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1화.
“눈이….”
“눈이…”
파충류와 같이 세로로 찢어진 동공을 마주친 시몬이 당황하며 뒷걸음질을 쳤다.
하지만 뒤에 닿는 것은 우리가 숨어 있었던 공간뿐.
"......"
라그나르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입술을 꽉 깨물었다.
“여기야! 다들 여기로 오라고!
애새끼들 다 여기 있으니까 이리로 오라고!”
사내의 고함이 지하실에 가득히 울려 퍼졌고, 소리를 들은 다른 이들이 빠르게 달려오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에서 정작 움직여야 할 라그나르와 시몬은 돌처럼 굳어 있다.
“…이 바보들아!”
결국, 나는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눈이 특이하면 뭐 어때! 그래도 친구인 건 변하지 않는데!”
내 말에 라그나르와 시몬이 흠칫하고 몸을 떨었다.
“난 라라랑 시몬이 다른 사람들과 달라도 계속 친구할 거란 말이야!"
“…다프네.”
라그나르가 작은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표정은 울 것처럼 일그러져 있었다.
“우리 같이 무사히 빠져나가기로 했잖아! 죽음을 같이 이겨 내기로 했잖아! 정신 차려!"
내 말이 끝남과 동시에 뒤쪽에서 사람이 튀어나왔다.
“그래! 무사히 빠져나가야지! 우리랑!”
덩치 큰 사내가 나와 시몬의 뒤에서 몸을 날렸고, 시몬이 뒤늦게 몸을 움직이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잡힌다!’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그르르륵.”
공격을 한 사내가 거품을 물고서 의식을 잃은 채 뒤로 넘어갔다.
“라그나르!”
“나한테 맡기고 도망갈 준비나해!"
시몬이 정신을 차리고 외치자 라그나르는 재촉하듯 대꾸하곤 가볍게 점프하여 새로 온 사람의 머리를 칼 손잡이로 내려쳤다.
사내들을 일격에 기절시키는 모습은 죽었다 깨어나도 따라 할 수 없을 것 같아 경이로워 보이기까지 했다.
“어서!”
라그나르의 외침에 시몬이 이를 악물고서 뛰기 시작했다.
조금 전 보았던 희미한 빛은 위층으로 통하는 계단에서 새어 나오고 있었다.
그곳을 올라가자 바로 코앞에 출구가 보였다.
저 문만 열고 나가면 되겠지.
하지만….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라그나르가 강한 것을 알지만 그래도 저렇게 많은 사내가 덤비는데 괜찮을까.
“라라….”
내 중얼거리는 목소리에 시몬의 발걸음이 멈추었다.
그는 잠시 무언가를 고민하더니 나를 천천히 바닥에 내려 주었다.
“다프네.”
“응, 시몬.”
"나 금방 돌아올게.”
결연한 목소리였다.
“…응. 나는 도움이 안 될 테니까. 미안해.”
함께 돕지 못하는 미안함에 눈물을 글썽였다.
하지만 시몬은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다프네는 내게 용기를 줬는걸.”
"......."
“라그나르를 데리고 무사히 돌아올게!”
그러고는 시몬이 내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고 기다려. 우리 친구 어서 데려올게.”
“꼭. 무사히 돌아와야 해.”
"응!"
시몬은 바닥에 널린 기다란 나뭇가지를 들고 다시 아래로 뛰어 내려갔다.
'분하다.'
이런 위험한 상황에서 친구들에게 도움은 되지 못할망정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방해가 된다니.
'걷지 못하는 것도 분하고, 함께 싸울 수 없는 것도 분해.'
지독한 자기혐오가 온몸을 덮었다.
'내가 조금만 더 힘이 있었더라면, 그랬더라면!’
하지만 이렇게 나 자신을 깎아내린다 해도 기적처럼 신비한 힘이 주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기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였다.
마음속으로 빌고 빌었다.
‘만약에 내 목소리를 듣고 있다.
면. 제발 내 친구들을 무사히 내 품으로 돌려보내 주세요.'
신이 밉고, 증오스러워도 간절한 바람은 멈추지 않았다.
원망하는 자에게 소원을 빈다는 것이 비참하였으나 그렇다고 울수는 없었다.
'내 소리를 다른 일행이 들으면 안 되니까.'
적어도 도움이 못 된다면 방해는 되지 않고 싶었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출구 쪽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설마.”
설마 저 안에 있는 녀석들의 일행은 아니겠지.
아니, 아닐 거다. 아니어야 한다.
“황태자 전하!”
"!"
이 목소리는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있다.
신전에 올 때마다 항상 시몬의 옆에 있던 호위 기사의 목소리가 분명했다!
이렇게 어른이 반가울 수가 있을까.
“시몬! 시몬!”
그 뒤에 들리는 목소리에 순식간에 몸에 힘이 빠졌다.
악셀리우스의 목소리였다.
그제야 참았던 눈물이 눈가에 맺혔다.
이곳을 나갈 수 있다는 사실에 감격스러워 목이 메었다.
“여기, 여기예요!”
