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7화.
도착한 곳은 높은 곳에 있는 들판이었다.
“황성이 가깝네.”
시몬의 말에 우리는 옹기종기 마차 창밖을 바라보았다.
황금빛 들판 뒤 보이는 것은 커다란 나무 하나, 그리고 반대쪽에는 커다랗고 아름다운 황성이 보였다.
"여기가 어디인 줄 알아?"
라그나르의 질문에 시몬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여긴 대공의 사유지야.”
"아저씨?”
시몬의 답에 우리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악셀리우스에게로 향했다.
우리의 시선이 모이자 악셀리우스는 가 보면 안다면서 마차의 문을 열었다.
악셀리우스가 나가자 기다렸다는듯이 라그나르와 시몬이 뛰쳐나갔다.
그러자 열린 문 너머로 살랑이는 시원한 가을바람이 불어왔다.
바람과 함께 들판의 밀밭이 황금빛 물결과 같이 흔들리는 게 보였다.
'예쁘다.'
그 아름다운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자니 내 앞으로 손 두 개가 나타났다.
“자, 내 손 잡고 내릴래?"
“아니야, 내 손 잡아, 다프네.”
시몬과 라그나르가 동시에 손을 내밀었다.
"오, 둘 다 신사답네.”
악셀리우스와 살바토르가 흥미진진한 얼굴로 우리를 지켜보기 시작했다.
"다프네는 누구를 선택할 거야?
역시 시몬이지?”
“라그나르지 않을까."
손을 내민 것은 시몬이랑 라그나 르인데 왜 본인이 아닌 아저씨 둘이서 투덕거리는 걸까.
“둘 다 고마워.”
나는 오른손으로는 라그나르를, 왼손으로는 시몬의 손을 잡고 내렸다.
아저씨들이 아쉬운 눈빛들을 보냈지만, 우리는 신경 쓰지 않고 우리끼리 손을 잡고서 천천히 들판을 걸어갔다.
아마도 우리가 가려는 곳은 저 커다란 나무 쪽인 것 같았다.
그렇게 천천히 걷는데 가까워질수록 익숙한 인물이 보였다.
“…엄마!"
반가운 얼굴에 나도 모르게 두 사람의 손을 놓고 엄마에게 팔을 뻗었다.
내가 뛰지 못하니 엄마가 가볍게 달려와 나를 끌어안아 주었다.
“즐거운 시간 보냈니?"
“네. 거리에서 친구들도 사귀고, 다 같이 술래잡기도 했어요. 가면도 다들 예쁘다고 해 줬는걸.”
그랬냐며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손길이 너무 따스했다.
“엄마가 일하는 데도 구경하고 싶었는데 엄마가 없었어요.”
"다음에 꼭 구경시켜 줄게.”
"네."
가볍게 뺨을 꼬집히는 것이 간지러워 꺄르르 웃자 엄마도 나를 따라 빙긋 웃었다.
“그런데 여기에 왜 왔어요?"
“오늘 여기서 아주 중요한 일을 해야 하거든.”
"중요한 일?”
"이 나무 아래 엄마의 추억이 묻혀 있거든. 오늘은 추억을 꺼낼 시간이고.”
“추억?"
엄마의 말에 우리 모두의 시선이 나무로 향했다.
확실히 이렇게 넓은 곳에 나무가한 그루만 있는 것도 이상하기는한데.
혹시 이 아래에서 옛날이야기라도 해 주시려는 걸까?
“소풍?”
“소풍 가고 싶어?"
커다란 나무, 선선한 날씨, 조용하고 탁 트인 넓은 장소, 아름다운 광경과 좋은 사람들.
이 정도의 조합이면 소풍이지 않을까 했는데 아닌가 보다.
고개를 잘게 젓자 엄마는 쪽 하고 뺨에 가볍게 입을 맞춰 주었다.
“옛날이야기?”
“아니면 진짜 여기에 뭐가 있나?”
라그나르와 시몬도 알쏭달쏭한 표정을 지으며 어른들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장난기 많은 어른은 쉽게 알려 줄 생각이 없는 듯했다.
그들은 턱을 감싸며 모른 척 시선을 돌려 버렸다.
