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녀의 딸로 태어났다-56화 (55/185)

제56화.

약혼녀가 될 수도 있는 사람.

이 제국에서 그런 사람은 단 한 명뿐이다.

'…마리아. 설마 이렇게 마주치게 될 줄은 몰랐는데.'

행복에 젖어서 잠시 잊고 있었던 원작의 내용이 스멀스멀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변화한 미래에 대한 의문점도 함께 따라왔다.

'라그나르가 내 옆에 있으니 시몬은 그 아이와 짝이 되는 걸까?'

만약에 시몬이 내 배다른 동생인 마리아와 결혼까지 하게 된다면.

'내가 어찌할 수 없는 부분이기는 하지만, 그들과 이렇게 얽히는 것도 싫은걸.’

욕심 많은 내 바람일까.

마리아는 분명히 티 없이 맑은 아이로 자라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런 매력에 사람들이 이끌렸고, 모두의 사랑을 받았겠지.

심지어 원작의 시몬도 사랑을 품고 있는 애증의 눈으로 마리아를 바라보았으니까.

시몬의 자격지심이 사라진 지금이야말로 그녀에게 완벽한 사랑을 느낄지도 모른다.

'…그런데 라그나르도 그러면 어떻게 하지.’

조금 전은 가면을 써서 서로 못알아본 걸 수도 있다.

사실 원작에서도 둘은 처음엔 사이가 좋지 않았으니까.

'불안하다.'

무릎 위에 올려놓은 손에 힘이 들어가 옷자락이 구겨지는 것이 보였다.

마치 원작을 비틀고 싶어 한 내 못된 마음이 구겨져 가는 것을 보여 주듯, 보기 싫은 모습이었다.

그때 갑자기 튀어나온 손이 내 손을 덮었다.

"괜찮아, 다프네?”

“응?”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올리니 라그나르가 나를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라그나르는 힘이 들어간 내 손을 부드럽게 움켜쥐고서는 반대 손으로는 구겨진 옷자락을 펴 주었다.

"혹시 어디 아파?"

“아니, 그건 아니야.”

멍하니 있다가 주변을 둘러보니 걱정스러운 눈빛을 한 것은 라그나르뿐만이 아니었다.

악셀리우스도 시몬도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쩐지 나 때문에 분위기가 이상해진 것 같았다.

"그냥. 별건 아니고..."

답지 않게 말이 흐려지자 시몬도 나서서 물었다.

“혹시 아까 그 여자애 때문에 그래?”

역시 시몬은 눈치가 빠르다.

내가 기분이 나쁜 것을 보고 바로 눈치챈 것이 감탄스러울 정도지만 반갑지는 않았다.

이런 속마음을 들키고 싶지 않은 걸, 들켜서 미움받게 될지도 모르잖아.

계속 괜찮다 여겼던 마음이 순식간에 금이 가 부서질 것 같았다.

나는 애써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냐. 그냥 피곤해서 그래.”

“…정말?”

"응, 정말.”

시몬이 재차 물었지만 내 대답은 바뀌지 않았다.

"네 약혼녀가 나랑 무슨 상관이야. 난 정말 괜찮대도.”

'…그래.' 시몬이 불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린다.

더는 묻지 않겠다는 그 반응이 고마웠다.

이렇게 나를 생각해 주는 친구인데 불안해 할 필요가 뭐가 있어.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마지막으로 악셀리우스에게까지 괜찮다고 하고 나서야 걱정이 가득한 마차의 분위기는 바뀌었다.

그리고 마차는 목적지를 향해 열심히 달린 결과, 베네디토 상단 본점에 멈춰 섰다.

“우와, 크다.”

“괜히 베네디토가 아니구나.”

라그나르의 입에서 감탄사가 나올 만도 했다.

심지어 시몬까지 놀라는 것을 보니 확실히 다른 상단과는 다른가 보다.

'그때는 너무 급해서 제대로 보지도 못하고 지나쳤는데.'

어쩐지 들어가는 게 긴장이 될 정도였다.

거리의 다른 건물들과는 확연히 차이가 나 더 굉장해 보이는 걸지도 모르지만,

"여기가 엄마가 일하는 곳…."

“긴장되니?”

"조금요."

오늘의 마지막 일정.

엄마가 일하는 곳 구경하기.

마음 같아서는 진작 놀러 와 보고 싶었다.

