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3화.
단풍잎이 붉게 물드는 가을이 찾아왔다.
엊그제까지 분명 겨울이었던 것 같은데, 어느덧 봄을 지나 여름을 거쳐서 가을에 도착한 게 믿기지 않았다.
어쩐지 다음 계절을 향해서 열심히 달리는 기분이야.
“곧 겨울도 다가오겠지."
겨울은 살을 아리는 그 바람과부정적인 시선들이 생각나서 무서울 것 같기는 하지만.
‘완전히 나쁜 기억만 있는 것은 아니니까.’
엄마도 만났고, 레녹스랑 리카르다도 만났고, 라그나르도 만났지.
그 기억에 기분이 좋아져 미소를 지으며 다시 펜을 들었다.
"나는 잘 있어. 곧 있을 가면 축제를 위해 가면도 만들고 있고.”
한 자 한 자 꾹꾹 눌러쓰면서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그 끔찍한 여름밤이 지나고 신전의 보안이 강화가 되었다고 전해 들었다.
황태자 납치 사건은 제국 신문에 대서특필되었고, 패트릭 자작가는 작위를 몰수당하고 재산은 모두 사회로 환원되었다고 한다.
'무역을 중심으로 하던 가문인데 그 길마저 모두 막혔다고 쓰여 있었지.'
망한 것이나 다름없다 들었다.
그리고 납치에 동조한 다른 이들은 자비 없이 사형이 내려졌다고 했다.
아, 우리에게도 황궁에서 형식적 이나마 보상금이 나왔다고 했다.
엄마는 고통을 돈으로 사려고 한다고 분통을 터트렸지만, 그나마도 베네디토 상단이었기에 받을 수 있던 것이라 말하시는 걸 들었다.
“더 열심히 해야지."
적어도 어서 내 두 다리로 뛰어다닐 수 있어야 하고, 공부도 열심히 할 거야.
그때 바람을 타고서 붉은 낙엽하나가 내 앞으로 떨어졌다.
“벌써 한 해가 반 이상 지났다는 게 안 믿기네.”
나는 낙엽을 만지작거리다 요새 읽는 책 사이에 끼워 넣었다.
계절에 맞는 훌륭한 책갈피였다.
추수의 계절이 다가왔고, 가면 축제도 곧이니 상단도 엄마도 모두가 바빴다.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아서 어쩔 수 없이 외출하는 것을 자제하기는 했지만.
“가면 축제는 아니야."
시몬이랑도 약속했으니까.
엄마도 가면 축제에 놀러 가는 것은 허락해 줬다.
가면 축제가 끝나면 자신이 일하는 상단에도 놀러 오라고 하셨다.
물론 바쁜 세 사람을 대신해서 윈스턴이 와서 우리를 보살펴 주겠지만.
“시몬이 황태자의 호위라고 그냥 그럴싸하게 이유를 붙인 거라고 했었는데.”
지난 편지를 떠올리며 쿡쿡 웃다가 아차 하며 다시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내 가면은 만날 때까지 비밀이야. 네 가면이 뭔지도 궁금하다."
얼추 편지가 마무리되었을 때, 똑똑하고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다프네. 들어가도 될까?"
노크 소리의 주인공은 레녹스였다.
리카르다라면 고민하는 척 장난을 쳤겠지만, 레녹스는 아니다.
나는 봉한 편지를 내려놓고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천천히 걸어가 문을 열고 직접 레녹스를 맞이해 주었다.
“확실히 다리가 좋아졌네."
“응. 모두의 덕분이야.”
레녹스의 다리를 꼭 껴안자 그가 익숙하게 나를 안아 들었다.
벌써 1년이 지나간다고 레녹스는 처음 만났을 때보다 더욱 성장한 모양이다.
평상시와 다른 눈높이에 감탄하니 부드러운 웃음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다리가 안 아파도 안을 수 있을 때까지 안게 해 줘. 귀여운 내 동생.”
“레녹스라면 언제든지 좋아."
소소한 사담을 나누며 꺄르르 웃었다.
“뭐야. 우리 빼고 뭐가 이렇게들 즐거우실까.”
“둘만의 비밀이야. 그렇지 레녹스?"
“물론이지.”
내가 검지를 들어 입가로 가져가 쉿~ 하고 말하자 레녹스도 따라하며 웃었다.
리카르다가 얄밉다며 투덜거렸지만,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레녹스의 품에 안겨 도착한 곳은 응접실이었다.
“…설마!”
