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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딸로 태어났다-58화 (57/185)

제58화.

두 사람이 갑자기 의기투합한 것은 좋지만 너무 갑작스럽지 않을까.

내가 고민하는 기색을 보이자 두 사람이 내 양쪽 팔을 하나씩 잡았다.

"응? 응? 우리도 소중한 추억을 묻어 두자!”

“분명히 10년 후에도 다 같이 있을 테니까! 분명 우리도 저 세사람처럼 즐거울 거야.”

라그나르와 시몬은 흥분에 가득찬 상태로 기대감에 부풀어 올라 있었다.

둘이 이렇게 기대하는데 거절하면 실망하겠지?

“좋아.”

내 입에서 동의의 말이 나오자 두 사람은 동시에 만세 하며 행복한 웃음을 터트렸다.

밝은 웃음소리에 나까지 즐거워져서 함께 웃었다.

어른들이 추억에 잠겨 있는 사이 우리는 우리만의 타임캡슐 작전을 세웠다.

"어른들 몰래 넣자. 대공이 알면 뭐 넣을 거냐고 캐물을 게 분명해.”

시몬의 의견에 라그나르가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그럼 어디에 묻을까? 여기는 분명 들킬 거야.”

라그나르의 말에 우리는 조그만 머리를 맞대어 고민하기 시작했다.

“아. 우리 집에 묻는 것은 어떨까?"

"베네디토가 소유한 숲 일부분을 말하는 거라면….”

나는 턱을 쓰다듬으며 우리 집의 장점을 이야기했다.

"드나드는 사람도 드물고, 리카르다의 마법 때문에 허락되지 않은 자는 들어오지도 못해."

“하지만 너희는 집 앞이니까 괜찮지만 내가 가기 어렵지 않나?"

시몬의 아쉬운 목소리에 고개를 갸웃하며 뭐가 문제냐는 듯 물었다.

“친구 집에 놀러 오는 건데 어려울 게 뭐 있어. 우리 집은 시몬네 집처럼 황성도 아닌걸."

내 말에 시몬이 잠시 멈칫하더니 쑥스러워하며 웃었다.

“그, 그렇네. 그럼 캡슐로 할 상자는 내가 챙겨 갈게.”

시몬이 가져온다면 분명히 좋은 것이겠지.

그럼 우리는 안에 넣을 것만 준비하면 될 것이다.

역시 세 명의 머리를 맞대어 모으니 계획이 술술 풀렸다.

완벽한 계획의 완성은 다음번 만남으로 기약하기로 했다.

* * *

드디어 내일, 시몬이 놀러 오는 날이다.

그 뜻은 약속했던 타임캡슐을 묻는 날이라는 소리.

나는 책상에 앉아서 푹 한숨을 내쉬었다.

“소중한 추억…. 생각보다 어렵네."

라그나르도 시몬도 모두 결정한 것 같은데 나만 결정을 못 했다.

“라라랑 시몬이 이상한 거지. 어떻게 추억을 그렇게 빨리 떠올려.”

애초에 어린아이들에게 추억처럼 추상적인 것은 어려운 거잖아.

난 어른일 때의 기억을 갖고 있는데 왜 진짜 어린아이들보다 더 떠올리기 힘든 거지?

그때 고개를 돌리다가 우연히 시몬에게서 온 편지가 눈에 띄었다.

“…편지. 편지를 써 볼까?”

그냥 편지 말고 10년 후 모두에게 쓰는 편지라면 미래를 기약하는 소중한 마음이 담겨 있으니까.

“그럼 소중한 추억이 될 수 있지.”

내게도 소중한 추억이 될 테고, 미래의 둘에게도 소중한 추억을 안겨줄 수 있을 테니까.

결정됐다!

나는 그동안 아껴 두었던 예쁜 편지지를 가져와 열심히 편지를 적기 시작했다.

“우선 라그나르에게….”

이 기회에 평소에 하지 못했던 말을 하면 더 좋겠지?

나는 펜을 잡고서 고민을 하다가 사각사각 써 내리기 시작했다.

너에게 언제나 고마워.

첫 문장을 쓰고서는 간질거리는 마음에 작게 웃었다.

나는 내용을 꾹꾹 담아 편지지한 장을 가득 채워 냈다.

"어쩐지 고맙다는 말밖에 없는 것 같기는 하지만….”

편지지의 잉크가 말끔히 마른 것을 보며 빙긋 웃었다.

드디어 하나가 완성되었다.

쉬지 않고 다른 편지지를 가져와서 시몬의 편지도 써 내려갔다.

처음에는 무서웠던 내 친구.

라그나르와 첫 문장이 너무 다르지만 사실이니 괜찮겠지?

