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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딸로 태어났다-50화 (50/185)

제50화.

우리는 재빠르게 그 장소에서 벗어났다.

건물은 생각보다 더 컸다.

라그나르가 주변의 소리를 체크하며 문을 열고, 출구를 찾아 앞장섰다.

시몬은 나를 업은 채 뒤따라 걸었다.

다행히도 아직까지 복도에서 마주친 사람이 없었다.

이대로 출구를 찾아 무사히 빠져나가면 좋을 텐데.

시간이 꽤 흘렀고, 이제 곧 밤이 찾아올 것이다.

아니, 어쩌면 이미 찾아왔을지도 모른다.

지하는 미로처럼 복잡했고, 도무지 위로 올라갈 만한 곳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는 희망을 잃지 않았다.

마침내 희미한 빛이 보였다.

“라라. 저기 빛이 보여.”

“빛"

"아.”

아무래도 라그나르는 색안경을 끼고 있어서 자세히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주위가 깜깜해졌는데, 계속 쓰면 안 보이지 않아?"

보다 못한 시몬이 말을 던졌다.

그러자 갑자기 정적이 찾아왔다.

"…벗으라고 강요하는 것은 아니야. 조금 전에도 그런 건 아니었어."

“…알아.”

그러고 보니 둘은 저것 때문에 싸웠었지.

라그나르는 색안경을 고쳐 쓰고서는 그곳으로 빠르게 뛰어갔다.

"그런데 어떻게 저렇게 소리 없이 뛰지?"

“라라는 원래 달리기 잘해."

시몬의 감탄에 괜히 이유를 덧붙이자 그가 픽 웃었다.

“매일 달리기에서 지는데 모르면 바보지.”

대화가 끝이 나자 주위가 조용해졌다.

간간이 똑 똑 하고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렇게 조용히 기다리고 있는데 갑자기 라그나르가 다급한 표정으로 뛰어오기 시작했다.

설마.

곧이어 위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자작이 돌아온 모양인지 히스테리가 가득한 목소리가 이곳에 널리 퍼졌다.

“뭐? 감시하긴 한 거야?! 곧이어 그자가 올 텐데 뭣들 한 거야!"

“죄, 죄송합니다! 멀리 가지는 못했을 겁니다! 바로 찾아보겠습니다!”

"당장 찾아와!”

저들이 우리가 사라진 것을 알아차렸다.

뒤늦게 알아차린 감이 있기는 하지만 반가운 소식은 아니었다.

심지어 곧 이쪽으로 내려올 모양이었으니까.

도망… 아니, 어디론가 숨을 곳이 필요했다.

그러고 보니 물소리가 어디서 들렸지?

다시금 귀를 기울이니 근처에서 들려오는 게 분명했다.

“시몬 저기로!”

나무판자가 가로막고 있는 벽 너머에서 물방울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작게 외치자 그가 다급히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다행히 나무판자를 치우니 우리 셋이 들어가기 충분한 공간이 나타났다.

라그나르도 이쪽으로 달려와 간발의 차로 무사히 숨을 수가 있었다.

얹힌 나무판자 사이로 틈이 있어서 대충 사내들이 뛰어다니는 모습이 보였다.

사내들은 한참이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건물을 뒤지기 시작했다.

우리는 입을 틀어막고서 숨소리도 최대한 줄였다.

시간이 한참이고 흐르자 결국 자작이 머리를 부여잡고 외쳤다.

“젠장! 곧 그자가 올 텐데!"

“벌써 왔는데 말이지.”

애타는 자작의 외침 뒤로 낯선 인물이 등장했다.

“헉, 베르돌트! 언제 온 건가! 하하하!”

"웃네? 애들이 어디 갔는지도 모르는데 웃음이 나와?"

“…다, 당장 찾아내겠네! 그러니까…!”

얼핏 들어 본 적 있는 이름이었다.

그가 누구인지 기억을 되짚는데, 라그나르의 표정이 이상했다.

