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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딸로 태어났다-67화 (66/185)

제67화.

아마도 기절하듯 까무룩 잠이 든 모양이다.

다시 눈을 떴을 때에는 익숙한 내 방의 모습이 보였다.

창밖을 보니 어느새 저녁이 되었는지 마치 내 마음속처럼 깜깜하였다.

나는 허리를 세워 앉고는 허공을 멍하게 바라보았다.

라그나르가 나를 죽이려고 했다.

내가 살아갈 수 있다고 믿게 한 희망이 나를 죽이려 들었다.

내 희망이 꺾였다.

이 사실을 차마 받아들일 수 없어 너무 괴로웠다.

나는 얼굴을 두 손에 묻은 채 작게 흐느꼈다.

“라라….”

“…”

신은 어디까지 나를 밀어 넣고 싶은 걸까.

이러다가 정말로 눈 깜짝할 사이에 죽을 수도 있겠지.

죽은 엄마는 정말로 죄를 지었던 것일까?

그저 주인공들의 사랑을 위해 억지로 희생된 것이 아닐까?

나도 주인공을 위해 희생되어야만 하는 것일까?

꼬리를 무는 생각에 나는 눈물을 삼키며 고개를 들었다.

보육원에서 빠져나올 때 했던 다 짐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난 어떻게 해서든 이 이야기를 비틀어 버릴 거야. 바꿔 버릴 거라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발을 내 디뎠다.

키키가 내 옆을 맴도는 것이 보여 품에 꼭 끌어안고는 방문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엄마의 집무실에서 희미한 빛이 나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문이 살짝 열려 있네.'

나는 키키를 안은 채 문에 바짝 다가섰다.

안에서는 엄마와 레녹스, 리카르다가 함께 대화를 하고 있었다.

“다프네는?"

“충격을 받았는지 아직도 잠이 들어 있어요. 오늘 본 연극도 프레이르에 관한 연극이었다고 하더군요.”

엄마의 질문에 레녹스가 침통한 목소리로 답했다.

곧이어 리카르다의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분명히 지난번에 라그나르의 최면 마법이 모두 풀렸었어요. 어떻게 갑자기 이렇게 된 건지….”

괴로움이 가득한 목소리에는 짙은 후회가 깔려 있었다.

“제가 조금 더 확실하게 확인을 했더라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최면이 풀린 것은 우리도 옆에서 확인했잖아.”

레녹스가 리카르다를 위로하려 했지만, 소용이 없었는지 다시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라그나르도 굉장히 혼란스러워하고 있어요. 지금은 괜찮아졌지만 또 언제 변할지 모르겠죠.”

그게 가장 큰 문제라면서 리카르다가 머리를 쥐어 싸맸다.

“그런데 도무지 방법이 없어요!

제 마법은 들지도 않고…."

자신 없는 목소리에 곧 주변이 조용해졌다.

두 사람이 조용해지자 엄마가 입을 열었다.

“라그나르는 지금 어디에 있지?"

“스스로를 믿지 못하겠다면서 자기 발로… 용의 감옥에 들어갔어요.”

리카르다의 말에 나는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간신히 입을 틀어막았지만 충격적인 소식에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가만히 대화를 듣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문을 닫지는 않아서 갇힌 건 아니지만… 한 번 더 그런 식으로 변한다면 문을 닫아 달라고.…."

리카르다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라그나르를 구해 주지 못한 것에 대한 무력감, 그리고 그 선택을 말릴 수 없던 자신에 대한 죄책감이 가득해 보였다.

“이대로는 라그나르를 다프네의 옆에 둘 수 없다는 것은 확실해졌어요. 둘을 떨어트려 놔야 해요.”

“하지만 라그나르를 버릴 수는 없어요! 이제는 우리 가족이나 마찬가지잖아요!”

레녹스의 말도 리카르다의 말도 모두 맞았다.

엄마 또한 심각한 상황이기에 말을 꺼내는 것이 쉽지 않아 보였다.

결국, 이 모든 것은 내가 자초한 일이었다.

내 욕심에 남자 주인공인 라그나 르를 곁에 두려고 해서 그런 거다.

처음에 계획했던 대로 나에게 마음을 열었을 때, 확실하게 버렸어야 했다.

욕심을 부려서 남자 주인공을 옆에 두려고 하니까 운명이 내게 벌을 주려는 것일까?

행복은 순식간에 박살이 났다.

다시는 이 행복을 이어 갈 수 없겠지.