하지만 혹시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까 봐 무서워서 못 왔었던 곳이기도 했다.

악셀리우스가 커다란 문을 열었고, 나는 라그나르와 시몬의 손을 꼭 잡고서 안으로 들어갔다.

들어가자마자 바쁘게 뛰어다니는 사람들이 보였다.

“1번가 쪽에서 식자재 요청이 들어왔어요! 여유분 확인 좀 해 주세요!”

"혹시 가면 재고 남아 있는 것 있어요? 생각보다 더 잘 팔린다고 자꾸 연락이 오는데요!”

"다른 상단에서 재고 확인 좀 부탁하는데 담당자 어디 갔어!"

이리저리 뛰어다니면서 서로 목소리를 높이며 바쁘게 일하는 사람들.

여기를 보아도 바쁘고 저기를 보아도 바빠 보이는 사람들 틈에 들어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들어가도 되는 것 맞아요?"

이런 물음이 나올 수밖에 없을 정도였다.

"아무래도 축제 당일이어서 평소보다 조금 더 바쁜 것 같은데. 이봐, 미안한데 살바토르가 어디 있는지 아나?”

"살바토르 씨요? 어라 대공님, 언제 오셨어요?”

낯선 이름이 등장했다.

'살바토르는 누구지? 윈스턴이 안내해주는 게 아니었나?'

다른 가족들에게 들어 본 적 없는 이름이라 알쏭달쏭한 표정으로 그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조금 전에. 이야, 그런데 진짜 바쁘네.”

“말도 못 해요, 진짜. 잠시만 기다려 보세요. 살바토르 씨 여기요!!!”

넓은 공간에 낯선 이름이 퍼졌고, 곧이어 그 이름의 주인이 등장했다.

“무슨 일이야?”

서글서글한 웃음과 함께 사람 좋아 보이는 인상을 가진 남자가 등장했다.

아마도 엄마의 동년배로 보이는 저 사람이 살바토르인 듯했다.

"오. 간만이군요, 대공님!"

반가운 인사에 악셀리우스도 환히 웃으며 손을 건넸다.

두 사람이 악수하고 나서야 살바로트의 시선이 우리에게로 향했다.

“앗. 설마. 이쪽이 소문의 그 막 내딸?”

"…안녕하세요.”

어쩐지 인사를 해야 할 것 같아서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자 그가 헤벌쭉한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높이높이 놀이를 하는 듯 날 위로 번쩍 안아 올렸다.

"이야. 네가 다프네구나!"

“다프네?”

“다프네라고 하셨어요?”

갑작스럽게 들려져서 깜짝 놀라 움찔거렸는데 이제는 주변의 흥미로운 시선까지 더해졌다.

그 시선에 저절로 긴장감에 몸이 빳빳하게 굳어졌다.

"와, 상단주님이 애지중지한다는 그 소문의 막내딸!"

"아프면 일도 제쳐 두고 바로 달려간다는 그 막내딸?”

"내가 봤어. 진짜래도!”

“도련님들도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자랑하고 다니는 그 막내딸!”

바쁜 것을 모두 머릿속에서 지워버리기라도 했는지 반짝거리는 시선이 모였다.

그 시선은 부담스러워 어디론가 숨어 버리고 싶을 정도였다.

“이봐. 살바토르, 다프네가 놀랐잖아.”

“아, 이런. 미안하구나. 말로만 듣다가 실제로 보니 너무 반가워서 말이야.”

“낯선 사람은 경계한단 말이지.

자, 이리로 오렴, 다프네.”

악셀리우스가 팔을 벌린 것을 보고 얼른 안아서 데려가 달라고 손을 뻗었는데 주변에서 감탄사가 쏟아져 나왔다.

"어쩜, 손이 쪼끄매."

“달랑거리는 발도 앙증맞아. 진짜 귀엽다.”

“살바토르 씨, 어서 보내 줘요.

무서워서 울면 어떻게 해요!”

직원들의 야유에 살바토르가 슬픈 표정으로 악셀리우스에게 나를 넘겨주었다.

그에게 안긴 채 숨듯이 고개를 파묻으니 뒤에서 장난스러운 목소리가 한 사람을 몰아갔다.

"무서웠나 봐. 살바토르 씨가 잘못했다.”

"와, 솔직히 사과해야 한다.”

“무서운 얼굴 가까이 하니까 겁먹죠! 잘못했다, 진짜!”

