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2화.
시몬은 평온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어떤 사람이든 넌 내 친구야.”
라그나르가 말이 없자 시몬은 투박한 손길로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넌 아닌가?”
“맞아.”
그 대답에 시몬은 충분하다는 듯 씨익 웃었다.
“그래. 편지할게.”
“…나도."
시몬은 씨익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라그나르의 원래 모습을 봤어도 신경 안 쓰겠다는 말이었다.
라그나르도 따라 함께 웃었다.
색안경으로 눈이 가려졌지만, 눈도 곱게 휘어져 있을 것이다.
어쩐지 그럴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지독한 여름밤도 끝이 찾아왔다.
* * *
“그러니까 이 새끼들이 전부입니까?”
살벌한 리카르다의 목소리에 황실의 기사들은 눈치를 보며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앞에 있는 자가 귀족도 아닌 고작 상단의 자식인 것을 알지만 쉽게 무시할 만한 상대는 아니었다.
그들의 앞에 있는 리카르다는 베네디토 상단의 일원이며, 마탑의 차기 후계자로 유명한 자였다.
쉽게 여길 수 없는 배경에, 그에게 협조하라는 대공의 명이 있었으니 막을 수는 없었다.
리카르다는 밧줄에 꽁꽁 묶인 채 고개를 숙인 자들을 보며 이를 빠드득 갈았다.
'고작 이깟 놈들 때문에 내 동생들이.’
치밀어 오는 분노에 당장이라도 이들에게 죽음에 가까운 고통을 선사해 주고 싶었으나.
'보는 눈이 많지.'
아이들이 무사하기에 간신히 이 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지하에서 패트릭 자작의 시체가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황실의 기사가 뒤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곳에는 헤로니스 공작가의 기사들이 시체를 수습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저 문양은 헤로니스 공작가인데.'
리카르다는 그들을 미심쩍은 눈으로 바라보다가 앞에 있는 기사에게 물었다.
“헤로니스 공작가의 기사들이 왜 이곳에 있습니까?"
"우연히 수상한 인물들을 발견해서 뒤쫓다가 저희와 마주쳤다고 하더군요.”
황실의 기사들 또한 불편한 눈으로 헤로니스의 기사들을 바라보았다.
이상한 점 투성이였다.
상황을 정리하면 패트릭 자작이 범인인 것은 확실하였다.
'황실 때문에 집안이 풍비박산났으니 원한을 가질 만도 하지.'
그런데 그가 어떻게 황태자의 정보를 입수하였는지는 의문이었다.
'그리고 그 패트릭 자작을 누가 죽인 거지?'
리카르다는 마차가 떠나간 방향으로 시선을 던지며 고민에 휩싸였다.
'혹시 라그나르가? 아니야. 라그나르의 방식으로 죽였다면 이보다 피가 훨씬 더 많이 튀어 있었을 거야.'
무엇보다 다프네가 있었으니 누군가를 죽이려는 행동 따위는 하지 않았을 것이 확실했다.
'그렇다면 누구일까.'
외부 침입자가 있다는 소리인 걸까? 도중에 끼어든 헤로니스 공작가와 관련이 있는 걸까?
그 의문에 리카르다가 미간을 찌푸렸다.
'빌어먹을 헤로니스 공작가. 쓸데없이 끼어들고 있어.'
다프네를 가차 없이 버린 공작의 가문이니 호감이 갈래야 갈 수가 없었다.
'아니, 공작이 이 자리에 없었던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하나.'
쓸데없는 생각은 저리 집어치우고서는 그가 묶여 있는 사내들에게로 시선을 던졌다.
“이들은 어떻게 됩니까?"
“감히 황태자 전하를 납치하여 상해를 입히려 한 자들이니 최소사형일 것입니다.”
“히익.”
사형이라는 말에 묶여 있는 자들의 표정이 창백해졌다.
그들은 무언가 말이라도 하고 싶은 듯했지만 자결을 방지하기 위해 입이 막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해 답답해하고 있었다.
“남을 해치려면 자기도 죽을 수 있다는 생각 정도는 했어야지."
리카르다는 애처로운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그들에게 자비를 베풀 생각도, 도움을 줄 생각도 없었다.
