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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딸로 태어났다-64화 (63/185)

제64화.

무언가가 미친 듯이 쫓아와 두려움에 이를 악물고 뛰었다.

검은 어둠을 닮은 그것은 놓치지 않겠다는 듯 계속해서 쫓아왔고, 마침내 잡히겠다고 생각한 그 순간 눈이 떠졌다.

“꿈… 이구나.”

온몸이 식은땀으로 축축한 것을 느끼며 한숨을 내쉬었다.

자세히 기억은 안 나지만 잡혔다면 큰일 났을지도.

나를 잡아먹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꿈이었다는 사실에 안도를 하며 식은땀을 닦는데 옆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왜 그래 키키?"

키키가 낑낑거리며 안절부절못하는 울음소리를 내고 있었다.

“라라?”

무언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파묻힌 이불을 걷자 그 아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른 라그나르가 보였다.

그는 심상치 않은 모습으로 거친 숨을 할딱거리고 있었다.

키키가 라그나르 옆에 딱 붙어서 계속 울부짖었다.

“라라! 라라!”

황급히 라그나르를 흔들어 보았지만, 눈도 뜨지 않고, 미동조차 없었다.

오싹한 불안감이 내 몸을 타고 흘렀다.

나는 라그나르의 이마에 손을 얹어 보았다.

“뜨거워.”

평소의 라그나르는 몸이 굉장히 차가운데 이상하게도 오늘은 뜨거웠다.

마치 열이 나는 듯이 말이다.

레녹스가 힘겹게 라그나르에게 약을 먹였지만, 들뜬 열기는 가라 앉지 않았다.

“열이 굉장히 높아.”

“갑자기 왜….”

나는 레녹스의 옆에서 울망거리는 얼굴로 라그나르를 내려다보았다.

어제까지 멀쩡했는데 왜 갑자기 아픈 걸까.

'혹시 내 악몽이 라그나르에게로 간 걸까.'

내가 여기에 오지 않았더라면 라그나르가 이렇게 아프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우울해졌다.

침울한 얼굴로 라그나르의 손을 붙잡은 채 눈물을 삼키는데 잡은 손에 약간의 힘이 들어갔다.

"다프네….”

“응. 나 여기 있어.”

라그나르가 힘겹게 눈을 떴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안도의미소를 짓는 것에 다시 울컥하고 감정이 올라왔다.

"미안해, 나 때문에….”

"너 때문에 아니야. 어제부터 몸이 안 좋았어….”

“그럼 말을 했어야지!”

그러고 보니 어젯밤 평소와 다르게 맞닿은 손에 따뜻한 느낌이 들었었다.

단순히 그 순간에 휩쓸려 기분 탓인줄 알았는데.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속상한 마음에 훌쩍하고 눈물을 삼켰다.

"미안해…. 울지 마.”

"안 울어.”

"으음, 심각한 감기인 것 같아.

오늘 하루는 푹 쉬는 게 좋겠다.”

리카르다가 어느새 라그나르의상태를 살펴봤는지 진단을 마쳤다.

다행히도 눈을 뜬 직후 많이 나아졌다는 말에 그나마 안심이 되었다.

"아무래도 오늘 연극은 못 볼 것 같아. 아쉽지만 다음에 보자.”

“하지만 시몬이….”

라그나르의 말에 잊고 있던 시몬이 떠올랐다.

그와 함께 악셀리우스의 얼굴까지 떠오르자 다시 침울해질 수밖에 없었다.

“다프네. 나는 괜찮으니까 시몬이랑 보고 와.”

“그래. 다프네도 기대 많이 했었잖아.”

라그나르의 말에 레녹스까지 거들었다.

"아픈 친구를 두고 가고 싶지는 않은걸.”

“시몬이 기다릴 거야. 나 대신 재미있게 보고 와 주라.”

함께 가지 못해서 미안하다며 라그나르가 힘겹게 미소를 지었다.

아마도 내가 기대한다고 생각해서 보내려는 거겠지.

'자기가 아픈데도 나를 먼저 신경 쓰고….’

여기서 계속 안 가겠다고 고집을 피우면 라그나르가 더 힘들어 할 것이 뻔했다.

“시몬에게도 미안하다 전해 줘."

“알겠어. 다녀와서 연극의 내용 다 말해 줄게.”

“응. 나는 약 먹고 기다리고 있을게. 연극만 보고 와야 해?"

