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0화.
“푸하!”
마침내 긴 수풀을 헤치고 나왔을 때 보이는 것은 넓은 공터였다.
아주 커다란 감옥같이 생긴 무서운 물체가 보였다.
그리고 어른들이 그 주위에 모여있는 것이 보였다.
“다프네? 라그나르?”
거친 수풀 사이에서 우리가 나타나자 모두가 당황을 감추지 못했다.
“너희 여기에 어떻게 온 거야?"
엄마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더니 우리 머리에 붙어 있는 풀들을 하나씩 떼어 주었다.
“놀라게 해 주려고 몰래 따라오다가.…."
“비도 오는데. 이런 날 오래 걸으면 다리에도 안 좋을 텐데.”
엄마는 라그나르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라그나르가 고생했네."
"내가 해야 할 일인걸요!"
우직한 라그나르의 대답에 엄마는 언제나 고맙다며 그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그래도 다음부터 이러면 안 돼.
여기가 얼마나 깊은 곳인데.”
“애초에 우리가 모두 자리를 비우면 안 되는 거였는데 말이지."
악셀리우스의 반성이 담긴 목소리에 엄마가 다시금 한숨을 내쉬.
었다.
그 작은 한숨 소리에 에헤헤 하며 어색히 웃자 으쌰 하는 소리와 함께 몸이 공중으로 들렸다.
악셀리우스가 나를 안아 든 것이다.
“길을 잃었으면 어떡하려고! 우리 두 꼬맹이 아무튼, 담력이 대단하다니까!”
“그렇지만 잘 찾아왔는데.”
“결과가 좋다고 해서 과정을 무시해서는 안 되지. 다프네에게는 대롱대롱 벌을 줘야겠어.”
악셀리우스가 다리를 받쳐 주지 않은 채 두 손으로 나를 달랑 들어 발이 허공에 대롱대롱 매달리고 있었다.
내 나이 여덟 살, 이런 것쯤이야 하나도 무섭지가 않다.
어차피 떨어질 것 같으면 악셀리 우스가 받아 줄 게 뻔하고.
'이것보다 높은 곳에도 올라간 적 있는걸.'
그걸로 인해서 다리를 다치기는 했었지만….
겨울이 다가와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깊은 숲속에 들어와서 그런지 자꾸 옛 생각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나는 괜한 생각을 던지기 위해서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서는 팔을 쭉 펼쳤다.
"아저씨. 다프네 무서워요."
“이런. 무서웠구나! 그럼 안 되지!”
무표정에 연기 실력도 부족했지만, 악셀리우스는 그런 것은 하나도 신경 쓰지 않는지 나를 끌어안았다.
이러다가 뽀뽀라도 할 기세라 그의 얼굴을 가까스로 미는데 어느덧 떨어지고 있던 비가 멈춘 것을 알게 되었다.
“비가 멈췄네?”
"모두 모이니까 거짓말처럼 멈췄네. 신기하기도 하지."
나는 악셀리우스의 품에 안긴 채, 라그나르는 엄마와 손을 꼭 잡고서 리카르다와 레녹스가 서 있는 곳으로 향했다.
“다프네, 라그나로, 요 사고뭉치들.”
리카르다가 얄미운 목소리로 말하자 라그나르가 지지 않고 받아쳤다.
"아냐. 우리를 두고 간 리카르다의 잘못이야!”
"내 잘못인 거야?"
당연히 아니지만 둘은 만담이라도 하듯 투덕거리기 시작했다.
"어떻게 보면 진짜 형제 같단 말이지.”
악셀리우스가 중얼거리는 말에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레녹스와 리카르다가 이상적인 형제라면, 라그나르와 리카르다는 흔히 볼 수 있는 형제 같았다.
“그런 모습을 보면 둘 다 참 어리지 않아요?"
가만히 대화를 듣던 레녹스가 웃으며 말하자 우리는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다프네, 오는 길은 어렵지 않았어? 진흙 길이어서 걷기 더 힘들었을 텐데.”
레녹스가 라그나르의 뺨을 가볍게 쓸어 주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언제나 다정한 레녹스를 보면 어리광을 피우고 싶어진다니까.
하지만 걱정시키면 안 되겠지.
“힘들어질 때 라라가 업어 줘서, 난 하나도 안 힘들었어.”
“라그나르에게 고맙다고는 했어?"
“했어.”
레녹스는 그럼 다행이라며 헝클어진 내 머리를 가볍게 정리해 주고는 우리의 뒤로 시선을 돌렸다.
