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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딸로 태어났다-59화 (58/185)

제59화.

가을이 끝나고 겨울이 가까이 다가왔다.

초겨울을 반겨 주는 것인지 보호 마법 위로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는 것이 보였다.

정원에 있는 벤치에 앉아서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니 라그나르가 주섬주섬 담요로 나를 덮어 주었다.

“있지곧 겨울이네.”

“겨울….”

정말 벌써 겨울이 찾아왔다니 믿기지 않는다.

고작 1년이 지났는데 오래된 시간이 흐른 것만큼 여러 가지 일이 있었지.

가족을 만들고, 많은 것을 배우고, 라그나르도 만나고, 친구도 사귀고….

처음에는 이 평화로운 일상이 금방 깨어 버릴 꿈처럼 느껴졌는데 이제는 이렇게 변했다.

‘결국, 살아남았어.’

그 추운 겨울을 이겨 내서 다시.

맞는 겨울은 분명히 따뜻할 거다.

'무엇보다도 라그나르가 내 옆에 있게 된 게 가장 큰 변화 아닐까.'

원래대로라면 그때 축제에서 보았던 마리아와 사랑에 빠져야 하는 게 맞으니까.

하지만 라그나르는 지금 내 옆에 있으니까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내 일상 속 가장 소중한 친구가 된 라그나르를 버리려고 해도 버릴 수 없다.

'라그나르도 그렇게 생각하겠지?'

그렇게 생각하다가 문득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돌리니 라그나르가 나를 빤히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왜 웃어?”

“우리가 만난 지도 곧 1년 이야!

벌써 1년!”

라그나르의 목소리에 즐거움이 가득 담겨 있었다.

활짝 웃는 미소에 과거에 둘러싸인 어두운 기억이 저 멀리 날아가 버렸다.

들뜬 목소리로 앞으로 다가올 1주년을 기념해 우리만의 파티라도 열자며 도란도란 이야기하던 도중.

숲의 저 멀리 우산 여러 개가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엄마?”

“아저씨랑 레녹스랑 리카르다도 보여.”

분명히 조금 전까지 집에 있지 않았던가?

평소라면 우리를 두고서 외출하지 않을 텐데 잠시 가까운 곳에 가는 걸까?

“…어디 간다고 했었나?"

"아니, 아니."

어디로 가는지 궁금해졌다.

그리고 그것은 라그나르도 마찬가지인지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우리는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쫓아가 볼까?”

“몰래 따라가 보자."

우리는 말이 끝나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라그나르가 우산 두 개를 챙겨왔고, 우리는 어른들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하지만 우산을 챙겨오는 시간이 너무 길었던 걸까?

분명 이쪽으로 가는 것을 확인했는데도 어른들이 보이지 않았다.

"어디로 갔지?”

“비가 내려서 기척이 지워졌어."

질척거리는 진흙에 신발이 더러워지는 것이 보였지만 쉴 수 없었다.

이대로 가다간 숲에서 길을 잃을 수 있으므로 우리는 부지런히 발을 옮겼다.

창밖으로 보는 비 내리는 풍경은 분명히 운치 있어 보였는데.

막상 비 아래서 부지런히 움직이니 이렇게 거슬리는 게 또 없다.

하늘이 뚫린 것처럼 내리는 비때문인지 다친 발이 저릿저릿하고 아파져 오기 시작했다.

'…그냥 나오지 말걸 그랬나?'

바로 앞이니 금방 따라잡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아직 내 다리로는 무리인가 보다.

'애초에 내 걸음은 느리니까.'

가뜩이나 걸음 폭이 큰 어른들을 따라잡기에는 분명히 무리겠지.

찌릿찌릿 아파 오는 다리가 더는 못 움직이겠다며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차라리 라그나르에게 업혀서 올걸 그랬을까?

'아니야. 언제까지 모두에게 폐를 끼칠 수는 없잖아. 심지어 오늘은 비가 온다고.

분명히 우리가 나오기 전까지는 조금 내리더니 왜 지금은 야속하게도 이렇게 우수수 쏟아지는 걸까.

하늘이 거센 눈물을 쏟아 내는 것처럼 내 얼굴마저 울상이 되어갈 때, 라그나르가 조용히 나를 불렀다.