"......"

라그나르는 충격 받은 표정으로 간신히 입을 틀어막고 있었다.

이야기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니 지금은 물어볼 수 없지만,

"아니. 밀실이었다며, 이 정도면 일부러 풀어 준 것 아냐?"

"아, 아닐세! 진짜 아닐세!"

자작의 목소리가 비굴해졌다.

곧이어 손을 싹싹하고 비는 소리도 들려왔다.

“라그나르라는 이름을 가진 애가 있었다고 해서 걔를 데리고 오는 조건으로 정보를 넘겨준 것 같은데.”

베르돌트의 입에서 라그나르라는 이름이 튀어나왔다.

동시에 나와 시몬의 시선이 라그나르에게로 향했다.

기억이 났다.

'베르돌트는….’

“분명, 분명히 잠들어 있었어. 진짜야! 잘 데리고 있었다고!”

자작은 더욱 싹싹 빌면서 외쳤다.

"내가 왜 거짓말을 하겠나! 사지 멀쩡히 데리고 왔고, 네가 밤까지 기다리라고 해서 빌어먹을 황태자도 안 죽이고 기다리고 있었다고!"

“그걸 내가 어떻게 믿어.”

“진짜라니까!”

팩하고 지른 소리는 마치 살려 달라고 간절히 애원하는 것 같았다.

“나한테 돈을 받아 내려고 개수작 부리는 것일 수도 있지."

"아냐! 라그나르라는 놈을 죽이고 싶다고 기다리라고 했잖아! 황태자도 함께 잔인하게 죽여 주겠다고 해서 기다렸다고!"

“거짓말하는 놈은 싫은데.”

흐음, 하고 고민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에 희망을 얻었는지 자작이 필사적으로 다시 매달리기 시작했다.

“지, 진짜로… 컥.”

변명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아니 이어질 수가 없었다.

살이 뒤틀리는 끔찍한 소리가 들려왔다.

뚝뚝하고 피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고 자작은 휘청거리다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바닥으로 쓰러졌다.

쿵- 하고 커다란 소리가 지하실을 울렸고, 좌중이 조용해졌다.

“멍청한 새끼. 걔가 어떤 놈인데.

진작에 도망치고도 남을 시간인데 찾아오기는.”

사내는 피가 묻은 손을 가볍게 털어 냈다.

자작의 시체는 우리가 숨은 곳 근처에 쓰러졌지만, 다행히도 나무판자는 넘어지지 않아 들키지 않은 것 같았다.

“저, 저기… 저희가 아직 돈을 못 받았는데….”

살해 장면을 목격했는데도 저렇게 말을 붙일 자가 있다니.

기가 찬 듯한 베르돌트의 웃음뒤로 다시금 끔찍한 소리가 들렸다.

"도망친 애들 잡아 와서 달라고 하든가. 죽은 새끼한테 매달려서 달라든가."

베르돌트는 불쾌한 목소리로 말을 쏟아 내고서 발걸음을 옮겼다.

“하, 진짜 아쉽네. 우리 빌어먹게 사랑스러운 동생을 이번에는 죽일수 있을 줄 알았는데.”

이곳에는 더는 미련 없다는 듯 떠나는 가벼운 발걸음과는 어울리지 않는 무거운 말이었다.

베르돌트는 멀어졌고, 그제야 남아 있는 사람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그들과 다르게 우리는 아직 떠나지 못한 저 사내들 때문에 안도할 수가 없었다.

“호위 섰던 새끼 누구야! 어떻게 하면 애새끼들 하나 관리를 못해!”

“우린 억울해! 쥐새끼 소리하나 들리지 않았는데 갑자기 사라졌다고!"

고용한 주인을 두고서 사내들이 말다툼하기 시작했다.

“애초에! 애초에! 네놈들이 망을 잘 보기만 했어도!"

“억울하다니까!”

곧이어 주먹 다툼하는 소리가 들렸고, 말리는 소리도 들렸다.

