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녀의 딸로 태어났다-55화 (164/185)

제55화.

“난 좀 싫은데에.”

한 아이가 싫은 기색을 가득 담아 크게 말했다.

이렇게 악의를 담지 않은 말도 저 애들에게는 상처가 되겠지.

만약 내가 평범한 어린애였다면 안타깝게 여기고서 도와줬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난 그러지 않을 거다.

날 괴롭히던 아이들과 놀 만큼 아직 상처가 치료되지는 않았는 걸.

동정심 따위는 들지 않아.

그런 감정 갖지도 않을 거야.

“됐어. 우리끼리 놀자."

이 말을 해 줄 사람이 필요했는지 애들이 활짝 웃었다.

“그럴까?”

“좋아!”

시몬의 시선이 내게 향했다.

"왜 그래?”

“아니야. 그냥….”

시몬이 골목 쪽으로 한 번 시선을 두더니 볼을 긁적였다.

“너라면 같이 놀자고 할 줄 알았거든.”

“먼저 놀자고 다가온 것도 아니.

고, 꼭 같이 놀 필요는 없잖아.”

“그건 그렇지.”

시몬의 말이 끝나자 기다렸다는듯이 라그나르가 입을 열었다.

"난 모두랑 안 놀고 다프네랑만 노는 것도 좋은데.”

"어이, 나는?”

라그나르가 떨떠름한 반응을 보이자 시몬이 욱하는 목소리로 외쳤다.

"나도 다프네랑만 노는 게 좋거든!”

두 사람은 갑자기 어린애들처럼 자신이 나를 더 좋아한다며 싸우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실시간으로 보며 에휴한숨을 내쉬었다.

‘…어린애들도 아니고 매일 이렇게 싸우는 게 지겹지도 않나. 대단하다니까.'

웃으며 둘을 말리던 그때 뒤에서 활기찬 목소리가 들렸다.

"안녕, 우리 같이 놀지 않을래!”

권유가 아닌 확신에 찬 어조, 해맑은 목소리.

우리 모두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는 그런 매력을 가진 목소리였다.

목소리가 들린 곳에는 귀여운 토끼 가면을 쓴 여자애가 손을 흔들고 있었다.

양 갈래로 곱게 땋아 내린 검은색 머리카락과 대비되는 하얀색 토끼 가면.

그 아래로 보이는 옷은 꽤 고급스러운 소재여서 보통 마을의 아이는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다.

“응? 응? 나 새로운 친구를 사귀고, 다 같이 놀고 싶어서 오늘만을 기다렸어!”

그 목소리는 맑고 청아해서 어쩐지 거절하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럼 그럴까?"

아니나 다를까 주변에 있던 아이 중 한 명이 흘깃흘깃 시선을 던지며 말한다.

보육원 아이들도 아니고, 조금 잘 사는 집안의 평범한 여자애인 것 같으니까 거리낄 것이 없겠지.

'그런데 왜 이렇게 꺼림칙한 기분이 드는 걸까.'

“앗, 역시 자기소개부터 해야 하는 걸까? 내 이름은 마리아야! 다들 편하게 마리아라고 불러 줘!”

“어어….”

토끼 가면의 아이가 적극적으로 자기소개까지 하니 아이들은 서로 자기소개를 하며 꺄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마리아? 분명 어디선가….’

“있지, 우리 숨바꼭질하지 않을래? 나 해 보고 싶었는데!”

이런 사람 많은 축제에서 숨바꼭질이라니.

“숨바꼭질은 좀 그래.”

"아, 그런가…. 여럿이서 해 보고 싶었는데….”

내 대답에 언제 활기찼냐는 듯 마리아가 침울해진 목소리로 답했다.

“조금만 해도 안 되는 걸까? 나 정말 하고 싶은걸."

아이들이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안 되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들어줘야 할 것 같은 기분에 다들어쩔 줄을 몰라 하는 것 같았다.

왜 저 목소리를 들으니 숨바꼭질을 꼭 해 줘야 할 것 같지?

마치 해 주지 않으면 죄책감이 생길 것 같았다.

"그리고 숨바꼭질은 다른 사람 도움 없어도 재미있게 놀 수 있을 텐데. 뛰는 데 방해도 안 될 테고.”

아쉬움이 가득한 목소리와 함께 그녀의 시선이 내게로 향했다.

가면에 가려져서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저 말은 나를 가리키는 말이겠지.

뚫어지게 쳐다보는 시선이 부담스러운 정도를 넘어가고 있을 때.