이어지는 야유에 살바토르가 욱하며 억울한 목소리를 내었다.

"아니, 내 얼굴이 무서운 편은 아니지 않나?”

"애한테 낯선 사람은 다 무서운 거지.”

악셀리우스가 어깨를 으쓱이며 답하자 직원들이 맞다며 모두 아우성쳤다.

그 기세에 살바토르는 이기지 못하고 내게 사과를 건넬 정도였다.

“미안하다. 다프네. 갑자기... 무서운 얼굴 들이대서 놀랐지?"

“으음….”

솔직히 살바토르의 얼굴보다 악셀리우스의 얼굴이 무서운 쪽에 더 가까운데.

바쁜 사람들이 약속이라도 했다는 듯 멈춰 서서 똑같은 시선으로 바라보니 조금 무서웠달까.

그가 시무룩한 얼굴을 짓는 것이 어쩐지 마음에 걸려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그의 옷자락을 부여잡았다.

“그냥 조금 놀라서 그랬어요.”

“응?”

"아저씨 안 무서워요."

“그, 그래?”

안 무섭다는 말이 뭐가 좋다고 저렇게 헤벌쭉하게 웃을 수 있지?

왜 뒤에 있는 직원들도 같은 표정인 걸까.

'가면에 가려져서 내 얼굴도 제대로 안 보일 텐데.'

팔불출 같은 모습이 이상했다.

"아니, 클로에가 얼마나 네 이야기를 하든지. 보지 않아도 친밀감이 쌓여 버렸지 뭐야.”

“엄마가 제 이야기를 해요?"

“그럼! 처음에는 혼잣말이더니 이제는 다 들으라는 듯이 이야기하고 다니던걸.”

엄마가?

우리 엄마가 그럴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믿지 않는다고 생각했는지 뒤에서 다른 직원의 증언이 터져 나왔다.

“지난번에 딸이 배운지 얼마 안됐는데 글자를 뗐다고 천재 같다며 다 들으라는 듯이 이야기했지?"

“선물로 준 꽃은 보존 마법으로 아직도 책상 위 화병 속에 있어.”

"역시 오빠들보다는 엄마가 제일이지 않냐며 뽀뽀 받으신 것도 자랑했지.”

저렇게 구체적인 증언을 들었으니 믿지 않을 수가 없었다.

너도 들었냐면서 서로 꺄르르 웃는 사람들을 보며 어쩐지 창피해져 다시 얼굴을 감췄다.

“그럼 어느 쪽이 라그나르일까?”

내가 얼굴을 숨기자 이번에는 표적이 바뀌었다.

"믿음직하고 멋진 꼬마 도련님도 항상 같이 있다고 들었는데.”

살바토르가 라그나르와 시몬을 번갈아 보더니 턱을 감싸며 고민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미 알면서 그러는 거 같은데.'

살바토르의 시선은 이미 라그나 르를 힐긋거리고 있었다.

어지간히 연기를 못하는 사람이구나 싶었다.

그런 생각은 나만 하는지 라그나 르랑 시몬은 어쩐지 긴장하는 표정이었다.

"여기 은색 머리 소년일까? 아니면 검은색 머리 소년일까?”

시몬과 라그나르가 자신들이 언급될 때마다 흠칫흠칫 놀란다.

뒤의 직원들도 웃음을 참는 것이 역시 알고 있는 모양이다.

“이쪽이구나!”

곧이어 라그나르가 환히 웃는 것을 보며 다시 한번 훈훈한 미소가 가득하였다.

"내 얘기도 했구나."

어째 라그나르가 감동한 것을 보니 분위기를 깨기는 뭐하지만.

'엄마….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고 다니시는 거예요.'

내가 에휴 하고 한숨을 내쉼과 동시에 살바토르가 웃으며 우리의 시선을 주목시켰다.

"그럼 상단주가 있는 곳으로 가자고, 기다리고 있으니까."

이렇게 바쁜데 엄마는 여기에 없다는 건가?

어쩐지 아쉽기는 했지만 진작에 정해진 일정이었는지 악셀리우스가 시몬의 손을 잡았다.

아쉽다며 인사를 하는 직원들에게 손을 흔들어 주자 또다시 귀엽다고 소리 지르는 모습은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살바토르도 라그나르의 손을 잡았고 모두의 배웅 속에 우리는 그렇게 다 함께 나서서 마차에 올라 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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