“그럼 저 여우랑은 무슨 관계일까?”
"아!”
드디어 모두를 찾았다는 것에 여우의 존재를 깜빡 잊고 있었다.
“레녹스! 혹시 먹을 것 있어?"
“먹을 것은 없는데.”
"리카르다는 있지."
그 목소리에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라그나르가 부루퉁한 표정으로 리카르다의 보호 마법을 콩콩 때리고 있는 게 보였다.
“치사하게 마법 쓰지 마!"
"네 주먹이 더 치사한 것 몰라?
진짜 아프다고.”
억울한 목소리 뒤로 리카르다가 가방에서 주섬주섬 무언가를 꺼내들었다.
“작은 사과인데 충분할까?"
"응! 충분해! 고마워, 리카르다!"
"고마우면 뽀뽀.”
“싫어.”
사과만 받아 들고서 고개를 획돌리자 리카르다가 슬프다며 훌쩍이는 목소리를 내었다.
연기라는 것을 알기에 관심을 덜 쓰고 싶지만.
쪽.
리카르다의 시무룩한 표정은 적응이 되지 않기에 재빨리 뺨에 뽀뽀를 해 주었다.
“앗.”
“어엇.”
"어…?”
레녹스가 놀랐고, 악셀리우스가 그럴 리 없단 표정을 지었으며, 리카르다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어머.”
엄마가 짧은 감탄사를 내뱉었다.
“리카. 다프네의 두 번째 뽀뽀를 가져갔구나?"
“어머니가 첫 번째고…. 제가 두번째?”
리카르다가 뽀뽀 받은 뺨을 감싸더니 갑자기 입을 틀어막았다.
“제가 다프네에게 선택받은 두번째 사람이라니. 이 영광을 어여 쁘고 귀여운 다프네에게 돌리고, 앞으로 일주일 동안 뺨을 씻지 않겠습니다.”
고작 뽀뽀 한 번에 쓸데없이 진지한 반응이다.
나는 질색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팩 돌리며 말했다.
“씻지 않아 더러워지면 앞으로는 뽀뽀 안 해.”
“그럼 안 되지! 매일매일 깨끗하게 씻을게!”
히죽거리는 웃음에 부끄러워지는데 주변에서 원망스러운 눈빛이 느껴졌다.
“다프네. 나도 뽀뽀 받을 줄 아는데.”
평소에는 점잖고 언제나 다정한 미소를 지어 주던 레녹스 맞나?
그가 그 어느 때보다 씁쓸함을 감추지 못한 채 깊은 상심에 잠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내가 그렇게 해 달라고 해도 안해 주더니…. 역시 아저씨보다는 오빠가 좋은 거지.…?"
아니, 사실은 모두 다 좋기는 하지만 매일 해 달라고 하면 어쩐지 피하게 되는걸.
"나도 매일 업어 주는데…. 나도 뽀뽀 받고 싶은데.”
두 사람도 모자라서 라그나르도 서운함이 가득한 울망울망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도 뽀뽀….”
“라라도 안 해 주잖아.”
“그럼 내가 하면 해 주는 거야?"
이게 아닌 것 같은데?
진짜 다들 뽀뽀가 뭐라고!
이 이상 말을 꺼내면 모두에게 뽀뽀를 해 줘야 할 것 같아서 답없이 고개를 팽 돌렸다.
“저기, 저기 여우야!"
똑똑한 아기 여우는 내 손에 들린 사과를 봤는지 도도도도 이쪽을 향해 뛰어왔다.
아기 여우가 달려오자 악셀리우스가 나를 천천히 바닥에 내려 주었다.
나는 그의 무릎에 기대어 앉아서 여우에게 사과를 내밀었다.
“야 ”
“여우야 먹어."
곧이어 아삭아삭하고 야무지게 사과를 베어 먹는 여우의 식사 시간이 시작되었다.
그 작은 입으로 어찌나 빠르게 먹는지 누가 뺏어가지도 않을 텐데 입이 쉬지를 않는다.
"아직 어린 여우구나. 아무래도 꽤 오랫동안 굶은 것 같은걸?”
"다른 가족들은 없는 걸까요?"
"아무래도 그런 것 같은데.”
어느새 사과를 다 먹은 여우가 키키하고 울음소리를 내면서 고개를 갸웃갸웃하며 올려다보았다.
까맣고 말간 눈 아래 보인 야윈몸은 안쓰럽게 느껴졌다.
