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녀의 딸로 태어났다-63화 (62/185)

제63화.

엄마와 나는 동시에 휙 고개를 돌렸다.

우리는 등장한 사람을 반갑게 맞이해 줄 수가 없었다.

“악셀리우스, 이 시간에는 어쩐 일이야.”

"물었잖아. 반역이라니? 아니 애초에 프레이르라니? 그 이름이 여기서 왜 나오는 거야?"

프레이르의 이름을 담은 순간 악셀리우스가 표정을 딱딱하게 굳혔다.

"이 시간에는 어쩐 일이냐고 물었어.”

“내일 시몬과 약속이 있다 들어서 신전도 함께 가는 게 좋겠다고 말을 하려고 찾아왔어."

그 말에 잊고 있었던 시몬과의 약속이 떠올랐다.

내일 거리에 유명한 극단이 찾아와서 연극을 한다고, 다 함께 보러 가자고 일주일 전에 한 약속이었다.

악셀리우스는 다시금 엄마에게 물었다.

“둘 사이의 대화에서 왜 프레이 르의 이름이 나온 거야?"

악셀리우스의 말을 듣자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그만. 그만. 시간이 너무 늦었어. 내일 이야기해도 늦지 않아.

다프네 너도 어서 들어가렴.”

어디서부터 들은 걸까.

나는 고개조차 들지 못한 채 벌벌 떨었다.

마치 벌을 기다리는 아이처럼 궁지에 내몰린 기분.

내가 할 수 있는 건 속으로 이상황이 무사히 지나가기를 바라는 것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런 운 좋은 상황은 내게 허락되지 않았나 보다.

"다프네의 친부를 알려주지 못한 이유가 이거였구나. 프레이르의 딸이어서….”

마침내 악셀리우스의 입에서 나와서는 안 되는 말이 튀어나왔다.

“다프네, 어서 방으로 돌아가렴."

“정말인 거야…?”

악셀리우스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려 왔다.

엄마가 아무런 답을 하지 못하자 악셀리우스는 허탈한 미소를 흘렸다.

"어떻게…그런 사실을 나한테까지 숨길 수가 있어?"

악셀리우스의 목소리에 슬픔이 잠겨 있었다.

엄마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다프네. 어서 방으로 가렴."

엄마의 한숨 소리에 정신을 번쩍 차렸다.

내가 이 상태로 가만히 있으면 상황이 악화되면 악화되었지, 좋아지지는 않을 듯했다.

후들거리는 다리를 움직여 겨우 문 앞에 도착했을 때, 혹시 싶은 마음에 고개를 돌려 보았다.

악셀리우스는 나를 보고 있지 않았다.

고개를 숙이고 있느라 표정이 보이지 않았지만 꽉 쥐고 있는 주먹이 떨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지금껏 속여서 화가 난 걸까?'

악셀리우스의 눈을 마주 볼 자신이 없어졌다.

나를 향한 악셀리우스의 눈빛이 겨울을 담아낸 것처럼 차갑게 가라앉을까 두려웠다.

확실한 건 나를 향한 감정은 예전과 같지는 않겠지.

“어떻게….”

악셀리우스의 목소리에 물기가 서렸다.

“일단 흥분을 가라앉혀. 천천히 설명해 줄 테니까….”

악셀리우스의 반응에 엄마는 당황을 숨기지 못하고 천천히 그에게 다가갔다.

두 사람이 가까워진 그 순간 문이 닫혔다.

'악셀리우스는 대공이지. 만약 그가 압박한다면 엄마도 못 버틸지도 몰라.'

지금이야 자신을 속였다고 슬퍼하겠지만 천천히 이성을 찾으면 지금 상황에 대해 화를 낼지도 모른다.

방 안을 가득 채우던 따뜻한 빛이 자취를 감추고, 까만 복도가 나를 반겼다.

어둡고, 무섭고, 또 추웠다.

움직이지 못하고 가만히 서 있는데 아래쪽에서 끼잉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시선을 아래로 내리니 언제 깼는지 몰라도 키키가 시무룩한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나 때문에 깼어?”

키키의 낮은 울음소리가 나 대신 울어 주는 것 같았다.

나는 키키를 안아 들고서 따뜻한 털에 얼굴을 묻었다.

키키의 위로로 움직일 힘이 났지만 더 큰 위로가 필요했다.

혼자 자고 싶지 않았다.

'…라그나르.'

나도 모르게 시선을 아래층으로 돌렸다.

내가 누구든지 신경 쓰지 않고 언제나 내 편이 되어줄 사람.

다른 모든 이들이 나를 버릴 때도 내 옆에 있어 줄 사람.

나는 지금 그런 사람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은 내게 라그나 르뿐이었다.

발걸음을 옮겨 천천히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후들거리는 다리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해 넘어질 뻔했다.

