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녀의 딸로 태어났다-65화 (64/185)

제65화.

연극은 성공적으로 끝이 났다.

사람들은 환호를 하면서 저마다 연극에 대한 감상평을 논하고 있었다.

모두가 즐거워하고, 모두가 행복 해하는데 나 혼자만 고개를 들지 못했다.

어째서인지 시몬 또한 연극이 만족스럽지 못했나 보다.

“보는 것만으로도 불쾌하군. 다 프네…? 왜 그래, 어디 아파?"

시몬의 입에서 내 이름이 나오자 나는 몸을 숙인 채 벌벌 떨었다.

누군가가 당장이라도 튀어나와서 악녀의 딸이 여기에 있다고 나를 잡아갈 것 같았다.

“왜 그래? 괜찮아? 젠장. 대공은 왜 아직도 안 오는 거지?"

내가 이상한 반응을 보이자 시몬은 잊고 있던 악셀리우스를 떠올리며 주변을 두리번두리번 살펴보았다.

'토할 것 같아.'

숨이 막히듯 괴로워 당장이라도 이 자리를 박차고 뛰어나가고 싶었다.

도망치려고 해도 이 꼬리표는 항상 날 따라올 것을 알고 있었다.

모두가 악녀의 죽음을 축하하고, 기뻐한다.

그녀의 딸인 내 죽음도 저렇게 되는 것이 정해져 있는 길이었겠지.

너무 무서워서 시몬의 손을 잡은 채 바들바들 떨고 있는데, 그때 옆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하께서도 연극을 보러 오셨나 보군요.”

낮은 중저음 목소리에 본능적으로 파드득하고 긴장이 되었다.

어디선가 들은 적 있는 목소리였고, 그의 정체는 금방 알 수가 있었다.

“혜로니스 공작도 연극을 보러 왔나?”

“그렇습니다. 가족들과 함께 외출을 한지라.”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느낌에 나는 빠르게 시몬 뒤로 숨었다.

시선이 와닿는 것이 느껴졌고, 숨 쉬는 것도 잊을 만큼 공포에 잠겼다.

“뒤의 아가씨는 누구입니까?"

“친우일세."

“친우?”

헤로니스 공작의 의아한 목소리에 불쾌감이 서려 있었다.

“왜? 내게 친우가 있다는 것이 이상한가?”

“이상할 것은 없지만 처음 보는 영애인 것 같아서 말입니다.

시몬이 못마땅하게 말하자 헤로 니스 공작은 별것 아니라는 듯 말했다.

“정식으로 인사를 하는 것이 제 영애에게도 좋지 않겠습니까?”

태연하게 꺼내는 말에 다시 등이 빳빳하게 굳었다.

“낯을 많이 가리는 이일세. 때가 되면 정식으로 소개시켜 주지."

“…그렇군요. 그럼 그날을 기다리고 있어야겠군요.”

싸늘한 목소리와 함께 분위기가 낮게 가라앉았다.

나는 그저 시몬의 옷자락을 쥔 채 고개를 푹 숙일 뿐, 어떤 말도 꺼낼 수가 없었다.

'혹시나 내 목소리를 듣고 알아차리면 어떻게 하지?'

자신의 딸이 아니라고 했으니 신경을 거둘까?

아니면 악녀의 딸이라고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떠들까?

어떤 것이든 나는 감당하지 못하고 눈물을 흘릴 것 같았다.

그저 조용히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다.

"여보!”

그때 근처에서 청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갑자기 말도 없이 자리를 떠나면 어떻게 해요.”

“아. 반가운 분을 만나서 말이야.

미안해.”

헤로니스 공작의 목소리라고 믿기지 않을 만큼 따스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머.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유니스 헤로니스라고 합니다."

“그래. 공작보다는 부인의 인사성이 더 좋은 것 같군.”

시몬이 꺼낸 말로 인해 이 여자가 누구인지 알 수가 있었다.

'1부의 여자 주인공. 내 친엄마를 악녀로 몰아 내쫓은 여자!’

그 순간 두려움마저 잠시 잊을 정도의 화가 치밀어 올라오기 시작했다.

' 애초에 저 여자가 없었더라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부정적인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차서 입을 열면 원망의 말이 튀어 나올 것 같았다.