라그나르가 돌아와도 예전처럼 돌아갈 수는 없을 것이다.

모두가 그 아이를 불신의 눈으로 바라보게 될 테고, 결국 최악의상황으로 치닫게 될 것이다.

나는 엄마에게 두 번째 소원을 빌 때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래. 내가 데려왔으니까 내가 책임을 지는 것이 맞아.'

모두를 위해서는 내가 끝을 보는 게 맞았다.

나는 키키를 품에 꼭 안은 채 조용히 집을 나섰다.

어두운 숲이었지만 가는 길은 무섭지 않았다.

이 길보다 더 무서운 어둠이 나를 감싸고 있으니 두려울 것도 없었다.

나는 키키를 바닥에 내려놓고 말했다.

“용의 감옥으로 안내해 줄 수 있어? 라라에게 가고 싶어.”

키키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이내 알아들었다는 듯 가볍게 몸을 움직였다.

첫 만남처럼 토돗 토돗 하고 발걸음이 가볍게 움직였다.

멍하니 키키의 뒤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이성은 사라지고 눈물과 괴로움에 푹 젖은 감정이 나를 조종하는 것 같았다.

마침내 깊은 숲을 가로지르니 환한 빛이 나를 감쌌다.

달빛 아래 커다란 감옥, 그리고 그 안에 있는 라그나르를 발견한 순간 나도 모르게 울컥하고 울음이 터져 나올 뻔했다.

“라그나르.”

“…다프네."

우리는 나지막이 서로의 이름을 불렀다.

감옥의 문이 열려 있었지만 어쩐지 우리 사이를 가로막은 벽이 커다랗게 존재하고 있는 것 같았다.

"미안해, 미안해. 다프네….”

울음기 가득한 목소리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여기서 미안해야 하는 건 라그나 르가 아니다.

라그나르는 언제나 내게 최선을 다해 주었으니까.

하지만 나는 그런 너를 처음부터 이용하려고 데리고 왔었다.

나쁜 아이는 나다.

너는 나쁜 아이가 아니다.

라그나르의 앞에 서서 빤히 그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다프네 아니야. 정말 아니야. 널 공격하고 싶지 않았어. 나는.…!"

"알아.”

차갑게 울리는 목소리에 라그나 르의 표정이 나빠졌다.

금방이라도 죄책감으로 눈물이 터질 것 같아 빠르게 입을 열었다.

“라그나로, 사실 나는 미래를 알고 있어.”

“무, 슨 소리야?”

“그리고 그 미래대로 라면 내가 죽었어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고.”

“다프네, 네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어.”

당황해 흔들리는 라그나르의 목소리에 하나하나 내가 아는 이야기를 읊어 주기 시작했다.

"알고 있잖아. 내가 악녀의 딸이라는 걸 말이야.”

나는 슬픈 눈빛을 애써 감추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가 아는 미래대로 흘러갔더라면 엄마가 죽은 다음 날 나도 죽었을 거야.”

라그나르는 무어라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멍하니 나를 바라보기만 하였다.

“그런데 나는 정해진 대로 죽고 싶지 않았어. 그래서 죽기 전날 나를 살려 줄 만한 곳으로 도망쳤어.”

"베네디토 상단으로?"

라그나르의 혼란스러운 눈빛을 보며 나는 최대한 차가운 표정을 지었다.

“정해진 흐름대로 흘러갔다면 나 대신 네가 후계자가 되어 살아갔을 거야. 그리고 내가 아닌 어떤 아이를 만나서 사랑에 빠졌을 테고 행복하게 살았겠지.”

“…내가? 어, 어떻게 미래를 알게 되었는데?”

“믿기지 않겠지만 책에서 봤어.”

“고, 고작 책의 내용인 거잖아.

내가 어떻게 너를 두고 다른 애를 좋아해…? 도대체 그 아이가 누구인데?"

“악녀를 죽인 영웅들의 딸."

믿지 못하겠다는 라그나르의 눈빛에 나는 힘겹게 입 꼬리를 끌어올렸다.

“고작 책을 보고 어떻게 미래를 아냐며 욕해도 돼. 손가락질해도 괜찮아.”

아무런 대답 없는 라그나르에게 내 진심을 털어놓았다.

“하지만 난 정해진 미래처럼 가만히 죽고 싶지도 않았고, 그들이 행복해지는 것도 보고 싶지 않았어. 그래서 필사적으로 죽을 운명에서 도망쳤어.”

“다프네….”

"있지. 라그나르.”