그래도 다치지 않고 무사히 방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내가 들어가도 될까?'

혹시 잠을 깨우는 것은 아닐까?

한참을 문 앞에 서서 고민을 하는데 갑자기 문이 스르륵 열렸다.

“다프네?"

자는 와중에도 기척을 느꼈는지 라그나르가 먼저 문을 연 것이다.

작게 소곤거리는 목소리는 잠에서 깬 듯 웅얼거렸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를 향한 애정이 확실하게 느껴졌다.

“아.”

겨우 멈추었던 눈물이 주르륵하고 조용히 터져 나왔다.

누군가에게 기댈 수 있다는 안도 감이 찾아오자 나도 모르게 눈물을 뚝뚝 흘렸다.

"다프네? 왜 그래?"

그리고 내 눈물을 본 라그나르가 당황하며 나를 방으로 이끌었다.

내 울음에 키키가 키잉하고 따라 울기 시작했다.

울음을 참는 나를 대신하여 라그나르가 키키를 안아 들고 문을 닫았다.

천천히 문이 닫히는 것을 확인하자 꾹 참던 울음이 터져 나왔다.

"왜 그래? 무서운 꿈을 꿨어?"

“응.”

무서운 꿈을 꿨다.

나를 아껴 주던 이가 차갑게 등을 돌리고, 결국 모든 이들이 내게서 등을 돌리는 상상은 내게 악몽이었다.

라그나르는 작게 움츠러든 내 몸을 번쩍 안아 들고서는 침대로 데리고 갔다.

그리고 나를 조심스럽게 눕혀 주었다.

“그럼 오늘은 같이 잘까?"

“…그래도 돼?"

"내가 다프네의 옆에서 악몽을 내쫓아 줄게.”

불 꺼진 깜깜한 방, 라그나르는 그 어느 때보다도 어두웠다.

하지만 어째서 환한 빛으로 둘러.

싸인 것 같을까.

'아, 내게는 네가 빛이구나.'

무서운 어둠이 아니라 언제든지 나를 따스하게 감춰 주는 빛.

나는 놓치지 않겠다는 듯 라그나 르를 꼭 끌어안았다.

마찬가지로 라그나르도 나를 껴안았다.

“내일 연극을 보려면 일찍 자야 해. 연극은 처음이라서 기대된다."

“.…나도 처음이라서 기대돼."

잔뜩 기대에 찬 목소리에 차마 내일 나가기 싫다는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기대된다는 거짓말을 하며 눈을 감았다.

그리고 바로 눈을 떴다.

차마 눈을 감을 수가 없었다.

눈앞이 까맣게 지워지자 차가운 현실이 머릿속을 헤집었다.

두려움에 오돌오돌 떠는데 라그나르가 내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춰 주었다.

"잘 자, 다프네."

“…잘 자, 라라.”

악몽을 꾸겠지.

하지만 내 옆에 있는 라그나르가 내 악몽을 내쫓아 줄 거다.

오늘따라 따뜻한 그의 체온이 그 어느 때보다 안정감을 가져다 주었고, 긴장감에 빳빳한 몸이 잠에 빠지며 서서히 풀리기 시작했다.

키키가 우리 사이를 파고들어 몸을 말았다.

다른 건 몰라도 라그나르와 키키는 내 옆에 있어 주겠지?

그거면 충분할 것이다.

우리 셋은 그렇게 함께 잠이 들수가 있었다.

이것이 우리가 같이 보낸 마지막 날이었다.

* * *

다프네가 문을 닫고 나가자마자 악셀리우스는 서러움을 참지 못하고 눈물을 왈칵 터트렸다.

“어떻게… 나한테까지 이렇게 감쪽같이 속일 수가 있어!"

악셀리우스의 울부짖음에 오히려 클로에는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혔다.

“정말 다프네가 프레이르의 딸이야? 네 딸이 아니고.…?"

“그래. 내 친딸이 아니야. 하지만 지금은 내 딸이야.”

“말장난하자는 게 아니잖아!"

악셀리우스는 기가 막힌다는 듯 자신의 머리를 붙잡았다.

“굳이 나까지 속일 필요가 있었어? 적어도 내게 미리 말해 줄 수는 있었던 거잖아."

“비밀을 아는 이는 적을수록 좋은 거니까.”

클로에의 냉정한 말에 악셀리우스는 눈물을 삼키며 말했다.

“비밀을 알고 있는 이가 누구누구인데? 레녹스랑 리카르다는 알고 있어?"

"알고 있어.”

"내가 그 두 아이보다 믿음직하지 못했던 거야?"

악셀리우스는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닦지도 않은 채 말을 이어갔다.

“설마 내가 대공이어서 비밀로한 건가? 내가 황실의 사람이니까? 해를 입히기라도 할까 봐?"