“그럼 우리가 이대로 숲을 떠나면 여우는 또 혼자가 되는 걸까요?”
“그러겠지.”
악셀리우스가 손을 들어서 여우를 쓰다듬어 주려고 했다.
그것을 기가 막히게 알아차린 여우가 몸을 틀어 피했다.
악셀리우스의 상처받은 손은 공중에서 뻣뻣하게 굳어 버렸다.
“사람의 손길은 싫은가 보네.”
아쉬움이 뚝뚝 떨어지는 목소리에 내가 여우를 불러 보았다.
“여우야. 이리로 와. 해치지 않아."
내가 손을 이리저리 움직이는데 여우가 나를 힐끗 보더니 천천히 다가와 고개를 내게로 내밀었다.
그리고 한참을 여우를 쓰다듬으며 시간을 보냈다.
“…귀엽다.”
작은 머리에 복슬복슬 올라온 주황색 털이 너무 귀여웠다.
쓰다듬는 손길에 가끔 들리는 갸르릉거리는 소리도 귀여웠다.
"나, 나도.”
라그나르가 손을 뻗자 이번에 여우가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라그나르도 성공적으로 여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복슬복슬….”
발갛게 달아오른 라그나르의 얼굴은 행복해 보였다.
“이 여우가 우리를 이쪽으로 안내해 주었어요.”
"여우가 굉장히 똑똑하구나."
라그나르도 못 맡는 냄새를 동물의 본능으로 찾아서 우리를 안내해 준 것일까?
‘하지만 라그나르는 보통 사람보다 냄새도 잘 맡는 것 같았는데.’
여우가 똑똑한 동물이라고는 하나 길을 안내할 정도로 똑똑할까?
잠시만. 길을 안내한다고?'
갑자기 번뜩하고서 내 머릿속에 원작의 기억이 지나갔다.
'2부에는 던전이 많이 등장했었지? 그리고 그런 곳에서도 언제나라라는 길을 잃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했었어. 왜냐하면….’
나는 기분 좋은 울음소리를 내며 귀여움을 받는 작은 아기 여우를 내려다보았다.
'길잡이 여우가 항상 옆에 있었으니까.'
숲이든, 동굴이든, 혹은 던전이든 그 어디서도 길을 잃지 않게 도와주는 특별한 여우라고 했다.
‘깜빡 잊고 있었어.'
소설 속에서는 어린 시절부터 함께한 애완 여우라고만 나와 있어서 존재를 잊어버리고 있었다.
“엄마, 엄마. 이 여우 우리가 데려가면 안 돼요?"
"이 여우에게 가족이 없다면 애완동물로 키워도 괜찮지만…. 원래 애완동물을 기르는 데는 많은 책임이 따르기 때문에 충동적으로 선택해서는 안 돼."
엄마의 말에 나는 당연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 여우는 가족도 없으니 외로울 테고, 우리가 이대로 가면 또 굶을 수도 있잖아요. 처음 봤을 때 나무 아래에 있었는데 죽은 줄 알았는걸요. 너무 걱정돼요.”
“그것도 그렇지만….”
그만큼 야윈 것은 사실이기에 엄마의 미간에 고민의 흔적이 지나갔다.
지금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 라그나르에게 도움의 눈길을 보냈다.
그간의 경험으로 이런 눈빛 정도는 쉽게 읽어 내는 라그나르답게 재빠르게 입을 열었다.
"저랑 다프네가 밥도 주고, 씻겨도 주고, 함께 놀아 주기도 할게요. 진짜 잘 키울게요!"
"흐음…. 좋아, 대신 하나만 약속할까?”
생명은 소중하단 것을 잊지 말고 새로운 친구, 가족을 들이는 것처럼 소중히 아껴 줘야 한다는 것.
중요한 약속을 하고 나서야 우리는 여우를 데리고 오는 것을 허락맡을 수 있었다.
"와!”
“우와!”
엄마의 허락에 우리가 기뻐서 만세를 했다.
여우도 이 분위기를 읽었는지 키키키하고 기분 좋은 울음소리를 내뱉었다.
“여우의 이름은 뭐로 할까?”
“울음소리가 키키하고 들리니까.
키키 어때?"
“좋아!”
순식간에 여우의 이름이 결정되었다.
내 제안이었지만 어쩐지 급하게 지은 것 치고는 너무 잘 어울리는 이름이었다.
키키도 어감이 좋은지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좋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