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녀의 딸로 태어났다-66화 (65/185)

제66화.

시몬은 다프네가 달려간 쪽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무슨 일 있나?'

오늘의 다프네는 조금 이상했다.

대공과 싸운 것 같은 애매한 분위기도 그렇고, 연극을 보는 내내 보인 반응도 마찬가지였다.

마치 못 볼 것을 봤다는 듯 괴로운 표정 또한 이상했다.

'악녀 역을 맡은 배우가 죽을 때는 깜짝 놀라 했었지.'

고개를 숙여서 자세히 볼 수는 없었지만, 분명히 밝은 표정은 아니었다.

“참 버릇이 없는 아이군요. 어찌 저런 아이와 친우가 되셨는지.”

헤로니스 공작의 말에 시몬은 지금 자신이 누구를 상대하고 있는지 기억해 냈다.

'헤로니스 공작.'

아무리 공작이라고 하여도 부끄럽지 않은지 저렇게 성대하게 연극을 연 것도 같잖았다.

친히 충고를 해 주어도 잘못된 것 하나 깨닫지 못하다니 저자의 양심이라는 것은 존재하는 걸까.

“무슨 일이 생긴 것 같군.”

“전하를 위해서 조언을 하나 올리자면 전하와 어울리지 않는 아이는 가까이 두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내 친우를 결정하는 것은 나이지 그대가 아닐세."

시몬은 그 말을 가볍게 흘려들으며 한쪽 입꼬리를 비스듬히 올렸다.

"나 또한 조언을 하나 하지. 그 대의 딸을 황태자비로 올리고자 한다면 이런 연극은 하지 말게."

"…참고하도록 하지요. 그럼 저희는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시몬은 굳이 답을 하지 않고 가볍게 고개를 까닥였다.

공작은 불쾌한 듯했지만 가볍게 고개를 숙인 뒤 부인 유니스와 딸마리아를 데리고서 자리를 벗어났다.

시몬은 그들이 멀어지는 뒷모습을 보며 혀를 찼다.

“부끄러움도 모르는 가족 같으니라고.”

애초에 헤로니스 공작이 현 공작부인에게 반하지만 않았어도 일어나지 않았을 사건이었다.

그럼에도 저렇게 한 걸음 물러서서 피해자인 척하는 것이 우습기도 했다.

‘공작이라는 지위가 아니었으면 추문에 휩싸였을 텐데 말이야.'

시몬은 빠르게 몸을 틀었다.

오래간만의 외출인데 저들에게 시간을 낭비할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 뛰어나간 다프네가 걱정이 돼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왜 대공은 아직까지 나타나지 않는 거야!’

시몬은 투덜거림을 속으로 삼키고서는 다프네가 사라진 방향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지?’

주변을 살피면서 가볍게 뛰는데 멀지 않은 곳에서 사람들이 모인 것이 보였다.

무언가 오싹한 느낌이 들어 그쪽으로 빠르게 뛰어갔다.

마차가 다니는 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화려한 마차가 어정쩡하게 멈춰져 있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근처에 작은 여자아이가 쓰러져 있는 것을 본 순간 시몬은 반사적으로 이름을 부르며 뛰어갔다.

* * *

달려오는 마차에 반사적으로 눈이 감겼다.

다가올 고통에 떨고 있는데 누군가 나를 잡아채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세상이 돌았다.

빙글빙글 몇 번 돌고 나서야 멍한 정신을 붙잡고 천천히 눈을 떴다.

“다프네! 어디 다친 곳은 없어?"

악셀리우스가 굉장히 놀란 표정으로 나를 살펴보고 있었다.

"어쩌다가 저기에…. 아니다, 우선 놀랐을 테니까 집으로 돌아가는 게 좋겠구나."

나는 거친 숨을 내쉬며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내가 있던 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마차가 어정쩡하게 멈춰 있는 것이 보였다.

마차는 화려했고, 거대했다.

저 마차에 치여 멀리 날아갔다면 아마 나는 죽었을 것이다.

악셀리우스의 몸이 벌벌 떨리고 있었다.

아니, 악셀리우스를 붙잡은 나의 손이 떨리는 것이었다.

'죽음이라고…?'

문득 신전에서 보았던 책의 내용이 떠올랐다.

죽음은 언제나 너희의 곁에서 기회를 엿보고 있으니.

그와 함께 오늘 하루 이상했던 점들이 하나둘씩 떠오르기 시작했다.

튼튼하다고 자부하던 라그나르가 갑자기 아파 집에서 꼼짝도 못 하게 되었다.

악셀리우스는 내 비밀을 알고 잠시 거리를 두고 싶어 했고, 하필 연극은 악녀의 죽음을 다루었다.

그리고 그 연극을 만든 사람이 바로 내 친부인 헤로니스 공작이었고 나는 그를 피해 도망가다가… 죽을 뻔했다.

'죽음은 아직 내 곁을 떠난 것이 아니었구나.'

내게 가족이 생겼으니까, 라그나 르가 옆에 있으니까, 시몬과도 친구가 되었으니까 모든 것이 바뀌고 있다고 스스로 한 착각이었다.

'키키가 우리에게 온 것도 운명에 이끌려서 그런 것일까.'

“하하하.”

웃음이 나왔다.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었는데 홀로 변했다고 착각한 내가 우스워 미칠 것 같았다.