“다프네, 내가 업어 줘도 돼?"

“비가 오잖아….”

시무룩한 내 목소리에 라그나르가 씨익 웃었다.

“난 이런 비한테 안 져.”

“하지만…. 매일, 매일 라그나르에게 업히기만 하고."

"내가 업어 주고 싶어서 그래. 응?"

“…그럼 실례할게.”

“얼마든지!”

라그나르는 나보다 조금 더 키가 클 뿐인데 왜 항상 이렇게 든든한 걸까.

나는 덥석 등 뒤에 업혀서 우산을 들었다.

라그나르는 나를 업고, 자신의 우산으로 나를 받쳐 들었다.

자박자박.

퐁당퐁당.

축축한 땅을 밟는 소리도, 물웅덩이를 밟는 소리도 하나의 음악이 되어 숲을 감쌌다.

이것만큼 오늘 날씨와 어울리는 음악이 있을까.

“있지, 다프네.”

“응?”

"난 다프네 업는 거 좋아해. 그러니까 부담스러워 하지 않아도 돼.”

"고마워, 라라.”

언제나 나를 먼저 생각해 주는 네가 좋다.

내 첫 친구가 네가 되어서, 네 첫 친구가 내가 되어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라라, 진짜 좋아.”

“응, 나도 다프네가 너무 좋은걸!"

애초에 나는 혼자도 아니고, 언제나 라그나르가 옆에 있으니 이런 숲 정도는 무섭지 않아.

그렇게 생각하니 오히려 지금 이 시간이 색다른 산책으로 느껴져서, 주변을 둘러볼 여유가 생겼다.

그때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나무 아래 주홍빛 작은 물체가 보였다.

“저게 뭐지?"

“뭐가?"

내 반응에 라그나르가 고개를 돌렸다.

나보다 시력이 좋은 라그나르는 빤히 그것을 바라보더니 무엇인지 알아냈다.

“여우 같아.”

“여우?”

확실히 숲이 깊어지기는 했나 보다. 야생동물이 튀어나오는 것을 보면.

"음, 그런데 조금 이상해.”

"이상하다니?”

라그나르가 여우가 있는 쪽을 빠히 바라보았다.

“책에서 본 여우 그림이랑 다르게 생겼어. 쟤는 너무 작아."

“아기 여우야?”

"아마도?"

아기 여우가 혼자 이런 깊은 숲속을 돌아다닌다니.

다른 동물들에게 공격당하면 위험할 텐데.

걱정스러움에 시선을 떼지 못하는데 라그나르가 그쪽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걱정되면 보고 가자. 만약 도망가면 어쩔 수 없지만."

하지만 여우는 도망갈 힘조차 없어 보일 정도로 기운 없이 축 늘어져 있었다.

“죽었나…?”

라그나르의 등에서 내려와 고개를 숙여 함께 여우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다행히도 죽은 것은 아닌지 얇은 배가 위아래로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아무래도 밥을 잘 못 챙겨 먹었나 봐. 그래서 힘이 없는 것 같은데.”

우리의 목소리를 들었는지 여우가 한쪽 눈을 뜬 채 시선을 움직였다.

고개를 움직이려다가도 힘이 없는지 포기하고 눈을 감는 것을 보니 도망갈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어려서 먹이를 못 구한 걸까?"

“그런 것 같아.”

이렇게 굶다가 죽는 것이 아마 야생의 법칙이겠지.

하지만 이런 모습을 보니 쉽게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은 라그나르 또한 마찬가지인지 빤히 바라보는 시선이 거두어질 틈도 보이지 않았다.

“아, 그러고 보니 나 먹을 게 좀 있는데.”

아까 정원에서 주운 조그마한 사과를 가방에 넣어 놓았던 것이 떠올라 빠르게 사과를 꺼내 들었다.

“먹을 수 있을까?"

그런 걱정은 별것이 아니었는지 여우는 사과의 냄새를 맡고 천천히 눈을 떴다.

“이거 먹을래?”

사과를 조심스럽게 가져다주니 여우가 삐걱거리며 힘들게 고개를 들어 올려 입을 벌린다.