아픈 와중에도 장난스럽게 웃는 것에 어쩔 수 없이 나도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나 조금만 더 잘게.”

내가 웃는 것을 보자 라그나르가 안심되었는지 눈을 감았다.

어쩐지 라그나르를 눈에 많이 담아 둬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레녹스의 재촉이 있기 전까지 한참을 바라보았지만, 라그나르는 알지 못할 것이다.

조용한 마차 안에는 어색한 공기가 가득했다.

악셀리우스는 턱을 괸 채 창문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평소라면 이것저것 주제를 던져내며 화목한 이야기를 이어 갔겠지만 이제는 그런 호의를 바랄 수 없겠지.

‘…하지만 계속 이렇게 지낼 수는 없잖아.'

지난밤, 친엄마가 저지른 죄에 대하여 알게 되었다.

엄마는 수상한 점이 있다고는 했지만, 그것 또한 확실한 것은 아니니까.

'그래, 엄마처럼 감싸 주는 사람이 오히려 이상할 거야.'

나는 이 불편한 침묵을 깨트리기로 했다.

“속일 생각은 없었어요."

"......."

악셀리우스의 시선이 내게로 향했다.

마주친 시선에 나는 몸을 움찔떨다가도 해야 할 말을 꺼내기 위해 다시 입을 열었다.

“엄마는 잘못 없어요. 내가 이기적이어서, 살고 싶어서 엄마를 찾아온 거니까요.”

“엄마가 잘못한 건 나를 동정하여 거두어 준 것 뿐이에요.”

"......."

“그러니까 엄마 너무 미워하지 마세요.”

고작 나라는 존재 때문에 엄마를 향한 악셀리우스의 마음이 식지 않을 것이라는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불화는 끊임없이 일어날 것이 분명하다.

“원하신다면 시몬과도 오늘을 마지막으로 더는 만나지 않을게요."

“신전에도 더는 찾아가지 않을게요. 조용히 없는 듯이 살아갈 테니까 비밀로 해 주세요."

악셀리우스가 안타까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다프네, 왜 네가 죄인처럼 그렇게 말하는 거야.”

"........"

"프레이르의 죄가 지독했다지만, 그녀의 자식이라는 이유로 네가 죄인이 되는 건 아니야."

“하지만 전 악녀의 딸이잖아요.

사람들이 미워하고, 원망하고, 나쁘다고 말하는 악녀의 딸."

"뭐?"

내 대답에 악셀리우스가 이마를 찡그리며 주먹을 꽉 쥐었다.

주먹이 올라올 것 같다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

하지만 한참이고 아무런 아픔이 느껴지지 않아 다시 눈을 떴을 땐 악셀리우스가 놀란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때리는 줄 알았어?”

충격이 가득한 목소리였다.

“죄송해요. 저도 모르게 그만….”

어쩐지 한없이 초라하고, 작아지는 기분이었다.

기분 나빠 할 것을 알기에 사과하고 싶었지만, 사과를 건네기에는 악셀리우스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왜 나보다도 더 상처받은 표정을 짓는 걸까.

악셀리우스는 올라오는 화를 참듯이 숨을 크게 들이 내쉬었다.

"다프네, 너는 아무런 잘못이 없어.”

그리고 내 눈을 바라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난 끝까지 네 비밀을 지키기로 맹세했단다. 절대로 너를 내치지 않을 거야.”

“하지만… 저는….”

“내가 다프네 아빠 자리에 입후보한 걸 잊은 거 아니지?"

악셀리우스의 장난스러운 말에 어쩔 수 없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정한 태도에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다행히 마차가 도착하여 대화가 끊긴 덕에 간신히 참을 수 있었다.

마차의 문이 열렸고, 시몬이 활짝 웃으면서 나를 반겼다.

“다프네, 오랜만이야."

“응, 오랜만이다."

악셀리우스는 우리를 보며 다정하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 미소에 어색하게 웃으며 시몬이 내민 손을 붙잡았다.

"버릇이 돼서 그런지 오른손으로 잡으니까 어색하다.”

시몬은 잡은 손을 흔들며 웃었고, 나도 그를 따라서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라그나르는 많이 아파?”

“열이 많이 오르기는 했지만 감기 같다고 했어.”

“날씨가 추워져서 그런가."

평범한 대화가 어떻게 이렇게 반가울까.