다시 공작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런. 몰래 나오신 것 같아 가볍게 넘기려고 한 것이었습니다."

공작이 가볍게 웃음으로 넘어가려고 하자 시몬이 코웃음을 쳤다.

“그럼 아는 척을 하지 말았어야지.”

시몬의 까칠한 반응에 이 기회에 떠나자고 하려고 했다.

그러던 그때, 이번에는 밝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빠! 연극 너무 재미있었어요!

못 본 카스토르가 너무 불쌍해!”

지난번 가면 축제에서 들었던 밝고, 생동감이 넘치는 목소리.

마리아 헤로니스였다.

“카스토르도 보고 싶어 했는데, 내년에 또 열면 안 돼요?”

"글쎄. 우리 마리아와 카스토르가 보고 싶다면 내년에 또 진행해 볼까?"

“진짜요? 와아! 아빠 최고야!"

헤로니스 공작의 말에 마리아가 환하게 웃으며 그에게 안기는 소리가 들렸다.

맑은 웃음소리가 들려오는 것이 유니스 또한 그 모습을 보면서 웃고 있나 보다.

나는 그저 조용히 고개를 숙인 채 이 상황이 얼른 지나가기를 바랐다.

그때 시몬이 탐탁지 않은 목소리로 물었다.

“진행? 이 연극을 주최한 게 공작 그대인가?”

그 물음에 저 멀리 도망가 있던 정신이 번쩍하고 들었다.

헤로니스 공작은 별것 아니라는 듯 웃으며 답했다.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지면 안되는 사건이지 않습니까.”

“아무리 그래도 대귀족의 가정사를 저리 드러내다니."

“그래도 재미있지 않았나요, 전하?”

마리아의 맑은 목소리에 시몬이 답을 하지 않자, 마리아는 꺄르르웃었다.

“아빠가 엄마를 위해서 특별히 만든 연극이라고 했어요! 안 좋은 기억 모두 저리 날아가 버리라고!"

“마리아. 부끄럽게."

유니스가 말리는 소리를 내었지만 마리아의 입은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먼저 사랑에 빠진 건 아빠라고 했는걸! 아빠는 엄마를 위해서 뭐든지 다 해 줄 수 있다고 했어!”

“당신도 참. 애들한테 무슨 이상한 소리를 한 거예요."

유니스가 당황한 목소리로 헤로 니스 공작을 타일렀으나, 공작은 뻔뻔하게 웃음을 지었다.

"내가 먼저 당신에게 마음을 뺏겼던 것은 사실이잖아."

“정말이지.”

“정말 많이 사랑해.”

“저도 사랑해요.”

“나도! 둘 다 너무 사랑해요!"

누가 보아도 따스하고, 행복해 보이는 가족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시몬에게는 못마땅해 보였는지, 불편한 기색이 담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참. 공작은 전 부인과 사이에 아이가 한 명도 없었나?"

“… 없었습니다.”

갑작스러운 시몬의 질문이 달갑지 않은지 공작이 얼핏 짜증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거짓말.'

내가 여기 멀쩡히 살아 있는데 무슨 말인가.

그저 자신의 아이가 아니라고 부정하고 싶은 뻔뻔한 자가 나라는 존재도 지워 버린 것이 분명했다.

"내가 듣기로는 그렇지 않다던데. 보육원에….”

“그 아이는 제 딸이 아닌 악녀프레이르의 딸입니다."

시몬이 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공작이 말을 잘랐다.

“무례하군.”

“말을 끊어서 죄송합니다. 하나, 가만히 듣고만 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이런 말을 듣기 싫었다면 저런 연극을 하지는 말았어야지.”

시몬의 목소리에 따뜻했던 분위기가 금세 싸악 가라앉았다.

"아무리 악녀라고 한들, 그대의 본처였다는 것을 잊은 모양이야.

그녀의 죄가 어떻든, 적어도 공작그대는 이러지 말았어야지."

시몬은 공작을 보며 한심하다는 어조로 말을 이어 갔다.

“보육원의 그 아이가 죽은 것은 알고 있나?”

“…당연히 몰랐습니다. 제가 신경 쓸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아니. 그대가 신경 썼어야 할 일이지. 적어도 그대가 그녀의 남편이었으니까.”