달칵하고 열린 문 뒤로 가만히 앉아 있는 라그나로, 그리고 서서 누군가와 대화하고 있는 엄마가 보였다.
그리고 그 옆에는 오래간만에 만나는 윈스턴이 있었다.
“윈스턴!"
"아가씨. 오래간만에 뵙죠?"
“가면 가져왔구나.”
인사도 없이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는 것이 예의는 아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일주일을 기다린 가면인걸!
"네! 드디어 우리 꼬마 아가씨와 꼬마 도련님이 주문하신 가면이 완성되었답니다. 특별 주문 제작상품이죠.”
인제 보니 라그나르의 앞에 두개의 상자가 놓여 있는 게 보였다.
“라라. 많이 기다렸지?"
“아냐. 나도 온 지 얼마 안 됐어.”
라그나르가 기대된다는 표정으로 자신의 앞에 있는 상자를 품에 끌어안았다.
계속 함께해서 그런 걸까.
라그나르도 나처럼 작년이랑 키가 비슷비슷한 것 같았다.
묘한 안도감에 나도 그제야 선물상자를 들었다.
"두근두근하다. 그치?"
“응. 셋 세고 열어 보는 거야.
하나, 둘. 셋.”
기운차게 상자를 여니 안에 영롱한 빛을 내뿜는 가면이 보였다.
"나비 가면!”
처음에는 무엇을 할까 고민했었다.
어떤 가면으로 할지 한참을 고민했지만 결국 끌리는 것은 나비였다.
“주문해 주신 대로 예쁜 색을 골고루 섞어 봤답니다. 아가씨 마음에 드시나요?”
“너무!”
내 기운찬 반응에 모두가 웃음을 터트렸다.
라그나르도 두근두근하는 표정으로 상자를 열었다.
이내 그의 표정이 화사하게 밝아졌다.
가면 축제가 다가오고 있었고, 시몬과 다시 만날 날도 다가오고 있었다.
우리는 마주 보며 설레는 마음으로 웃었다.
* * *
“시몬은 무슨 가면을 쓰고 올까?"
“끝까지 안 알려 줬어.”
수도의 광장으로 향하는 마차 안.
라그나르가 부루퉁한 표정으로 자신의 가면을 만지작거렸다.
그래도 근래 중 그나마 신이 나보여 다행이었다.
라그나르는 가면이 도착하기 전까지 눈에 띄게 우울해했다.
문제의 여름밤에 만났던 베르돌트 때문이 분명했다.
그날 돌아가는 마차 안에서 딱딱히 굳어 있는 라그나르의 표정이 너무 슬퍼 보여서 결국 아무런 말도 못 꺼냈었지.
갑자기 나타나서 패트릭 자작을 죽이고 간 사람.
그리고 자신의 동생을 죽이고 싶다고 한 사람.
뒤늦게 베르돌트가 라그나르의 형이란 것을 알게 되니 더 꺼내기 어려운 문제가 되었다.
‘대화하는 것만 들어도 나쁜 사람 같았어. 역시 라그나르를 일부러 그런 곳에 버리고 간 걸까?'
라그나르가 그자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 하니 답답했지만.
때가 되면 이야기할 수 있겠지.
우울함을 던지고, 괜히 가면을 만지면서 심술을 누르는 모습에 기특해하며 머리를 쓰다듬다가 이 내 라그나르를 꼬옥 끌어안았다.
“다프네?"
“그냥 껴안고 싶어서. 싫어?"
"아니. 좋아.”
라그나르랑 마주 껴안고 있는데 옆에서 리카르다가 우리를 떨어트려 놓았다.
“꼬맹이들. 나도 못 하는 연애를 너희가 하면 어떻게 해."
“뭐, 뭐야. 그 시선들은."
왁왁거리면서 화낼 줄 알았는지 당황했다.
리카르다는 오히려 조용한 반응에 우리는 힐긋 눈을 마주치고서는 아무것도 아니라며 동시에 어깨를 으쓱했다.
"뭐야. 너희 나 외톨이로 만들려는 거야? 내가 너희를 어떻게 키웠는데!”
리카르다가 장난스럽게 눈물을 훔치는 시늉을 했다.
예전이었다면 라그나르는 속아넘어갔겠지만 이런 장난을 워낙 많이 접해서 그런지 이제 속지 않더라.
“이제 다 커서 반응도 안 해 주고."
나는 처음부터 반응이 없었으니 라그나르에게 하는 말이다.
어휴, 누가 어린애인지 모르겠어.
가볍게 등을 토닥토닥 해 줬다.
