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녀의 딸로 태어났다-54화 (54/185)

제54화.

오늘을 위해서 용돈을 잘 모아 두었다.

"이거 세 개 주세요."

“무슨 맛으로 줄까?"

“딸기 맛. 초콜릿 맛. 바닐라 맛이요.”

우리는 아이스크림 가게 앞에서 당당하게 주문을 했고, 잠시 후 아이스크림을 받아들 수 있었다.

“역시 딸기가 제일 맛있어.”

“딸기도 맛있지만 역시 초코 맛이 더 맛있지 않아?"

“둘 다 맛을 너무 몰라. 모든 맛의 기초는 바닐라야.”

우리는 각자 최고의 맛을 따지며 맛에 대해 연설을 했다.

그러다가 결론은 각자의 취향을 존중해 주자는 것으로 끝이 났지만 뜻깊은 토론이었다.

“그럼 다음에는 뭐 할까?"

이렇게 광장으로 놀러 나오는 일은 처음이라 우리는 모두 신이 났다.

우선 라그나르가 원하는 아이스크림은 사 먹었으니까.

“이번에는 책방에 가 볼까?"

“책은 평소에도 자주 읽지 않아?”

"애들 수준의 책 좀 읽고 싶어졌어.”

내 말에 시몬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래간만의 외출, 평상시라면 이렇게 다른 사람들 사이에 섞여서 노는 것을 상상도 할 수 없는 우리니까.

이 귀한 시간에 하고 싶은 것을 모두 해야 했다.

셋이서 사이좋게 손을 잡고 걸어가자 주변의 시선이 느껴졌다.

따뜻한 시선과 눈빛은 마냥 들뜬우리의 기분을 점점 더 고조시켜주었다.

이렇게 거리를 걸을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행복한지 과거의 나라면 몰랐겠지.

아픈 나를 배려해 나와 발을 맞춰 주는 친구들이라든가.

언제나 따스한 눈으로 우리를 챙겨 주는 보호자라든가.

절대로 겪어 보지 못했을 거고, 행복도 느끼지 못했을 거다.

아마도 보육원을 나와 상단을 찾아오기로 결심한 것이 내 인생에서 최고로 잘한 선택 아닐까.

서점에서 동화책을 구경하는 시간은 즐거웠다.

셋 다 책을 좋아해서 그런지 생각보다 책방에서 오랜 시간을 보냈다.

그래도 모두의 표정에 만족의 미소가 피어올라 있었다.

물론 내 표정에도.

책방을 나오고 우리의 시선이 시몬에게 향했다.

이번에는 시몬이 하고 싶었던 것을 할 차례다.

"난 길거리에서 파는 걸 먹어 보고 싶어.”

어차피 곧 점심시간인 것 같고, 모두가 서서히 배가 고파 왔으니 다음 목적지가 정해졌다.

발걸음을 조금 옮기자 다양한 음식들이 쭈욱 진열된 거리가 나타났다.

“매운 닭 꼬치도 먹어 보고 싶고, 저 구름 같은 솜사탕이란 것도 먹어 보고 싶어.”

시몬은 그 어느 때보다도 신나 보였다.

"천천히 가도 음식은 도망가지 않아.”

방방 뛸 기세여서 겨우겨우 말려야 할 정도였으니까.

신이 난 것은 라그나르도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은 지지 않겠다는 듯이 이것저것 주문을 하기 시작했다.

왜 이런 데서도 경쟁심을 불태우는 걸까?

그런데 주문하는 것마다 전부 불량 식품인 것 같은데.

황태자가 이런 거 먹고 그래도 되나?

문득 드는 걱정에 악셀리우스를 올려다보았다.

악셀리우스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가볍게 어깨를 으쓱거렸다.

아니 오히려 자신도 신이 나서 저게 더 맛있다고 은근히 추천까지 해 주고 있었다.

‘진짜 황족 맞을까?'

변방에서 귀족, 평민 가리지 않고 함께 어울려서 더욱 거리낌 없다고는 했다지만.

'여기 있는 그 누구도 이 두 사람이 황위 계승자 1위와 2위라는 것을 모르겠지?'

대놓고 말해도 안 믿겠다.

“다프네! 이거 안 매운 닭 꼬치래.”