아삭 -

곧바로 들리는 경쾌한 소리.

여우는 사과를 한 입 베어 물고서는 몸을 번쩍 일으키더니 사과를 낚아채듯 물고 먹기 시작했다.

다행히도 입에 맞았는지 아삭아삭 소리를 내며 힘차게 먹는 것이 보기 좋았다.

"다행이다. 그치?"

"응. 배고픈 건 진짜 힘든 일이니까.”

우리 둘 다 배고픔의 슬픔을 아니까 아마 발걸음을 떼기 어려웠나 보다.

그래도 사과를 먹었으니 어느 정도 힘이 생겼을 거다.

“그럼 우리도 그만 가 볼까?”

“가기 전에 나도 여우한테 선물줄래.”

라그나르가 자신의 우산을 펼쳐서 열심히 사과를 먹고 있는 여우에게 씌어 주었다.

나무 아래에 한두 방울씩 떨어지는 빗방울마저 모두 가려진 것을 보며 그가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적어도 비는 안 맞을 거야! 얼른 가자! 다들 혼낼지도 몰라!”

라그나르가 팔로 자신의 몸을 감싸면서 겁먹은 목소리를 내었다.

사과와 우산, 아기 여우 덕분에 훈훈해졌던 분위기가 갑자기 장난스럽게 바뀌었다.

하지만 즐거웠기에 푸훗 웃음을 내뱉으며 다시 그의 등에 업혔다.

“그럼 여우야, 안녕.”

“안녕, 여우야.”

작은 여우와의 만남은 너무 짧아서 아쉽지만 그렇다고 데려갈 수는 없겠지.

우리는 아쉬움을 뒤로 한 채 다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우산에 떨어지는 빗소리를 들어보니 빗줄기도 서서히 약해져 가고 있었다.

하지만 반대로 숲은 점점 더 무성해지고 어두워지고 있었다.

마치 숲이 더 깊숙이 들어오라며 우리를 이끄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 문제가 하나 생겼다.

“갈림길이네.”

안 그래도 시야를 확보하기 어려운데 하필 이럴 때 갈림길이 나오다니.

먼저 간 사람들의 흔적은 비에 흘러가 남아 있지 않아서 쉽게 발걸음을 뗄 수 없었다.

“어른들이 나오기를 기다려야 할까?”

분명히 이 둘 중 한 길로 갔을 텐데 어려운 고민에 우리는 잠시 움직임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때 뒤에서 작은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토, 토하는 소리는 점차 가까워지더니 어느새 우리의 옆에서 그 소리가 딱 멈추었다.

소리가 들린 아래로 고개를 내렸다.

그러자 조금 전의 그 작은 아기 여우가 보였다.

여우는 단추같이 동그란 눈을 반짝이며 우리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여우가 뒤따라왔나 봐."

“어쩌지. 이제 줄 먹이도 없는데.”

미안한 마음에 눈썹을 아래로 축 늘어트렸다.

그런데 여우가 우리를 빤히 바라보다가 갑자기 앞으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갈림길 중에 왼쪽 길을 향해 뛰어가기 시작했다.

우리가 멍하니 서 있자 갑자기 우뚝 서서 작게 울며 우리를 바라보기까지 했다.

“저건 아무리 봐도 우리를 보는거 맞지?”

"따라오라고 하는 것 같지 않아?"

라그나르의 말처럼 여우는 우리가 발걸음을 떼자 다시 토도도 뛰기 시작했다.

우리는 여우의 힘찬 뜀박질을 보며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뒤따라 뛰어가기 시작했다.

“라라! 넘어지지 않게 조심해야 해!”

“다프네도 떨어지지 않게 꼭 잡아야 해!”

서로서로 걱정하며 여우의 뒤를 한창 쫓았을 때.

숲은 더더욱 깊어지기 시작했다.

어느새 시야를 완전히 가릴 정도로 무성한 수풀이 속속히 나타났다.

“역시 오른쪽 길이 맞았을까?”

이쪽은 길도 아닌 것 같다며 이제라도 발걸음을 돌려야 하나 싶은 그 순간.

마침내 여우가 뜀박질을 멈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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