“다프네!”

누군가가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고, 고개를 들어 올리니 시몬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악녀의 딸인 것을 알게 되도 시몬은 나를 걱정할까?

그러한 생각을 하니 마음 편히 시몬을 바라볼 수가 없었다.

이 걱정을 곱게 받아들일 수도 없었다.

저 안에서부터 조심스럽게 쌓아올린 무언가가 무너지는 기분.

이 기분은 말로 설명할 수도, 표현할 수도 없을 만큼 최악이어서 나는 시몬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우선 집으로 돌아가자."

내 상태가 이상한 것을 알았는지 악셀리우스가 나를 번쩍 안아 들었고, 시몬 또한 급하게 우리를 따라와 마차에 올라탔다.

마차의 문이 닫혔는데도 불구하고 나를 향한 시선들이 사라지지를 않는다.

“죽고 싶지 않아….”

"뭐라고? 다프네?"

나는 달달 떨리는 팔로 머리를 감싸 몸을 동그랗게 말았다.

나를 괴롭히는 그 어떤 말도 듣고 싶지가 않았다.

시몬의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점차 멀어져 간다.

아무것도 듣고 싶지 않고, 보고 싶지도 않아 눈을 질끈 감았다.

새까만 공간에 나 혼자만 남아 있었다.

아무도 없다고 안심하는 그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깔깔거리며 나를 비웃는 소리도, 경멸 어린 눈빛도, 차가운 마음도 모두가 내게로 향한다.

나만의 공간에서조차 자유로워지지 못해 다시 도망쳤다.

힘껏 뛰었다고 생각했는데 무언가와 부딪혔고 고개를 들어 올리니 차가운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 보는 헤로니스 공작이 보였다.

"너는 내 딸이 아니다.”

1년 전 들었던 그 매몰찬 말과 함께 공작은 연기처럼 흩어졌다.

다시 까만 공간에 혼자 남겨졌지만 더는 달릴 수도, 이 자리에서 벗어날 수도 없었다.

세상이 나를 버린 것 같은 기분에 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곤두박칠치는 이 어두운 마음속에서 단 하나의 인물이 떠올랐다.

내가 누구의 자식이든 신경 쓰지 않을 사람, 내가 어떤 사람이든 나를 믿어 줄 사람.

언제나 내 곁에 있어 줄 사람.

'보고 싶어, 라그나르….’

네가 너무 보고 싶었다.

* * *

누군가가 내 몸을 거칠게 흔드는 느낌에 정신이 돌아왔다.

감고 있던 두 눈을 뜨니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엄마가 보였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곳이 내방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마차에 치일 뻔했다고 들었는데. 어디 아픈 곳은 없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주변을 살폈다.

라그나르가 보이지 않았다.

"라, 라그나르는 어디에 있어요?”

“방에서 쉬고 있는데. 우선 다친 곳부터 치료하고 찾아가도록 하자.”

"지, 지금. 지금 당장 보고 싶어요. 지금 당장!”

나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여 소리를 질렀다.

엄마가 말릴 새도 없이 침대를 박차고 뛰어나가 계단을 성큼성큼 내려갔다.

두려움은 심장을 부숴 버릴 것처럼 나를 옥죄이고 있었다.

등 뒤로 엄마의 당황한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당장이라도 라그나르를 봐야 나를 괴롭히는 이 목소리가, 이 시선들이 사라질 것 같았다.

나는 라그나르의 방문을 거칠게 열었다.

“라라!”

하지만 내 예상과 다르게 침대 위는 텅 비어 있었다.

“도, 망, 쳐…."

앓는 듯한 목소리가 구석에서 들려왔다.

라그나르는 자신의 몸을 둥글게 감싸 안은 채 구석에 앉아 있었다.

“왜 그래? 라라…?"

이상하고 기이한 예감이 다시금 나를 감쌌다.

마치 마차에 치이기 전과 같은 느낌에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저 착각일 것이라고 생각하며 라그나르에게로 서서히 다가갔다.

라그나르의 상태가 평소와는 달라 보였다.

아프다기보다는 마치….

“도망쳐!!!”

라그나르가 날카롭게 소리쳤다.

“무슨 소리야…? 왜 그래…?”

그때 라그나르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라그나르의 흰자가 까맣게 물들어 있었다.

마치 처음 만난 그날처럼.

그와 동시에 라그나르가 가볍게 뛰어올랐다.

그가 나를 덮쳐 강제로 바닥에 쓰러트렸다.

"윽!”

등이 거칠게 부딪혀 신음이 터져 나왔지만, 라그나르는 이성을 잃은 듯 내가 벗어나지 못하게 강하게 짓눌렀다.

“제, 발… 도망쳐, 다프네."

라그나르의 혼란스러운 눈에서 눈물이 도르륵 흘러내렸다.

나는 그의 손에서 무언가 반짝하는 것을 본 순간 눈을 질끈 감았다.

"이게 무슨 짓이야! 라그나르!”

리카르다의 목소리와 함께 나를 짓누르는 힘이 사라졌다.

눈을 뜨니 리카르다의 마법에 의해 라그나르가 저 멀리 날아간 것이 보였다.

어느새 연기에 속박된 그 모습은 그를 만났던 첫날과 겹쳐 보였다.

그의 시선 끝에는 내가 있었다.

다시 한번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나는 아직 이야기 속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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