갈라진 목소리가 미처 문 너머까지 닿지 않는지 돌아오는 답이 없었다.
'못 듣고 지나쳐서는 안 돼!'
지금 기회를 놓치면 아래에 있는 라그나르와 시몬이 어떻게 될지 모른다.
“악셀리우스 아저씨!"
어떻게든 목소리를 쥐어짜며 소리를 지르자 곧이어 출구가 부서졌다.
그리고 갑옷을 입은 기사들이 건물에 들이닥쳤다.
“다프네? 무슨 일이야!”
"괜찮아, 다프네?”
타이밍이 좋다고 해야 할지.
라그나르와 시몬이 서로 부축하면서 계단을 올라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멀쩡한 그 모습에 나는 눈을 꼭 감고서 신께 감사를 빌었다.
'둘을 다시 내게 보내 줘서 고마워요.'
지금 이 순간만큼은 신이 원망스럽지 않았다.
어느새 라그나르의 얼굴에는 색 안경이 돌아와 있었고, 시몬은 더 이상 그의 색안경을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전하! 괜찮으십니까!"
기사들의 선두에 있던 악셀리우스가 황급히 뛰어왔다.
그러고는 시몬을 부축하면서 다친 곳이 있는지 꼼꼼하게 살펴보기 시작했다.
“아아. 난 괜찮네. 용의자들은 모두 아래층에 있으니 체포하도록."
"다들 아래로.”
악셀리우스의 명령에 호위 기사를 제외한 다른 이들은 전부 지하로 향했다.
“다프네도, 라그나르도 괜찮아?"
악셀리우스는 시몬을 살펴보다가 우리에게로 시선을 던졌다.
붉게 달아오른 눈에 가득 담겨 있는 걱정과 후회, 그리고 안도감이 보여 그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드디어 모든 상황이 끝이 났다.
“죄송합니다. 전하! 다 제 불찰입니다!”
“됐어. 납치극을 벌인 놈들이 잘못한 일이야.”
시몬은 눈빛을 날카롭게 빛내며 악셀리우스에게 말했다.
“분명히 신전에서 일어난 일이니 모두가 그대를 의심할지도 몰라."
악셀리우스는 침통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시몬의 말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하지만 난 그대를 믿어, 대공.”
그 말에 악셀리우스가 멈칫하더니 감동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눈가에 얼핏 눈물이 맺혀 있었던 것 같았지만 그래도 웃고 있었다.
“그러니 그대가 이 사건의 총책임을 맡도록 해."
"예. 알겠습니다.”
시몬과 악셀리우스의 대화가 끝나자 곧 다른 기사가 외쳤다.
“대공 저하! 의사를 대기시켜 놓았습니다!”
다급한 목소리로 부르는 기사들 때문에 시몬은 빠르게 마차로 옮겨졌다.
악셀리우스와 순식간에 사라진 시몬의 모습이 어째 서운했다.
그 사이로 간간이 어떤 가문의 문장이 새겨진 갑옷을 입은 기사들도 보였는데 시몬이 짜증을 내며 그들을 내쫓는 것도 보였다.
복잡한 상황 속에서 결국 이렇게 헤어지는구나 싶었다.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프네. 라그나로, 어디 다친 곳은 없어?"
급하게 달려온 상단의 마차에서 레녹스와 리카르다가 내렸다.
둘의 얼굴을 보자 이상하게도 조금 전과 다르게 감정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곧 주르륵하고 눈물이 흘러내렸고, 레녹스가 당황하며 나를 안아들었다.
“늦어서 미안해. 정말 미안해.”
"무서웠어. 진짜 무서웠단 말이야.”
레녹스의 품에 안겨 눈물을 떨구는데 옆에서 빠드득하고 이 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 자식들 곱게는 안 보낸다."
리카르다가 라그나르의 상처를 보며 화르륵 분노를 불태우고 있었다.
"맙소사. 라그나르! 당장 상처부터 치료하자!”
레녹스가 기겁하며 물약을 꺼내 들고 급하게 상처에 회복 물약을 부었다.
라그나르는 아프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고, 그것을 본 리카르다는 더는 참지 못하겠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형, 다프네랑 라그나르를 부탁할게. 뒤는 나에게 맡겨.”
“믿는다.”
그 짧은 대화의 끝으로 리카르다가 기사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향했다.
“나머지는 집으로 가서 치료하자. 늦게 와서 미안해.”
레녹스는 피곤하고 지친 우리를 빠르게 마차에 태우려고 했다.
그런데 그때 뒤에서 시몬의 목소리가 들렸다.
“라그나르.”
"......."
어느새 시몬이 악셀리우스도, 귀찮게 하는 기사들도 내팽개쳐 둔채 우리 뒤에 서 있었다.
시몬은 심상치 않은 표정으로 라그나르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화가 난 것처럼 고운 미간이 찌푸려져 있었다.
라그나르는 시몬의 부름에 고개를 돌렸다.
마치 체념한 것처럼 보였다.
둘 사이를 이어가는 짧은 적막뒤로 시몬이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