나는 킥킥 웃음을 터트리면서 마저 써 내리기 시작했다.

잠시 후 시몬의 편지도 한 장을 가득 채웠다.

“은근히 손이 아프구나."

나는 아픈 손가락을 주무르며 잉크가 마르는 것을 기다렸다.

드디어 두 번째 편지도 완성이 되었다.

완성된 두 개의 편지 뒤로 예쁜 편지지는 한 장이 남아 있는 것이 보였다.

이 기회에 모두 다 써 버리고 싶어졌다.

"10년 후 나에게도 써 볼까?"

무슨 내용을 쓰면 좋을지 생각하다가 펜을 들고서 천천히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안녕, 미래의 나.”

어쩐지 조금 부끄럽네.

그냥 조용히 써야겠어!!

내 방에 적막이 내려앉았다.

침묵을 배경 삼아 천천히 미래의 나에게 쓰고 싶은 말들을 적어 갔다.

"다 적었다.”

편지를 마무리하고서 펜을 내려놓고, 꽉 찬 편지지를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정성스럽게 쓴 세 장의 편지가 예뻐 보여 기분이 좋아졌다.

부디 이 편지를 읽고서 즐거운 추억들을 떠올리며 다시금 행복을 느낄 수 있기를.

나는 저린 팔을 조물조물 주물러 풀어 주고서는 조심스럽게 편지봉투에 넣었다.

실링 왁스까지 확실하게 붙이고 나서야 완성된 편지를 보니 어쩐지 뿌듯했다.

"좋아. 세 장이나 되니 든든해."

이 정도면 우리의 추억을 묻기에는 충분할 것이다.

* * *

그리고 다음 날이 되었다.

곧 시몬이 올 시간인지 밖에서 분주한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나도 이만 방을 나서려고 하는데 편지를 챙기다 말고 시선이 책상 옆 서랍으로 향했다.

“…으음.”

어째서인지 갑자기 그게 생각났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책상의 마지막 서랍을 열어 그 안에 들어 있는 작은 주머니 하나를 꺼냈다.

내 손바닥만 한 작은 주머니 안에는 몰래 숨겨둔 도장이 들어 있었다.

“…이번 기회에 함께 묻어 둘까?"

신경은 쓰이는데 당장 사용처를 아는 것도 아니고, 분명 평범한 도장같이 생겼지만, 보육원장이 꼭꼭 숨겨 놓은 것을 보면 중요한 물건일 것이다.

“좋아. 함께 묻어 두자."

아무도 모르게 숨겨 놓을 수도 있고, 집 앞에 묻어 놓을 테니까 필요할 때 찾아올 수도 있을 것이다.

“라라랑 시몬이 보지 못하게 커다란 주머니에 넣어야겠다.”

천 주머니를 하나 찾아서 그 안에 편지와, 도장이 담긴 주머니도 집어넣었다.

꼼꼼하게 끈으로 입구를 묶고 나이 완성되었다.

니 드디어 타임캡슐에 넣을 물건 똑똑-

“다프네! 준비 다 됐어?”

“응. 나 준비 끝났어.”

때마침 라그나르가 나를 데리러.

왔다.

나는 귀여운 천 주머니를 품에 꼭 끌어안고서 문을 열었다.

나와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라그나르도 주머니 하나를 들고 있었다.

"어라.”

"어?"

우리는 서로 들고 있는 주머니를 가리키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가 풋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손잡을까?”

“응, 좋아! 계단 조심해야 해!”

라그나르가 내 손을 덥석 잡고서는 내 발걸음에 맞춰서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오자마자 리카르다의 눈을 피해서 정원의 수풀 사이에 주머니를 숨겨 놓았다.

“이 정도면 들킬 일 없겠지?"

"응!”

* * *

“하아암.”

하늘이 도와준 것인지 모르겠지만 오늘따라 악셀리우스가 많이 피곤해 보였다.

우리는 서로 눈을 마주치고서는 악셀리우스의 옆으로 쪼르르 다가갔다.

“아저씨 졸려요?"

"응? 아냐.”

"에이. 완전히 졸려 보이는데.”

내 물음에 악셀리우스가 부정하다가 라그나르의 말에 킥킥거리며 웃었다.

"어제 밤늦게 자서 그래. 난 편식도 하지 않고, 평소 건강해서 이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지!"

평상시라면 이런 잔소리도 라그나르랑 시몬이 듣기 싫다고 괜히 투덜거렸을 거다.

하지만 오늘의 우리는 다르다.

"나는 졸린데.”

시몬이 물꼬를 텄다.

악셀리우스가 대답하기도 전에 라그나르가 재빨리 입을 열었다.

“나도 오래간만에 놀 생각에 설레서 잠을 못 잤어.”