라그나르와 시몬이 얼른 알려 달라고 보채는 것을 즐기는 게 틀림없다.
“유치해.”
“쟤들은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더 유치해지는 것 같아.”
엄마가 손가락을 가볍게 튕기자 연기를 타고 무언가가 슬금슬금 다가오기 시작했다.
“모종삽?"
시몬의 궁금증 가득한 목소리에 엄마는 맞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10년 전 가면 축제가 열린 날, 이곳에 추억을 묻어 두었거든. 내 추억뿐만이 아니라 악셀리우스와 살바토르의 추억도 함께.”
어쩐지 살바토르도 함께 따라오는 이유가 무엇인가 했었는데.
아, 혹시 이건 타임캡슐 같은 걸까?
'10년 전 엄마의 추억….'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소중히 여기던 것을 이곳에 묻어 두었다.
그런 소중한 것을 우리에게 보여 주려고 이곳으로 데려온 거구나.
“함께 봐도 되는 거예요?"
누가 보면 별것 아니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기쁨이 차올라서인지 상기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물론.”
악셀리우스는 별것을 다 물어본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살바토르는 모종삽을 들고서 어느 한 지점을 파내기 시작했다.
'그런데 살바토르 아저씨보다는 악셀리우스 아저씨가 힘이 더 좋아 보이는데….’
악셀리우스는 틈틈이 생기는 기회를 놓치지 않는지 어느새 엄마의 옆에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나는 고개를 돌려 악셀리우스를 빤히 바라보았고, 악셀리우스도시선을 느꼈는지 나를 돌아보았다.
"응? 다프네 왜 그래? 아저씨한테 할 말 있어?”
“…으음.”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젓자 그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왜인지 당황하며 손을 휘적휘적 흔들면서 이유를 묻는데 더 말해 주기 싫어졌다.
“그럼 언제 말해 줄 수 있을까?"
"으음, 꿈속에서?"
"응? 왜 하필 꿈속이야?"
엉뚱한 대답이라 생각했는지 악셀리우스가 묘한 표정을 지었다.
이 정도는 말해 줄까…?
“꿈속에서 얘기해 주면….”
“해 주면…?"
“잊어버릴 수 있으니까?"
“…혹시 아저씨가 상처받을 만한 말이었어?”
살아온 시간이 헛된 것은 아닌지 눈치가 빠르다.
바로 울상을 지으려는 것이 보여서 휙 엄마 품속으로 고개를 숨겼다.
"아가, 엄마한테는 얘기해 줘도 되지 않아?”
"응, 엄마한테만."
엄마의 말에 악셀리우스의 눈치를 한 번 보고서는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대공 아저씨보다 살바토르 아저씨가 힘이 더 센 거지?”
“왜 그렇게 생각했어?"
“대공 아저씨가 더 큰데도 살바토르 아저씨가 땅을 파니까. 땅파는 것은 힘든 일이고.”
내 말이 끝나자 엄마가 입가를 일그러트렸다.
혹시 내가 무슨 실수를 한 걸까?
눈을 깜빡이며 엄마를 빤히 바라보는데 엄마가 참고 있던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다가 나를 따라 하듯 내 것 가에 작게 소곤소곤 속삭여 주었다.
"이런 것을 덩칫값 못한다고 하는 거란다.”
“…좋은 말 아닌 것 같은데."
내 중얼거림에 엄마가 푸스스 웃으며 검지를 입가에 가져다 댔다.
우리 둘만의 비밀이라는 거지.
“응.”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이자 악셀리우스의 원성이 들려왔다.
하지만 엄마에 의해 한순간에 저지가 되었다.
"아, 나왔다.”
그리고 잠시 후 살바토르가 드디어 무언가를 찾아냈다.
꽤 깊숙이 묻혀 있었는지 고급스러운 상자 위에 흙이 잔뜩 쌓여 있는 게 보였다.
“저게 뭐야?”
라그나르와 시몬이 무엇인지 감도 안 잡힌다는 표정으로 함께 고개를 갸웃했다.
"타임캡슐, 미래의 나에게 주려고 묻은 소중한 추억의 조각이지."
드디어 타임캡슐이 등장하자 엄마가 나를 조심스럽게 내려 주었다.