"야.”

"으, 응? 나?"

조용히 있던 라그나르가 입을 열었다.

“기분 나쁘게 왜 그렇게 쳐다봐.

업힌 채 술래잡기하면 뭐 어때서.”

평소의 장난기 많은 목소리가 아닌 사나운 목소리에 나까지 움찔할 정도였다.

"아, 아니. 난 그냥 업고 있는 네가 힘들어 보여서…. 업고 뛰어다니면 힘들잖아.”

“하나도 안 힘들어.”

“그, 그러니까 숨바꼭질을 하면 숨어만 있으면 되니까! 업지 않아도 괜찮지 않을까 싶어서 그런 건데….”

끝말을 흐리는 것에 라그나르가 어이없는 목소리로 답했다.

“네가 무슨 상관이야. 애초에 다 프네는 방해가 되지 않는다고.”

“그런 식으로 말한 게 아닌데.

왜 그렇게 화를 내는 거야?”

“우린 잘 놀고 있었는데 갑자기 나타난 네가 방해니 뭐니 하는데 기분 나쁜 게 당연하잖아.”

날카롭게 쏘아지는 목소리에 당황했는지 마리아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횡설수설 답하기 시작했다.

"나, 나는 그냥 다 같이 놀고 싶어서 그래서….”

마리아가 손을 휘저으면서 설명을 하려고 했지만, 라그나르는 듣기도 싫은지 고개를 휙 돌렸다.

어디를 보아도 불쾌함이 가득한 반응에 아이들은 조용히 서로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어린아이의 호기심으로 던진 질문일 수도 있겠지.

하지만 라그나르는 내 편이니까 저 무례함을 참지 못한 것이다.

'그래도 이런 분위기로 놀 수는 없으니까.'

나는 라그나르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라라. 난 괜찮아.”

“하지만 쟤가 기분 나쁘게 계속…!”

라그나르는 욱하고 소리를 지를 뻔 했지만 내가 그 입에 사탕을 물려 주는 게 빨랐다.

우물우물 사탕을 물고 있는 표정에 못마땅함이 가득했다.

하지만 축제 한복판에서 애를 울릴 수도 없잖아.

나를 위해서 나서 준 것은 고마우니까 여기선 내가 나서야겠지.

"내가 숨바꼭질이 안 된다 했던 이유는 여기에 사람이 너무 많아서야.”

“어, 어?"

“사람이 너무 많은데 이리저리 흩어지면 사고가 일어나기 쉬우니까.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서 한곳에서만 놀고 있는 거라고.”

그 말에 주변에 있는 아이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놀러 나올 때 부모님께 주의 받은 말을 떠올리는 거겠지.

“그, 그렇구나. 나와서 노는 건 처음이라 몰랐어."

당황 섞인 목소리에는 악의는 없었다.

“내가 미안해!”

"아냐.”

마리아는 두 손을 꼭 잡은 채 화사하게 웃었다.

그 웃음에 딱딱한 분위기가 파스스 부서졌다.

다른 아이들도 쉴 만큼 쉬었는지 다시 놀자고 하는 그 순간.

갑자기 누군가가 내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고개를 돌려보니 시몬이 입가를 어색하게 일그러트리고서는 손으로 악셀리우스가 있는 쪽을 가리켰다.

'돌아가자는 뜻인가?'

“이만 가자는 거야?”

시몬의 행동이 답답했는지 라그나르가 목소리를 높였다.

그와 동시에 마리아의 목소리가 가까이에서 들렸다.

“있지! 이번에는 내가 술래할게.

응? 어때, 어때?”

'얘 조금 전까지 침울해하지 않았나?' 높은 텐션을 따라가기가 어려울 정도잖아.

내가 달갑지 않아 한다는 것을 알았는지 라그나르가 나와서 그녀를 막았다.

그 행동이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마리아가 고개를 갸웃하는 모습은 참 자연스러웠다.

"응? 우리 얼른 놀자!"

“우리는 이제 갈 거야.”

시몬의 속뜻을 이해했는지 라그나르가 나서서 의견을 전달했다.

그 말에 뒤에 있는 아이들의 입에서 아쉬운 탄식이 흘러나왔다.

"에. 가는 거야? 조금 더 놀자!”

친구와 놀고 싶은 마음이 여기까지 전달되어서 아쉽기는 하지만.

“호, 혹시 나 때문이야?”

마리아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내 옷깃을 붙잡았다.