어젯밤만 해도 세상에 버려질 것 같아 무서움에 오들오들 떨었었는데.

'아저씨가 이해해 줘서 가능한 거겠지.'

나는 힐긋 눈을 굴리며 우리의 옆에서 걷고 있는 악셀리우스를 바라보았다.

'다행이다. 이 평화로움을 포기하지 않아도 돼서.’

곧 목적지에 도착하였다.

최대한 많은 사람이 보고, 즐거움을 느낄 수 있도록 주최 측에서 연극도 야외에서 열고, 지원도 아끼지 않았다고 들었다.

우리는 제일 앞자리에 앉았고, 곧 사람들도 바글바글 모이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모이자 연극이 시작되려는지 천막이 들썩들썩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모이며 점차 시끄러워지기 시작했다.

“뭐지?”

그때 시몬이 주변을 둘러보더니 한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대공. 저기서 싸우는 사람들 성기사인 것 같은데?"

시몬의 말에 악셀리우스가 고개를 돌려 가리킨 곳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성기사 두 명과 다른 제복을 입고 있는 기사 세 명이 목소리를 높이며 다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그대가다녀와 보도록 해."

시몬의 말에 악셀리우스가 고개를 저었다.

"둘을 두고 갈 수는 없습니다.”

“잠시라면 괜찮을 거야. 주변에 보는 사람들도 많으니 걱정하지 말게.”

시몬은 다시 한번 저쪽을 눈짓하며 말했다.

“그대가 가야 빠르게 처리될 것 같아서 그래. 모처럼의 외출이니까.”

그렇게까지 말하자 악셀리우스는 더 버티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시몬은 걱정하지 말라며 고개를 끄덕였고, 악셀리우스가 멀리 사라지자 내게 물었다.

“대공이랑 둘이 싸웠어?”

"아니야, 그런 거."

"평소랑 다르게 말도 안 하고, 대공도 표정이 이상하고."

시몬이 자기에게 말해 보라며 든든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냥 기분이 안 좋은가 보지.”

내 대답에 시몬은 무어라 말을 덧붙이려다가 엄지로 자기를 가리켰다.

“대공이 괴롭히면 말해. 내가 혼쭐을 내 줄게.”

“그런 거 아니라니까."

나를 위한 배려에 피식 웃으며 그의 빈손을 잡았다.

"아, 시작하려나 보다.”

마침 타이밍 좋게 연극의 천막이 막을 올렸다.

멋지고 아름다운 배우가 등장하여 서로의 사랑을 노래하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운명적인 첫 만남, 우연히 겹치는 만남이 필연이 되는 그 서사를 아름답게 풀어내는 연극이었다.

두 사람의 사랑이 극에 달했고, 서로의 마음을 고백하는 그때 갑자기 새로운 인물이 등장하였다.

화려하고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감히 네까짓 게 내 것을 건드려? 가만두지 않으리라!"

표독한 표정으로 증오를 노래하는 배우의 모습에 많은 관객이 욕을 내뱉기 시작했다.

여인은 두 사람을 갈라놓기 위해 잔인한 짓을 저지르기 시작했고, 그들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을 괴롭히기도 하고, 죽이기도 했다.

몸에 물든 빨간 피로 주인공들을 향해 저주를 퍼붓는 모습에 관람하는 사람들은 비난을 아끼지 않았다.

그렇게 연극이 절정에 달했을 때 표독스러운 여인은 결국 두 사람에 의해 죄가 밝혀졌다.

배경이 바뀌면서 높은 첨탑과 같은 곳이 등장했다.

“아아, 나는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어!”

표독한 여인은 그곳에 갇힌 채 힘껏 무죄를 주장하다가 결국 비참하게 죽고 말았다.

그리고 다시 배경이 바뀌며 주인공인 두 사람이 등장했다.

"어떠한 고통 속에서도 당신을 놓지 않을게요.”

"당신만을 영원히 사랑하리라.”

아름다운 키스와 함께 그들은 영원히 행복했다는 내레이션이 들려 왔다.

모두가 환호성을 내지르고, 꽃잎을 던져 댄다.

하지만 나는 그럴 수가 없었다.

너무나도 익숙한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 내게는 역겨울 정도로 끔찍한 이야기.

바로 내 엄마, 악녀 프레이르의 비참한 죽음에 관한 연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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