시몬의 말에 공작 또한 싸늘한 목소리로 답했다.

"악녀의 딸입니다. 어찌하여 제가 제 딸로 들여야 합니까?"

“누가 호적에 들이라고 했나. 적어도 오스왈드로 보내 주는 정도만 했더라도 그 아이는 죽지 않았을 텐데.”

시몬의 말에 공작 또한 지지 않고 맞받아쳤다.

"오스왈드 제국과는 연락이 닿지 않았으니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래. 악녀를 첨탑에 가둘 때도 그 이유였다지.”

“합당한 벌이었습니다."

“참 안타깝지 않나. 부모를 잘못 만난 죄로 고작 일곱 살이 된 아이가 불 속에서 죽음을 맞이했다는 것이 말야.”

두 사람의 대화에 갑자기 공작부인 유니스가 끼어 들었다.

“불 속에서 죽었다니요?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말 그대로지. 창고에 불이 났는데 그 아이만 대피를 하지 못해 죽었다더군.”

“그런….”

유니스의 심각한 목소리에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던 공작이 다시.

입을 열었다.

“전하께서 갑자기 이러한 이야기를 꺼내시는 이유를 모르겠군요.

저희는 앞으로 자주 보게 될 텐데 말입니다.”

“오늘 연극을 보니 그 일에 대해서 고민이 되는군. 우리가 자주 보게 될지 말지는 내가 선택한다는 것을 잊지 말게.”

"하.”

시몬의 답에 헤로니스 공작이 기가 찬 웃음을 내뱉었다.

그 웃음소리에 나는 갑자기 궁금해졌다.

"만약에 악녀의 딸이 살아 있었다면 공작님께서는 어떨 것 같으세요?”

충동적인 질문이었다.

말을 섞기도 두려웠는데 어째서 이러한 질문을 할 용기가 난 걸까.

곧바로 헤로니스 공작이 불쾌하다는 목소리를 내비쳤다.

“그녀의 피를 이은 자식이 살아있다니. 상상만 해도 끔찍하군."

차갑기만 한 목소리에 지금껏 내가 생각하고 있던 무언가가 박살이 난 느낌이 들었다.

“어차피 모두의 저주를 받고 태어난 아이야. 평생을 저주 속에서 살다가 죽을 거라면 차라리 일찍 죽은 게 그 아이에게도 좋은 일이겠지.”

어떠한 죄책감도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에 귓가를 타고서 주변에서 감탄하는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오늘로써 악녀가 죽은 지 1년이 되었다더군.”

“죽어도 싸지!”

“어쩜. 주인공의 사랑 이야기가 너무 아름다운 것 같아.”

나만 다른 공간에 서 있는 그런 느낌이었다.

마치 주제라도 파악하라는 듯 억지로 내게 내밀어지는 말소리에 나는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내게 향하는 모진 말들을 피해 무작정 뛰기 시작했다.

연극부터 이 모든 대화를 듣고 있자니 나는 지금껏 내가 생각하고 있던 것에 대해 의문이 생겼다.

'정말로 모든 일이 마냥 유니스의 잘못인 걸까?'

그 생각이 머릿속을 세게 내려친 기분이 들었다.

'공작이 먼저 사랑을 했다고? 부인이 있었는데도?'

나는 왜 지금껏 유니스만을 원망하고, 미워해야 한다고 생각했을까.

유니스뿐만 아니라 우리 엄마를 외로운 죽음으로 몰고 간 자는 또 있지 않는가.

'저 남자야말로 내 친엄마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사람이었는데!'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나를 향한 눈빛이 떠오르니 두려움이 앞섰다.

왜 그랬냐고 묻고 싶었고, 정말로 우리 엄마의 잘못이었냐 묻고 싶었다.

하지만 결국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벌벌 떨면서 도망을 치고 있었다.

힘차게 뛰다 보니 다리가 욱신거리면서 힘이 풀렸다.

나도 모르게 균형을 잡지 못하고 큰 소리를 내면서 넘어졌다.

“위험해!”

주변의 소리가 바뀌었다.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 순간 기이한 느낌이 나를 감쌌다.

고개를 돌리자 멀지 않은 곳에서 마차가 나를 향해 거칠게 달려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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