그러다 리카르다에게 붙잡혀 안긴 채 볼을 부벼지는 바람에 곧바로 후회했지만.
"아. 저기 아저씨다.”
라그나르가 가리킨 곳은 분수대가 있는 광장 중앙이었다.
다른 사람에 비해 머리 하나는 큰 남자가 귀여운 고양이 가면을 쓰고 서 있었다.
'분수대 앞에 서 있으니까 존재감이 엄청나다.'
주변 사람들이 힐긋힐긋 쳐다보는 건 느껴지지도 않는지 그는 눈을 마주치자마자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시몬은 안 보이네."
“가면 안 보여 주려고 아저씨 뒤에 숨어 있겠지.”
두 계절 동안 편지를 매일매일 나누다 보면 이렇게 성격 파악도 끝이 나는 걸까.
라그나르는 자신의 가면을 썼다.
그의 눈이 가면에 완전히 가려지는 것을 확인하고서 나도 가면을 썼다.
나비 가면이 눈과 콧등을 감싸주니 마찬가지로 내 눈 역시 안보일 거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다녀오겠습니다.”
라그나르가 신이 나 마차에서 뛰쳐나갔다.
그러더니 어디서 배운 건지 내게 정중하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라그나르가 내민 손을 잡고서 천천히 마차에서 내렸다.
뒤를 돌아보니 리카르다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다 컸네, 우리 꼬맹이들. 조금 이따 보자. 재미있게 놀고.”
리카르다에게 가볍게 손을 흔들고 라그나르의 손을 꼭 잡고서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거리에는 사람들이 매우 많았다.
그동안 열심히 농사를 지었다며 농작물을 홍보하는 사람도 있었고, 기념품이라면서 공예 물품을 파는 사람도 있었다.
아이들은 대부분 가면을 쓰고서 즐겁게 뛰어다니고 있었고, 한 쌍으로 맞춘 가면을 쓴 연인도 보였다.
이리저리 보아도 완벽한 축제였다.
“이런. 가면이 너무 멋있는 거 아냐?"
“예쁘죠?"
“멋지죠?”
악셀리우스의 감탄에 나와 라그나르가 동시에 말했고, 악셀리우스는 방긋 웃으며 그렇다고 답했다.
“그게 뭐가 멋져.”
악셀리우스 뒤에서 사자 가면을 쓴 소년이 튀어나왔다.
시몬이였다.
"나처럼 멋있는 사자 가면 정도는 써 줘야지. 꽃이 뭐가 멋져."
“......"
"......"
라그나르가 자신의 가면을 만지작거렸다.
예쁜 꽃들이 다양하게 얽혀 있는 가면은 확실히 멋지다는 말보다는 예쁘다는 말이 더 어울릴지도 모른다.
돌아오는 답이 없자 시몬이 이겼다는 표정을 지었다.
설마 이 꼬맹이들 어떤 가면이 더 멋진지 내기라도 한 걸까.
"내 가면이 더 멋져."
"어딜 봐도 꽃보다 사자가 멋지지! 클레멘스 제국의 상징이기도 하고.”
시몬이 더 이상의 답은 받지 않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자 라그나르의 어깨가 축 처졌다.
“하지만 나랑 세트인걸."
나는 나비 가면을 가리키며 말했다.
"나비는 꽃을 찾아가잖아. 꽃이 멋있으니까 찾아가는 것 아닐까?"
물론, 아니다.
하지만 그럴싸한 이유라도 덧붙여서 우울한 기분을 멀리 날려 줘야지.
라그나르가 너무 눈에 띄게 우울 해하자 시몬도 바로 거들었다.
"아니, 그… 안 멋지다는 건 아니야. 꽃 가면이라니 멋진데?"
“…사자 가면도 멋져."
“내 눈에는 둘 다 멋져."
그제야 둘의 입가에 환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나는 언제나처럼 두 사람의 손을 잡았다.
“우리 오늘 진짜 재미있게 놀기야? 지난번 일은 오늘 재밌는 일들로 덮어 버리자.”
말은 하지 않아도 우리의 마음 한쪽 구석에 그때의 무서운 기억이 남아 있을 거다.
그래도 나쁜 일은 얼마든지 좋은 일로 덮을 수 있으니까.
곧이어 하늘 위로 축제의 시작을 알리는 폭죽이 터졌다.
그 불꽃을 바라보며 환하게 웃자 두 사람의 얼굴이 기대감으로 붉게 달아오르는 게 보였다.
축제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