앙증맞은 손이 참 고왔다.

손톱까지 깔끔하게 정리된 것을 보니 확실히 보통 집안 자제는 아닌 것 같았다.

그러니 그렇게 눈치 없는 말도 쉽게 할 수 있었던 걸까?

'마리아가 나타나고부터 시몬이 조용해졌지.’

시몬이 다급하게 고개를 젓는 것을 보니 내 생각이 어느 정도 들어맞은 모양이었다.

'어쩐지 마리아의 이름이 낯설지 않더라니.’

누군지 짐작이 갔다.

그것도 잠시 어서 이 자리를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황태자라는 것도 잊을 정도로 신나게 뛰어놀았으니까.

정체가 들통나면 채신없다고 혼날지도 몰라.

그렇게 생각을 마친 나는 아이들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미안. 엄마가 기다려서."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만, 다음에도 같이 놀 수 있는 거지?"

"아마도….”

확실하지도 않은 약속을 함부로 할 수 없으니 말을 흐리자 아이들은 그것만으로도 족한지 웃어 보였다.

“앗. 다음에는 나랑도 같이 놀자!"

토끼 가면 여자애, 아니 마리아가 인사하는 사이에 불쑥 끼어들었다.

'인사 중인데….'

가면을 써서 다행이다.

가면이 없었다면 아마 내가 인상을 찌푸리는 것을 보고 다시 분위기가 이상해졌을지도 모른다.

“그럼, 안녕.”

짤막한 인사를 끝으로 나는 라그나르의 등에 업힌 채 시몬과 함께 악셀리우스에게로 돌아갔다.

“읏차.”

안 그래도 우리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는지 악셀리우스가 나를 번쩍 안아 들었다.

"내가 업고 있었는데."

“이제는 아빠한테 양보해 줄 시간이야.”

“아저씨는 우리 아빠 아닌데.”

“아빠 입후보자인데 줄여서 아빠라고 하는 건 어때?"

능글맞게 웃으며 던지는 말에 모른 척 시선을 돌렸다.

“엄마한테 갈래요."

“아직 엄마를 이기는 건 어려운 걸까.”

악셀리우스는 우는 목소리를 내면서 서운한 티를 냈지만.

“입꼬리는 웃고 있는데."

“이런. 들켰군.”

뻔히 보이는 장난질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악셀리우스의 장난에 라그나르도 그게 뭐냐 웃었고, 시몬도 조용히 미소를 짓고 있었다.

마차를 타고서야 시몬이 안도의 목소리를 내는 것을 보며 슬쩍 질문을 던졌다.

“아까 그 여자애 아는 사이야?”

“으음.”

시몬은 말하기를 망설이다가 마차 문이 닫힌 것을 확인한 뒤 작게 속삭였다.

“아마도 내 미래의 약혼자…?"

* * *

마리아는 멀어진 세 사람을 보면서 아쉬운 표정을 삼켰다.

"다 같이 놀고 싶었는데.”

셋이 빠지니 어쩐지 허전했다.

마리아는 토끼 가면을 만지작거렸다.

'엄마가 하고 싶은 놀이를 맘껏하고 오라고 했는데. 분명 다들 좋아해 줄 거라고.'

어떤 무리에서든지 자신이 중심이 될 것이고, 모두 의견을 따라 줄 것이라는 그런 말.

'모두 다 마리아를 좋아해 준다 했는데.’

하지만 그 이야기와 다르게 그 세 명은 자신을 별로 좋아하는 것 같지 않았다.

혹시 자신을 싫어하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마리아는 이내 거세게 고개를 저었다.

'아냐, 엄마 말은 틀린 적이 없었는걸!’

마리아는 고개를 저으며 생각을 정리했다.

그러다가 골목길 한구석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아이들을 발견했다.

“있지! 거기 너희도 같이 놀래?"

갑작스러운 마리아의 말에 숨어서 구경만 하던 보육원 아이들이 당황했다.

그것은 함께 놀기로 한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다.

“그건 좀 그렇지 않을까."

“보육원 아이들인데….”

하지만 마리아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래도 난 다 같이 놀고 싶은 걸! 쟤들도 다 같이 놀면 안 될까?”

마리아의 말에 아이들은 눈치를 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마리아가 그렇게까지 말한다면야 뭐….”

“싫지만 마리아가 말한다면 어쩔 수 없지."

그 말에 마리아는 활짝 웃었다.

역시나 그녀의 엄마가 말한 대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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