“과일에 설탕을 입힌 꼬치도 있데! 다 먹어 보자.”

안 믿으면 어때.

그렇다고 변하는 것도 아닌데.

과일 꼬치는 생각보다 인기가 많았는지 줄이 길었다.

다들 다른 것 사기 정신없어 보이기도 하고, 줄 서는 것 정도는 나도 할 수 있으니까.

"나 저기 줄 서 있을게."

바로 옆 가게고, 줄 서 있는 어린아이들도 많으니까 괜찮겠지.

악셀리우스의 걱정스러운 시선이 따라붙었지만 별로 멀지 않아서 조심하라는 말뿐 말리는 일은 없었다.

'이런 게 맛있을까.'

과일 꼬치가 다 거기서 거기지 뭐가 다르다고, 별 기대감 없이 줄을 섰는데 서서히 줄이 줄면서 그 모습이 드러났다.

미리 만들어 놓았는지 굳은 설탕물을 입힌 딸기 꼬치가 자기를 봐달라고 반짝반짝 빛을 내고 있었다.

"딸기.."

가을에도 딸기가 있다니?

놀라움은 잠시고, 반드시 저걸 사고 말겠다는 의지가 불타올랐다.

“딸기 맛있겠지!”

"......?"

내 목소리가 너무 컸나?

앞에 서 있는 아이 중 한 명이 고개를 돌려서 물었다.

그러자 그 아이의 친구들 모두가 뒤를 돌아보았다.

갑자기 시선이 집중되어 당황하는데 말을 건 아이가 티 없이 맑은 웃음을 지으며 묻지도 않은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여기 가게 사장님이 심심해서 만든 음식인데 진짜 맛있다? 이번 축제를 위해서 수확한 딸기도 모두 마법 창고에 보관했던 거래!”

"신기하지?”

“설탕이어서 달콤하다?”

한 아이가 입을 열자 다른 아이도 신이 나서 말을 걸기 시작했다.

“어, 어.”

너무 빠르게 자기 얘기만 해서 정신이 없었다.

당황한 눈빛으로 고개를 왔다 갔다다 하며 모두의 인사를 다 들어주었다.

“그런데 너는 누구야? 처음 보는 것 같아!”

"아….”

내가 당황하며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자 옆에 있던 아이가 질문한 아이의 옆구리를 퍽하고 쳤다.

“바보야! 원래 자기소개하고서 이름 묻는 거야! 안녕, 내 이름은 메리! 조금 전 물어본 애는 잭슨이야!”

“난 코라라고 해!”

아이들이 정신없이 자기소개를 하기 시작했다.

"천천히 얘기해 줘."

이렇게 열심히 하니까 그만하라는 말도 못 하겠잖아.

내 말에 아이들이 순서대로 자기 소개를 마쳤고, 나도 이름을 알려 주었다.

"내 이름은 다프네야.”

"이름 예쁘다!”

다람쥐 가면을 쓴 메리가 뺨을 감싸며 해맑게 말했다.

“혹시 관광객이야?"

“…응.”

굳이 아니라고 말해서 쓸데없는 정보를 줄 필요는 없겠지?

해맑은 아이들의 질문을 차마 거절하지도 못하고 하나하나 답해 주기 시작했다.

그러다 어느새 사려는 것을 모두 샀는지 라그나르와 시몬이 나타났다.

"뭐야?"

"이 애들은 누구야?"

라그나르가 불쾌하다는 듯 툭 던진 말을 시몬이 받아 다시 물어보았다.

"오른쪽부터 순서대로 메리, 잭슨, 코라, 사라, 제니야.”

“…아는 사이야?"

응? 그럴 리가 없잖아.

아닌 걸 알면서도 둘은 잔뜩 시무룩해진 게 표정에서 드러났다.

내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나서야 라그나르랑 시몬이 언제 그랬냐는 듯 활짝 웃었다.

"이제부터 아는 사이가 될 거야!”

하지만 밝은 어린아이에게는 그다지 타격이 없었다.

어느새 나온 과일 꼬치들을 받아 아이들이 분수대 근처를 가리키며 말했다.

“우리 저기서 술래잡기할 건데.

너희도 같이 놀자!”