"그만하고! 떠나기 전에 다시 한번 찾아보자고! 적어도 황태자 몸값은 받아낼 수 있겠지!"

"다른 꼬마도! 아까 그 사내에게 준다면 큰돈을 받을 수 있을지도 몰라!”

역겨운 말이었다.

제대로 일해서 벌 생각은 하지도 않고, 고작 어린아이들 목숨 가지고서 더러운 돈을 벌어들이는 역겨운 사람들.

아마 영혼마저 구역질이 날 정도로 더럽지 않을까.

돈이라는 하나의 목표가 생기자사내들이 다시금 의견을 똘똘 뭉쳐 이리저리 흩어졌다.

"하. 미친 새끼들. 찾긴 뭘 찾아.”

그리고 그 중심에서 다른 이들을 다독이던 한 사내가 욕설을 내뱉으며 자작의 시체로 향했다.

“대충 돈이 될 만한 것 가지고 먼저 빠져나가야지. 언제 잡힐지도 모르는데 도망칠 생각은 안 하고.”

사내는 상스러운 욕을 중얼거리며 자작의 몸을 뒤지기 시작했다.

원하는 물건이 나오지 않아서 짜증이 난 건지 점점 목소리가 더 커지는데 갑자기 그가 조용해졌다.

“그런데 이 나무판자 뭐야.”

사내가 괜히 나무판자를 툭툭 쳐 보더니 이상함을 느끼고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뭐야, 설마….”

사내의 목소리에 숨길 수 없는 설렘이 느껴졌다.

아니, 설렘이 아닌 욕망의 목소리였다.

"야이씨. 너희 여기 숨어 있었구나! 내 돈줄!”

들켰다!

뒤는 막힌 벽이라 빠져나갈 공간이 없었고, 앞은 사내가 지키고 있었다.

우리는 최대한 나무판자를 붙잡았지만 사내 또한 만만치 않았다.

“명령이다! 썩 비켜라!"

"아이고, 황태자라고 다른 애들 감싸 주는 거야? 어차피 다 죽은 목숨인데 뭐. 살려 줄 줄 알았어?"

시몬이 품에서 단검을 꺼내려고 했다.

“아니, 이게 어디로….”

하지만 품속에 잡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위험해. 나서지 마."

“무슨 소리….”

곧이어 간신히 막고 있던 나무판자가 완전히 뜯겨 나갔고, 그와 동시에 라그나르가 박차고서 튀어 나갔다.

"끄아아악!"

사내의 끔찍한 비명 소리가 지하실에 가득히 퍼졌다.

“내 검을 언제….”

시몬의 뒷말은 차마 끝까지 이어질 수 없었다.

“시몬! 우선 빠져나가야 해!"

라그나르가 몸을 던질 것은 예상못 했지만,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응!"

그 말에 시몬이 정신을 차리고서 숨어 있던 곳에서 빠져나갔다.

나를 업는 것까지 성공했고, 사내를 피해 위로 올라가기만 하면 우리는 도망칠 수 있었다.

"라라!”

"조금만 더!”

라그나르는 사내를 뒤쫓아 오지 못하게 할 생각인 것 같았다.

사내의 어깨를 단검으로 공격한 뒤 그 상태로 버티고 있는지 거기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사내는 어떻게든 놓치지 않고 꽉 잡고 있다가 고통을 이기지 못했는지 비명을 지르며 라그나르를 멀리 내던졌다.

"아악! 빌어먹을 새끼가!"

멀리 날아가면서도 라그나르는 검을 가져가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리고 멀리 날아간 것은 라그나 르뿐만이 아니었다.

사내의 팔이 얼굴을 지쳐 라그나 르가 쓰고 있었던 색안경이 바로 앞에 떨어졌다.

“색안경이….”

“라그나르!”

고개를 들면 안 돼!

하지만 내 외침이 이어지기도 전에 라그나르는 고개를 들었고, 이 내 시몬과 눈이 마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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