라그나르의 말이 끝나자 나는 모두에게 필요한 떡밥을 던졌다.

"그럼 우리 낮잠 잘까요?"

“난 좋아!”

“찬성!”

내 말이 끝나자 시몬과 라그나르가 재빨리 물었다.

순식간에 대화가 끝이 났고 우리 셋은 지그시 악셀리우스를 올려다보았다.

“우리 꼬맹이들. 내가 피곤해 보여서 걱정하는구나. 다 컸네."

악셀리우스가 감동하며 눈가를 훔쳤다.

“울보 아저씨, 또 울어."

“대공은 진짜 감수성이 풍부하다니까.”

라그나르와 시몬이 중얼거렸지만 다행히 피곤한 악셀리우스에게는 들리지 않았나 보다.

조금 다른 쪽으로 착각한 듯싶었지만, 작전은 반쯤 성공한 것 같았다.

훌쩍이는 눈물을 그친 악셀리우스가 기운찬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안으로 들어가서 조금만 잘까?”

“아니야. 여기서!”

돗자리도 깔렸고, 담요도 충분하다.

어차피 리카르다의 마법 안이기도 하지 않는가.

내 외침에 악셀리우스가 잠시 고민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조금이라면 괜찮겠지. 그럼 그렇게 할까?”

자리를 잡고 천천히 눕고서는 우리에게 팔베개까지 해 준다.

평소라면 잘 자라고 인사하고 지켜보았겠지.

하지만 오늘따라 우리보다 먼저 잠에 빠지니 계획이 술술 흘러가는 것이 보였다.

악셀리우스의 숨소리가 변했다.

코만 안 골 뿐이지 거친 숨소리에 우리는 다시 한번 신중히 확인한 후 잠들었다고 확신했다.

"좋아. 빨리 묻고 오자!"

시몬이 마차로 달려가서 재빠르게 상자 하나를 들고 왔다.

그사이 라그나르는 미리 봐 놓은 커다란 나무 아래로 달려가 땅을 깊이 파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미리 숨겨 둔 주머니 두 개를 챙겨서 나무 쪽으로 걸어갔다.

"빠르다.”

누가 라그나르 아니랄까 봐.

나와 시몬이 감탄하면서 쳐다보니 라그나르가 쑥스럽게 웃으며 코밑을 쓸었다.

'아, 흙이 묻었네.'

덕분에 라그나르의 코 밑에 검은 자국이 남기는 했지만.

시몬이 모른 척 상자를 꺼내 든다.

나도 모른 척 주머니를 꺼내 들었다.

"여기에 넣으면 돼?"

“응. 충분해!”

마치 이야기 속 보물 상자처럼 생긴 상자 안에는 화려한 주머니 하나가 들어 있었다.

어쩜 생각하는 게 다 이렇게 똑같은지.

주머니 세 개가 곱게 담긴 것을 보니 어쩐지 두근두근하고 설레는 기분이 우리를 감쌌다.

“뭐 넣었는지 물으면 안 가르쳐 줄 거지?”

“비밀이야.”

"나도 비밀.”

시몬과 라그나르가 답했다.

물론 나도 비밀이었다.

우리는 일심동체로 더는 캐묻지 않기로 했다.

악셀리우스가 깨기 전에 모든 일을 끝마쳐야 했다.

"좋아, 넣는다."

“잘 넣었어? 그럼 이제 묻을게.”

상자 안에 담긴 세 개의 주머니는 뚜껑이 닫히자 자취를 감췄고, 어느새 땅 깊숙이 들어갔다.

라그나르는 땅을 파냈을 때처럼 익숙하게 다시 흙을 채워 구멍을 덮었다.

그리고 모든 일이 끝나고 돌아왔을 때도 아직 악셀리우스는 잠이 들어 있었다.

“좋아, 10년 뒤 오늘!"

"다 같이 타임캡슐을 찾는 거야!”

"약속.”

우리는 새끼손가락을 서로 걸고서 흔들었다.

이렇게 비밀의 타임캡슐 묻기 대작전은 성공에 마쳤다.

나는 기뻐하는 둘을 바라보다가 힐긋 뒤를 돌아보았다.

동시에 이쪽을 보고 있는 악셀리 우스와 눈이 마주쳤다.

'안 자고 있었잖아?'

놀라서 입을 뻐끔거리며 당황하는데 악셀리우스가 가볍게 윙크를 했다.

'일부러 모르는 척해 준 건가.'

하긴 이렇게 소란스럽게 움직였는데 악셀리우스가 눈치채지 못했을 리가 없겠구나.

아무것도 모르는 라그나르와 시몬은 활짝 웃고 있었다.

두 사람의 동심을 위해서라도 아무래도 이 비밀은 10년을 품고 가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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