“........”

"아니면 비밀을 털어놓으면 신전의 이용을 제한이라도 할까 봐 그랬어?”

클로에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조용히 시선을 피했다.

그 반응에 오히려 악셀리우스는 더욱 상처받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내 사랑은 너에게 고작 이 정도 믿음밖에 주지 못 한 거구나.”

허탈한 웃음에 클로에가 고개를 저었다.

“미안해, 악셀…. 하지만 어쩔 수가 없었어.”

악셀리우스는 두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감싸며 서러움을 참으려 했다.

하지만 울먹거리는 울음 소리에 담긴 슬픔은 쉽게 참아지지 않았다.

“그냥 내가 너에게 이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는 게 너무 슬프고...”

"악셀.."

악셀리우스의 목소리가 다시금 떨려 왔다.

“언제나 황실의 일원으로서 자랑스러웠는데 네 앞에만 서면 내 신분이 너무 원망스러워."

악셀리우스의 솔직한 말에 클로에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얼굴을 가린 손을 치우자 눈물범벅이 된 얼굴이 보였다.

클로에는 슬픈 표정으로 악셀리 우스의 뺨에 흐르는 눈물을 조심스럽게 닦아 내었다.

“네가 두려워하는 일을 만들지 않을게. 그러니 지금이라도 사실 대로 이야기해주면 안 될까.…?"

"......."

“나도 다프네를 내 딸처럼 여겼으니까… 알고 싶어. 그 아이가 어떻게 이곳에 오게 되었는지.”

악셀리우스는 자신의 얼굴을 감싼 클로에의 손을 잡고 손바닥에 부드럽게 입을 맞추었다.

"내 이름을 걸고서 두 사람에게 해가 되지 않도록 비밀을 지키겠다고 맹세할게.”

악셀리우스의 눈물 섞인 맹세에 클로에는 울컥 올라오는 감정을 진정시키며 간신히 입을 뗐다.

“프레이르가 죽은 그날 밤 다프네가 나를 찾아왔어.”

악셀리우스가 조용해지자, 클로에는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그 아이는 이미 보육원에서 지속적인 학대를 받고 있었어. 그러다 프레이르가 죽었고, 다음 날 보육원 직원들이 혼내 주겠다며 빈민가로 데려가겠다고 했다더라."

“…빈민가라니.”

“그래,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알겠지.”

악셀리우스의 표정이 화가 난 듯 일그러졌다.

"나를 찾아온 다프네가 그러더라. 자신은 거기서 죽을 거라고.

틀린 말은 아니었어."

클로에는 끔찍하다는 듯 진저리를 치며 말을 이어갔다.

“분명히 악녀, 아니 프레이르의 딸이라는 것이 밝혀진다면 가족과 친구를 잃은 빈민가의 주민들이 가만 놔두지 않았겠지."

마치 자신이 그런 입장이 된 것처럼 클로에의 눈은 상처받은 사람의 눈빛이었다.

“그런 상처받은 아이에게 난 끔찍한 조건을 내걸었어.”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몸은 지독한 후회로 덜덜 떨리고 있었다.

“다프네는 그 조건을 이루려다가 발을 심하게 다쳤고…. 평생 장애를 안고 살아갈 뻔했지."

가까스로 악셀리우스의 도움 덕에 그것을 면했지만….

그걸 지금 말할 필요는 없었기에 클로에는 고개를 저었다.

“다친 다리를 치료할 수 없을지도 모른단 말을 듣고 나한테 다프네가 뭐라고 한 줄 알아?"

“…뭐라 했는데?”

"다리 하나가 목숨 값치고는 싸죠. 그렇게 말했어.”

클로에의 목소리가 분노를 참지 못하고 덜덜 떨렸다.

자신에 대한 분노는 시간이 지나도 분명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고작 일곱 살이 된 아이가 그런 말을 했어. 아무런 죄도 없는 아이가 너무 괴로워서 자신을 살려 달라고 외쳤어!”

셀리우스의 두 눈이 떨려 왔다.

“죽음에서 도망친 아이야. 비밀이 밝혀진다면 다프네는 더 힘들어하겠지.”

"....”

“그럴 리가 없다는 것 알지만 불안한 마음이 너무 커서 네게 말하지 못했어.”

클로에의 울음기 섞인 목소리에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미안해, 악셀."

악셀리우스는 말없이 클로에를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겼다.

어느새 악셀리우스의 눈가가 다시 붉게 물들어 있었다.

"나는 괜찮아.”

악셀리우스는 구슬프게 우는 클클로에를 더욱 품에 끌어안으며 다시 나올 것 같은 눈물을 꾹 참았다.

지독하고 잔인했던, 길고도 긴 새벽이 지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와 함께 끔찍한 하루가 시작되고 있다는 것을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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