어느새 살바토르가 흙을 모두 털어 내었다.
그러자 낡았지만 아직 나름 근사한 외양의 상자가 드러났다.
우리는 모두 상자를 둘러싸고 앉았다.
“자물쇠가 걸려 있는데?"
"다른 사람이 못 보게 해 놨지.
우리도 서로가 무얼 넣었는지 모른단다. 재미있겠지?"
그 말에 라그나르와 시몬의 눈에 호기심이 피어올랐다.
분위기가 고조된 상태에서 엄마는 품속에서 작은 열쇠를 꺼내 들었다.
상자에 달린 작은 자물쇠는 짝을 만났다는 듯 경쾌한 소리를 내며 잠금을 풀어 주었다.
"마법 덕분인가. 멀쩡하네.”
내용물이 나타났다.
화려한 안대, 평범한 단검, 그리고 가느다란 실 팔찌 하나가 그 안에 들어 있었다.
"안대는 누구 거에요?"
“안대는 내 것.”
꽃문양이 그려진 고급스러운 안대는 많이 사용했는지 살짝 바랜느낌이 들었다.
살바토르가 그리운 눈빛으로 안대를 바라보았다.
“그게 왜 소중한 추억이에요?"
“젊었을 때 불면증에 시달렸었거든. 그걸 함께 이겨 내 준 내 소중한 친구지. 다프네를 지켜 주는 침대의 인형들처럼 말이야.”
침대의 인형들이 나를 지켜 준다는 건….
악몽 같은 거로부터 지켜 준다는 걸까?
대충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아 고개를 끄덕였다.
살바토르는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내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어 주었고, 나는 다음 물건을 가리켰다.
"단검은 누구 거예요?"
“그건 내 것.”
엄마가 굉장히 익숙한 손길로 단검을 잡아 들었다.
검집에서 뽑으니 날카롭게 잘 갈린 칼날이 보였다.
"내가 선물해 준 단검이네."
“이 검 덕분에 목숨을 건진 적도 있었지. 네 덕분이야, 악셀.”
“쑥스럽구먼. 설마 그걸 묻었는지는 몰랐는데.”
두 사람의 물건이 확인되었으니 남은 것은 끊어진 실 팔찌 하나였다.
시몬이 실 팔찌를 들고서 악셀리 우스에게 건네주며 물었다.
“얘는 왜 끊어져 있어? 끊어진 팔찌가 대공의 소중한 추억인 거야?”
“이건 소원 팔찌인데, 소중한 사람이 꼭 살아 돌아와야 한다며 선물로 만들어 줬었거든.”
"......."
갑자기 엄마의 말이 뚝 끊겼다.
어쩐지 저 팔찌를 만들어 준 사람이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시몬은 너무 어렸을 때라 잘 모르겠지만, 그때 당시 굉장히 위험한 던전이 생겨서 내가 책임지고 해결하러 가야 했던 일이 있었어.”
“…소중한 사람이 죽지 말라고 만들어 준 거네.”
시몬의 말에 라그나르가 여전히 궁금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럼 왜 끊어졌어?"
“소원 팔찌는 끊어질 때 소원이 이루어져. 덕분에 무사히 살아 돌아왔지.”
악셀리우스가 추억에 가득 잠겨 행복한 미소를 꽃피워 냈다.
엄마도 단검을 보면서 잊고 있던 추억을 떠올리는지 그리움에 잠긴 표정이었다.
살바토르도 마찬가지였다.
어른들이 추억에 담겨 그때의 이야기를 도란도란 피워 내기 시작했다.
그래서 우리는 멀리 떨어지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산책한다는 핑계를 대며 잠시 자리를 비켜 주었다.
"다프네!”
어른들과 조금 떨어진 것을 확인 하자 라그나르와 시몬이 동시에 내 이름을 불렀다.
“둘 다 왜 그래?"
"우리도 하자!"
"맞아, 우리도 해 보자.”
해 보자니?
설마…?
두 사람의 눈은 어른들에게, 정확히 말하자면 그들이 들고 있는 타임캡슐로 향했다.
"타임캡슐! 우리도 해 보자.”
“맞아. 우리도 10년 후에 열어보는 거야! 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