 게 보였다.
"라라. 괜찮아?"
“난 괜찮아.”
돌아오는 답이 평소와 다르게 차가웠다.
전혀 괜찮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저 손을 가만히 보고 있을 수는 없었다.
“손잡아도 돼?"
"…응. 잡아 줘.”
나는 라그나르의 손을 꼭 잡고서 다른 손으로는 시몬의 손도 잡았다.
분위기가 한없이 가라앉고 있었다.
이런 비참한 광경을 보니 안 좋은 생각이 들 수밖에 없겠지.
'희망적. 희망적인 상황을 생각해 보자.'
나는 얼마 전에 악셀리우스에게 들은 말을 떠올리며 소곤거렸다.
“여름이 끝나고 가을이 되면 수도에서 추수를 기념하며 가면 축제가 열린다고 했어."
"맞아. 한창 준비에 들어갔지.”
내 말에 시몬이 기억났다는 듯 말을 덧붙였다.
“우리 여기서 나가서 거기서 함께 뛰어놀자. 예쁜 가면도 쓰고, 맛있는 것도 사 먹고, 서점에서 동화책도 읽어 보고.”
그때가 되어도 우리는 살아 있을 테니까 약속하는 것이었다.
“그래.”
“…좋아.”
시몬이 웃었고, 라그나르도 뒤를 따라서 웃었다.
다행히 힘이 좀 난 걸까?
두 사람의 눈빛이 빛난 것 같았다.
이 분위기를 더 이어 가는 게 좋겠지.
“시몬. 라라.”
두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내게 향했다.
“있지. 나 죽음으로부터 도망친 적이 있어.”
"........”
나는 두 사람을 바라보며 심호흡을 내뱉었다.
언제나 입에 죽음을 담는 것은 너무나도 무겁고, 무서웠다.
하지만 지금은 그때와 다르다.
“혼자여서 힘들었지만 성공했어.”
“다프네….”
둘은 자세한 사정을 모르니 어떠한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모르겠는지 그저 인상만 구길 뿐이었다.
"나 혼자서도 해냈으니까. 우리 셋이 함께라면 얼마든지 도망칠수 있을 거야.”
"........”
"........"
두 사람은 답이 없었다.
“우리 꼭 살아남자?"
사실은 다리의 힘이 빠져 달달 떨린다.
이 상태로 걸어서 얼마나 도망칠수 있을지 자신도 없다.
그래도 셋이 함께라면 어떻게든 빠져나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은 변치 않다.
"다리가 이런 내가 말하니까 미안하네.”
"아냐.”
"맞아. 절대 아니야. 우리 다 함께 무사히 나가자.”
다행히 힘이 좀 난 걸까?
두 사람의 눈빛이 다시 한번 결연하게 빛난 것 같았다.
두려웠지만 우리가 함께라면 빠져나갈 수 있을 것이란 예감이 들었다.
바로 그때 근처에서 소란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꼬맹이들이 사라졌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