"왜, 왜 그렇게 부르는 거야. 그렇게 차갑게 부르지 마."

“1년이 지났는데도 운명은 나를 쫓아오고 있어. 네가 갑자기 변해서 날 죽이려고 한 것이 그 증거야.”

라그나르는 무어라 말을 하지 못한 채 입을 뻐끔거렸다.

갑작스럽게 흘러가는 이 상황에 정신이 없어 보였다. 그러나 정신이 없는 건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누구에게라도 내 비밀을 털어놓지 않으면 가슴이 터져 버릴 것 같았다.

“끝까지 쫓아오는 죽음을 피하려면 역시 내가 아는 미래가 모두 바뀌어야 했던 거야. 널 내 옆에 두면 언젠가 또….."

“아니야! 난, 난 널 죽이지 않을 거야! 정말로 너를 죽이지 않을 거라고!”

애타는 목소리에 나는 숨을 크게 들이쉬고는 차가운 목소리로 답했다.

"나를….”

“다프네….”

목에 걸린 말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확실하게 말을 해야 하는데, 반드시 들려주어야 하는 말임에도 쉽게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해야 하는 일이었다.

"나를 원망해.”

"난, 나는 그럴 수 없어. 난...”

"너의 자리를 빼앗고, 너를 이렇게 버리고 가는 나를 원망해. 어떻게서든 악착같이 살아남으려는 나쁜 나를 원망하고 저주해."

“내가, 내가 어떻게 너한테 그래.

그런 말 하지 마!"

라그나르의 울음기 섞인 목소리에 나 또한 냉정을 잃고 울컥 올라오는 감정을 참지 못해 외쳤다.

“나는 더 이상 불안하게 살고 싶지 않아!”

“다프네.”

라그나르가 힘겨운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불렀다.

"나는, 나는! 살고 싶어! 이 빌어먹을 세상 속에서도 살아가서 미래를 모두 바꿔 버리고 싶단 말이야! 죽고 싶지 않다고!”

"내가, 내가 어떻게 해야 돼?"

라그나르의 목소리가 떨려 왔다.

무엇이든 해 주겠다는 듯 말만 하라며 애가 타는 목소리에 나는 혼란한 정신을 잡지 못하고 힘겹게 말을 이었다.

"나도 잘 모르겠어….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라그나르는 어쩐지 침착해진 목소리로 조용히 말했다.

"내가 이 문을 닫을까?"

“뭐라고?”

혼란스러웠던 정신이 한층 더 뒤엉켰다.

라그나르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일까.

이 문이 닫히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고 있다.

라그나르는 이곳에서 다시는 빠져나오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뿌연 머릿속은 그러한 것을 구별하지도 못한 채 눈물에 잠긴 듯했다.

라그나르의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정말로 내가 사라진다면 네가 무사히 살 수 있는 거야?"

애써 웃는 라그나르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있지다프네. 울지 마. 난 네가 울면 가슴이 너무 아파."

눈가에 가득 고인 눈물은 내 의지로 멈출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라그나르는 내게로 손을 뻗어 눈가에 고인 눈물을 닦아 주었다.

“한 번만 웃어 주면 안 돼?"

눈물에 흐려져 자세히 보이지는 않았지만 라그나르는 분명히 웃고 있었다.

나는 바들바들 떨리는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일그러진 웃음에도 뭐가 좋은지 라그나르는 미소 지었다.

눈물을 닦아 주던 손이 감옥의 문을 잡았다.

곧이어 철컹하고 무언가가 꽉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라그나르가 철창문을 닫아 버렸다.

순간,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깨달을 수 없었다.

“라그나르…?"

“다프네를 위해서라면 나는 괜찮아."

불안한 나와 다른 온화한 목소리에 나는 고개를 푹 숙였다.

"울지 마, 다프네."

손으로 붙들고 있는 차가운 철창의 온도가 뼛속까지 시리게 다가왔다.

나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어 그저 키키를 안고서 거침없이 뛰었다.

내가 저지른 일을 마주할 용기가 없어서 도망쳤다.

그래, 나는 나쁜 아이잖아.

'원래 이러려고 했어! 살기 위해서 나쁜 아이가 되기로 했었잖아!'

그러한 생각을 하다가 뛰던 걸음을 멈추고서 자리에 주저앉았다.

이제는 울어도 위로해 줄 라그나르는 옆에 없겠지.

눈물이 가득 차 앞이 보이지 않는다는 핑계를 대면서 그 자리에서 한참이고 눈물을 터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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