"으음, 그래. 우리도 가서 놀자."

“뭐?”

“우리끼리 놀아도 충분하잖아.”

그 말에 라그나르랑 시몬이 입술을 삐죽 내밀면서 고개를 휙휙 저었다.

누가 봐도 싫은 티를 내고 있었다.

그리고 아이들은 뒤에서 두근두근하는 마음을 다잡으며 기다리고 있었다.

“너희 술래잡기 좋아하잖아.”

“그래도….”

“그거랑 이건 다른데.”

라그나르와 시몬이 아쉬워하는 것도 이해가 갔다.

무리에 갑작스럽게 새로운 사람이 생기면 어색하기 마련이니까.

하지만 활기찬 마을의 아이들을 보니 함께 어울리다 보면 둘의 사교성도 올라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셋이서 노는 것은 평소에도 충분히 할 수 있으니 말이다.

“그리고 나도 다 같이 술래잡기하고 싶어.”

내가 이런 말을 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지 두 사람이 눈을 크게 떴다.

“뛰지는 못하니까 누가 나를 업어 줘야 가능하겠지만. 그래도 싫다면 다음에 우리끼리 하자."

“내가 업어 줄게.”

"무슨 소리야. 내가 더 키가 크니까 내가 업는 게 낫지.”

시몬이 키를 언급하며 등을 내주었다.

그러자 라그나르가 발로 시몬을 밀었다.

“라라!”

아무리 그래도 황족인데!

시몬이 가볍게 바닥으로 넘어졌고, 그 자리를 라라가 차지했다.

“쟤보다 내가 더 강해. 달리기도 내가 더 잘해.”

“더 강한 걸 알면 그러면 안 되지!”

“다프네, 그 말이 더 상처인 것 같아.”

시몬이 창피하다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자. 얼른 일어나. 모두 보잖아.”

“보면 어때. 내가 누구인지도 모를 텐데.”

그거야 그러겠지만, 말은 그렇게 해도 시몬은 손을 잡고 벌떡 일어났다.

옷에 묻은 먼지도 탈탈 털어 내고서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말이다.

“할 거지?”

"내가 잘 못 뛰어서 그런데. 업혀서 해도 돼?”

“물론이지!”

실은 언제나 이렇게 친구들이랑 다 같이 모여서 놀아 보고 싶었다.

보육원에서는 불가능했으니까.

곧이어 술래잡기가 시작되었다.

뛰어다니는 모두가 꺄르르 웃음을 터트리고 그 어느 때보다 즐거워 보여서일까.

시끄럽다고 야단치는 어른도 없었고, 다그치는 사람도 없었다.

악셀리우스도 가까운 곳에 앉아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고, 가면은 우리를 가려 주었다.

어느 것 하나 신경 쓰지 않고 그렇게 한참을 뛰어놀았을까.

싫다고 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라그나르와 시몬도 웃으면서 뛰어다니고 있었다.

잠시 쉬는 시간을 갖자며 숨을 고르던 때 메리가 어두운 골목을 쳐다보면서 말했다.

"아. 쟤네도 내려왔나 봐."

“응?”

우리의 시선도 그곳으로 향했다.

어두운 골목 끝자락에는 가면은 커녕 낡은 옷을 입고 있는 아이들이 서 있는 게 보였다.

"저기 위에 보육원 애들이야."

"..… 보육원?"

오래간만에 듣는 이야기에 저절로 눈길이 갔다.

알아보면 어떻게 하지?

아니야, 난 가면을 쓰고 있잖아.

보육원에서의 미움 받는 불쌍한 다프네가 아니라 행복한 다프네.

베네디토가 되어 있는걸.

괴롭힘을 당했던 기억에 질 수 없어 시선을 피하지 않고 고개를 꼿꼿이 세워 들었다.

다시 보니 익숙한 얼굴들이었다.

나를 비웃고, 괴롭히던 애들.

언제나 저 아이들을 피해서 어두운 곳에 숨어 있고는 했었는데.

고작 1년도 안 된 시간에 밝은 곳에 서 있는 것은 나.

어두운 곳에 서서 몸을 감추는 것은 저 아이들로 바뀌어 있었다.

그 아이들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데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같이 놀고 싶은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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