"황실이 개입했으니 저희가 나설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겠군요."
“황실에서 본격적으로 조사 후배후들을 파악한 뒤에 처리가 될 것입니다. 걱정하실 일은 없을 겁니다.”
저들에게 자비로운 처벌이 내려지지 않을 것이란 소리였다.
어차피 사형이 확정이었기에 리카르다가 이곳에서 할 수 있는 것은 더 이상 없었다.
"그렇군요. 아. 이 쓸데없는 건물도 패트릭 자작의 소유입니까?"
리카르다는 납치가 이루어진 범인들의 아지트를 가리키며 말했다.
“아마 그럴 것 같습니다.”
“안의 증거는 모두 확보했습니까?”
황실의 기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노예 매매를 했다더니 끔찍한 증거가 가득하더군요. 다행히도 그 외의 것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안에 아무도 없는 것이 확실하고요?"
리카르다의 물음에 기사는 영문모를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주모자가 죽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쉽게 물러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리카르다는 그 대답이면 충분하다는 듯 손에 마력을 피워 내었다.
농도 깊은 마력이 불꽃을 만들어 내더니 이내 낡은 건물을 향해 날아갔다.
작은 불꽃이 넘실거리며 건물을 잡아먹기 시작했다.
날름날름 번지는 불길은 주변의 무엇도 건드리지 않은 채 그 건물만 태우겠다는 듯 크기를 키워 내기 시작했다.
낡은 건물은 금세 불길에 잡아먹혔고, 빠르게 무너지기 시작했다.
화르륵 타오르는 건물을 보고 기사가 당황하며 말했다.
"아무리 죽었다 하여도 아직은 패트릭 자작의 소유입니다! 함부로 이렇게 불을 내시면 안 됩니다!”
기사의 걱정에 리카르다는 뭐가 문제냐며 웃었다.
“어차피 있으나 마나 한 폐건물이지 않습니까? 처리를 도와드리려고 했는데 유감이네요.”
“하나! 사유 재산이니 패트릭 자작의 가족들과 상의하에.…!"
기사는 말을 계속할 수 없었다.
리카르다의 싸늘한 눈빛이 기사를 지나쳐 묶여 있는 이들에게로 향했다.
“그 가족들은 건물을 태우는 정도로 끝난 것을 안심해야 할 겁니다.”
살벌한 시선에 범인들은 자신들도 모르게 소름이 돋아 몸을 부르르 떨었다.
“패트릭 자작의 시체를 태우지 않는 것을 감사히 여겨야 할 테니까요.”
“그런…!”
분이 담긴 말에 기사가 차마 입을 열지도 못했다.
그 또한 어디까지나 자작과 관계 없는 타인이었고, 이 상황에 분노하는 사람 중 한 명이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문제가 된다면야 이 건물은 베네디토에서 사들이겠습니다.”
“예?”
마치 식사를 권하기라도 하는 듯 태연한 태도였다.
기사는 리카르다의 분노에 공감하는 것도 잠시 빠르게 흘러가는 대화의 흐름을 따라잡지 못하고 다시 한번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베네디토의 소유이니 제가 어떻게 하든 상관없지 않습니까. 아주 잿더미로 만들 테니 말리지 마십시오.”
그 말과 함께 불길이 더욱 거세게 타올랐다.
황실의 기사들뿐만 아니라 헤로 니스의 기사들, 그리고 잡힌 범인들도 눈 하나 깜빡하지 못한 채 경이로운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놀랍게도 불길은 계속해서 커져가는데도 주변에는 불똥 하나 튀지 않았다.
마치 저 건물 하나만 다른 세상에 있는 것처럼.
엄청난 컨트롤이 요구되는 마법이라는 것을 직접 보는 모두가 느끼고 있었다.
“과연 차기 마탑주….”
누군가가 중얼거리는 말에 모두들 소리 없는 공감을 하였다.
리카르다는 그 말을 신경 쓰지 않은 채 자신을 상대하는 기사에게 말했다.
“만약 패트릭 자작의 가족들이 불만을 표시한다면 전해 주시겠습니까?”
“예, 예.”
“제가 나섰으니 이 정도로 끝난 줄 알라고요. 만약 어머니께서 나서셨다면….”
리카르다는 빠르게 타들어 가며 무너진, 이제는 건물이라고도 부를 수 없는 잿더미를 바라보며 살벌하게 웃었다.
“잿더미가 되는 것은 건물이 아니었을 겁니다. 베네디토는 한 번 노린 것을 절대로 놓지 않는다는 것도 꼭 전해 주시기를.”
리카르다의 말에 기사는 긴장감에 침을 꿀꺽 삼켰다.
기사 또한 베네디토 상단주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알기에 저 절로 긴장한 것이다.
적어도 클로에가 이곳에 있었다면 저 시체가 무사히 가족들에게 넘어갈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와 함께 왜 이 정도까지 화를 내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마 이 사건에 대해서는 어머니께서 정식으로 황실에 서신을 넣으실 겁니다.”
“그, 그 정도입니까?"
베네디토 상단의 직통 서신이라는 소리에 기사가 진땀을 흘렸다.
그녀가 직접 나선다면 이 사건이조용히 묻히지 못할 테니 이리저리 시달릴 것이 안 봐도 뻔했기 때문이다.
그와 함께 조금 전에 한 궁금증도 풀렸다.
"베네디토의 후계자가 납치된 사건입니다. 쉽게 넘길 수야 없지요.”
"예?"
의외의 말을 들은 기사가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모든 소식을 다 전했다는 듯 리카르다는 몸을 획 돌렸다.
“그럼 수고하시길.”
반짝이는 빛과 함께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은 금방이었다.
텔레포트 마법에 기사가 놀란 눈을 비비적거리다가 한숨을 쉬었다.
“하, 타이밍 한번 기가 막히는군.”
기사는 엄청난 힘에 압도당한 듯 질린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그도 그럴 것이 불길에 잠겨 있던 건물은 어느새 형체를 잃고 사라진 지 오래였으니까.
목적을 이뤘다는 듯 불이 꺼지는 것은 금방이었다.
***
리카르다는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다프네의 방으로 향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곳에 다프네와 라그나르가 함께 침대에 누워 잠들어 있었다.
“둘이 떨어지기 싫다고 해서 어쩔 수 없었어.”
레녹스의 말에 리카르다는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침대 옆에 앉았다.
"애들은 괜찮아?"
“놀란 것 같지만 그래도 진정하고 잠들었어.”
“그래.”
분명 아이들이 무사한 걸 자신의 눈으로 확인했음에도 불안해서 미칠 것 같았었다.
리카르다는 안경을 벗어 한쪽에 내려 두고서는 분노를 참으며 얼굴을 쓸어내렸다.
"이상한 점이 있었어."
"이상한 점이라니?"
레녹스의 물음에 리카르다가 피곤함을 삼키며 말했다.
“헤로니스 공작가의 기사들이 그곳에 있더라고. 우연이라고 하지만 수상해.”
“…혹시 그들 쪽에서 황태자의 정보를 넘긴 것이 아닐까?"
레녹스의 말에 리카르다가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며 물었다.
“헤로니스 공작가에서 그럴 이유가 있나? 황태자와 공녀는 약혼할 사이라고 들었는데.”
“그래서 그런 거겠지. 신전에 드나 드는 게 마음에 안 들었을 테니까.”
설득력 있는 말에 리카르다가 공하고 앓는 소리를 내었다.
“지겹게도 얽히는구만."
불만이 가득한 목소리에 레녹스 또한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니께서는?"
“바빠서 못 움직이고 계시지만, 패트릭 자작이 범인이라는 소식을 듣고 관련된 것들을 모두 사들이고 계신가 봐. 남은 식솔들까지 어떻게든 망하게 할 작정이신 듯 했어.”
그 말에 리카르다가 피식 웃었다.
“해 준 충고가 쓸모없게 됐네."
“응?”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리카르다는 잠든 다프네와 라그나르를 보며 씁쓸히 웃었다.
"다음부터는 늦지 않고 달려갈게.”
부디 그 말이 아이들에게 닿기를.
소중한 동생들이 악몽을 꾸지 않기를 바라는 이 밤은 기도가 닿았는지 다행히도 평화롭게 지나갈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